김종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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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林.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86년 1월 19일 함경남도 정평군 창덕면 삼봉리에서 부친 김도식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김종림이 1913년에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흥사단 이력서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교사인 부친(56)과 모친 이씨(57), 그리고 학생인 동생 김복돌(11) 그리고 처 박씨(29)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부모와 처를 동반하고 이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와이 이민에 동반했더라도 북미 본토로 왔을 때는 단신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8년 3월 10일 멕스웰시의 교회당에서 멕엘리쓰와 혼례를 올렸다. 이를 보도한 <신한민보> 1918년 3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혼례비용은 5천원이었다고 한다. 이후 1920년 8월 23일에 첫 딸을 낳았으며, 1922년 9월 10일에 아들 김진원(제임스)를, 이후 둘째아들 김두원을 낳았다. 김종림의 두 아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 해군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루샨열도에서 통신부 사관으로 복무하였고, 둘째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서 필리핀 해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김종림의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만 20세였던 1906년에 하와이로 이민했다고 한다. 그는 이력서에 1906년 3월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고 1909년 북미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고 기재했다. 하지만 <공립신문>에 따르면, 김종림은 1907년 1월 2일에 알라메다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고 한다. 김종림은 북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유타주 솔트레이크시로 가서 그곳에서 부설되고 있던 철도건설 현장에 노동자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1월 중에 독립협회 솔트레이크 지방회 회원으로 입회했다. 하와이에서 북미로 이주해 오자마자 곧바로 노동고용을 맺고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북미 이주 이전부터 공립협회와 연통하고 있었고 공립협회를 통해 직업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살니아 프레스노 등지에서도 노동자로 일했다.

김종림은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공립협회의 지방회인 솔트레이크 지방회와 프레스노 지방회에서 지방회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1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대한인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서 신임 법무원 대행에 선임되어 북미총회의 일을 맡았다. 이어 7월에는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총무 겸 학무원을 맡았고, 1910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 당시에 전도유망한 한인 청년들의 대학비를 대주었다. 후일 대한인 국민회의 지도자가 된 이대위도 김종림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또한 1910년 2월에 선우탄, 강호영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찬관을 개업했다. 양찬관은 레스토랑과 여관을 겸임하였는데, 이곳의 개업은 김종림의 첫 실업 활동이었다.

김종림은 재미한인 언론 활동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07년 8월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공립신보사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지불했다. 당시 공립신문은 창간 이래 줄곧 석판인쇄로 발행하다가 1907년 4월 26일부터는 활판인쇄로 발행했다. 그러나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해 다른 인쇄소에서 신문을 발행했다. 공립신보는 1907년 11월 8일자에 <신보 확장할 취지서>를 발표, 국권을 회복하고 국민을 문명케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인쇄 기계 구입을 위한 의연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김종림은 이 때도 적극 동참하여 상당한 의연금을 지불했다. 이후 공립신보는 미국 만이 아니라 조선, 만주 및 연해주 일대의 동포 사회에 신문 자사를 두고 신문 배포를 꾀했다. 김종림은 조선에 10건의 공립신보를 발송하는 의무를 지고, 공립신보 전파를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공립신문은 1908년 11월경 조선에 평안도 18개, 경상도 7개, 함경도 5개, 황해도 4개, 서울 3개, 경기 2개 등 총 39개의 지사를 설치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는 걸 우호적으로 평가한 미국인 외교관 더럼 W. 스티븐스를 암살했다. 이때 김종림은 직접 공립협회 인쇄원이 되어 이 사건을 다루는 신문 발간에 종사해 한인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일제 통감부는 공립신보가 배일사상을 증폭시킨다고 판단하고 1907년 4월 22일자로 공립신보의 우편발송을 정지시키라는 비밀공문을 각 이사청에 보냈다. 또한 기존의 신문지법으로는 한국인이 외국에서 발행하는 공립신보와 대동공보 등을 규제할 수 없자, 1908년 4월 신문지법 개정을 단행하고 1908년 5월 5일 <신문지법 압수처분에 관한 내규>와 <신문지 압수에 관한 집행요령>을 제정하였다. 이리하여 공립신보는 1908년 3월 187일자(제74호)가 압수되는 것을 시작으로 1908년 12월 30일자(제114호)까지 총 40호 중 22차례에 걸쳐 압수 처분을 받았다.

한편, 김종림은 재미 한인들과 함께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자본군 20,000달러를 모집하기 위해 매주당 25달러로 총 800주를 발행하고 자본금 총액의 1/10이 되면 개업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주식을 판매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공립신보사에서 정원도와 김영일이, 그리고 김종림은 김사옥과 함께 프레스노의 연합공립관 안에 사무소를 두고 주금 모금에 착수하였다. 아시아실업주식회사는 “본회사의 목적은 식산흥업에 근본하야 농상공을 불문하고 내지 혹 외국에 적당한 곳이 있으면 함”이라는 설립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취지서를 발표하여 한인동포사회에서 실업장려가 가장 급선무임을 호소하며, 한인 사회에 공동 투자를 받아 식산흥업을 주도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러시아 해삼위 즉 블라디보스톡에 본점을 두고 지점은 하와이와 한국내에 두고자 했다. 이후 1909년 4월에 태동실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개칭했다.

국민회 이사회에서는 독립군기지 개척 및 원동지회 설립을 위해 북미지방총회장인 정재관과 국민회 이사인 이상설을 해삼위로 파견할 것을 결의하는데, 국민회 제1회 이사회 기념사진에는 만국평화회의 특사였던 이상설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 그리고 최정익, 송종익과 함께 김종림이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정재관과 이상설은 1909년 7월 해삼위에 도착하여 공립협회 시절 이미 파견된 이강과 백원보·김성무·전명운 등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태동실업주식회사의 주식 판매로 확보한 자본금 5만 달러로 북만주 밀산 봉밀산에 2,430에이커를 구매하였고 바로 독립운동기지 개척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기지개척 사업은 일제의 방해, 러시아의 비협조, 자본 부족 등의 여러 원인으로 실패했다.

쌀의 대왕[편집 | 원본 편집]

1910년경, 김종림은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경험을 살려 백인의 땅을 임대해 한인 농업인들을 고용하여 땅을 일구게 했다. 또한 1911년 노동으로 번 자금을 가지고 감자산업에 뛰어들어, 스탁톤에서 개시한 잡화상점인 '허리상점'에 투자했다. 허리상점은 처음에는 번성했으나 감자시세가 폭락하면서 파산했다. 김종림 본인도 감자농사를 직접 지었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만뒀다. 이후 김종림은 벼농사에 착수하기로 마음먹고 ,1912년부터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다. 김종림은 처음엔 벼농사를 여러 사람과 합작하였고, 자작농을 하기도 했으며, 백인농장에서 10분 병작[1]을 하기도 했다. 1913년과 1914년 연이어 벼농사를 했으며, 특히 1914년에 마춘봉과 함께 공동으로 쌀농사를 경영해 큰 수확을 거두었다.

1915년에는 쿠루사지역에서 100 에이커의 면적에서 벼농사를 지었는데, 당시 보도기사에 의하면, 김종림은 6,200여 석의 추수를 거두었다고 한다. 당초에 300 에이커의 경작지에 농사를 짓고자 계획했으나 장마 피해로 인해 100에이커에만 볍씨를 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우려를 불식하고 직접 농업 경작을 하여 풍족한 수확을 얻었다. 1915년도에 이어 1916년도에도 그의 농업 경작은 풍작을 이루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였기에, 김종림은 실업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김종림은 이러한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했고, 흥사단 이력서에 본인의 장기가 '최장기능 경전'이라 소개하며 자신의 천성이 농사꾼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한편, 김종림은 흥사단원과 대한인국민회원들이 주로 주주로 참여한 북미실업주식회사와도 공동으로 농업투자 및 경영을 모색하였고 성공적인 농업경영으로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민족적 실업회사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1916년에 설립된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총자산이 5,000달러이며 매 주식가는 100달러였다.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자본금이 10만달러에 달하는 때에 회사를 중국으로 이전하여 달러 가치가 동양화(중국돈) 20만원이 되면 이를 기반으로 금융기관을 설치하고 한·중 두나라의 민간자본을 모집해 은행을 설립하려던 계획을 세웠다.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임원 중에 김종림을 비롯해 박영순, 송종익, 임준기, 정봉규 등이 흥사단원이었는데, 이들은 송종익을 제외하면 모두 농업경영가들이었다.

농업 경험이 풍부했던 김종림은 북미실업주식회사가 투자한 벼농사사업에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였다. 쌀농사가 연이어 풍작을 맞이하자, 캘리포니아 실업계에서 벼농사는 유망한 사업으로 부상하였다. 한인들의 벼농사 경작 규모도 점차 확대되어 새클라맨트 밸리 안에 멕스웰·댈라빈·윌로우스 등지에서만 85인 정도의 한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한인들의 개척력과 농업 기술로 벼농사가 성공을 거두자, 백인 농장주들은 한인들의 농사 기술과 경험을 높이 사서 한인들을 감독으로 고용해 벼농사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한인 경영 벼농장에서 구할 한인노동자가 부족해졌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필리핀 사람을 고용하기도 했다.


1917년 한인들에 의한 농사 경작 면적은 총합 2,085에이커였다. 그 중 댈라빈에서 벼농사를 경작한 김종림의 경작면적은 1,030에이커로, 한인 전체 경작 면적의 50%에 달했다. 김종림은 '쌀의 대왕'이란 별칭으로 불렸고, 재미 동포들 중 가장 먼저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자금이 풍족해지자 이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신한민보가 공립신보의 뒤를 이어 등장한 뒤 새로운 식자기를 구입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자, 그는 샌프란시스코 총회관을 방문해 200달러의 거금을 식자기 구입명목으로 기부했다. 200달러는 식자기 제작 비용에 들어간 1,000달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또한 1918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자신의 집에서 한인 농업인들과 함께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그 자리에서 국치기념적립금 91원 20전을 거뒀다. 그리고 1920년 4월 14일에 결성된 윌로우스 여자애국단 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20년 가을 추수를 앞두고 캘리포니아지방에 대홍수가 휩쓸었다. 김종림이 윌로우스지방에서 경작하는 벼 농지면적은 총 7,000에이커였다. 그런데 1920년도 추수를 앞두고 윌로우스 일대를 휩쓴 대홍수 사태로 추수를 앞둔 벼들이 쓰러져 추수경비가 배로 들었고 여기에 식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김종림을 비롯한 한인 벼농장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북미실업주식회사의 농업 투자 사업도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송사에 휘말렸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상하이에서 활약한 구국모험단에서 폭탄 제작 실험을 하던 중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이로 인해 인근을 오가던 프랑스 조계 경관이 큰 부상을 입고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이에 프랑스 조계당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프랑스 조계 밖으로 출퇴시켜 버릴 것을 엄포하였다.

당시 전황을 위기로 판단한 안창호는 서둘러 프랑스조계 당국을 방문하였다. 안창호는 1만달러로 부상당한 경관의 치료비와 손해배상을 물어주고 다시는 과격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안창호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임시정부는 그대로 프랑스조계 안에 있게 되었다. 이렇게 사건은 수습되었지만 안창호가 제공한 1만달라의 출처를 둘러싼 후폭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문제를 제기한 측은 1만 달러가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주본금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하고,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법정에 고소하고 회사의 회계 장부를 조사해 줄 것을 강청하였다.

사실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윌로우스 벼농사에 3만달러를 투자했다가 홍수로 인해 손해보았고 귤밭을 매수하여 경작 중에 있었다. 또한 김홍균이 경작하는 콩재배 농사에 1,500달러를 대여해 주었다가 경작 실패로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재무상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소송에까지 휘말리게 되자, 회사는 곤경에 빠졌다. 여러 해를 두고 들어간 법정 비용은 회사자금 중에서 지출되었다. 결국 소송은 기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이 수천 달러 선금을 주고 매수한 귤밭은 지주에게 환원되어 버렸고 자금은 15%로 떨어졌다. 김종림은 주주총회를 소집하여 회사의 진로를 토론하며 회사를 살려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회사는 악화된 재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주당 주주에게 15센트씩 배당한 뒤 파산했다.

이렇듯 상황이 악화되었지만, 김종림은 여전히 건재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당선된 최진하가 1921년 10월 중 북가주지역의 동포사회를 순행하면서 10월 15일에 윌로우스에 도착했다. 당시 윌로우스에는 김종림을 비롯해 임준기·전명운·윤혁·이흥만·신광희·마춘봉·신달윤·이인백·이재성 등이 벼농사를 종사하고 있었는데, 최진하는 여러 인사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당시 최진하의 방문기에 의하면, 김종림는 3,300에이커의 농지에서 벼농사를 경작하였고 한인 15인이 그의 농장에서 노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종림은 벼농장 외에도 여러 회사를 건립해 실업활동을 병행했다. 1920년 9월에 과학적 설비를 갖추고 과일과 채소를 가공해 상품화하여 이를 중간 유통시키고 판매하는 회사인 리들리 건제회사를 설립하고 회사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과학적 신식기계를 사용하여 “각종 과일물과 채소를 건재하며 매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회사의 자본금 총액은 4만원이고 1주가는 1백원이며 매년 2월 주주 총회에서 배당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리들리 건제회사는 훗날 김형제상회 재편되어 미주 한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로 발돋움했다.

1920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토지법안 개정안>이 미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미국 시민권이 없는 모든 동양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되, 미국 시민권을 확보한 동양인은 토지 소유권리를 인정했다. 김종림은 이 개정안이 통과될 것에 대비하여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장인 윤병구와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는 비행가양성소 훈련생인 홍종만과 정몽룡 등과 함께 농업 경영회사인 유니언 식산회사를 설립하고 캘리포니아주 당국으로부터 11월 12일에 영업 인허장을 발급받아 곧바로 회사 운영에 착수하였다. 이 회사는 ‘‘부동산을 팔고 사는 일, 보통 계약하는 일, 중상의 사업을 하는 일, 황무지대를 사서 토지를 개척하고 매매하는 일, 땅을 사기도 하고 세를 얻기도 하여 각종 농사와 과일 수확을 하는 일과 토지를 세주는 일, 재정을 취하여 주는 일, 법정에 송사할 일이 있으면 송사하고 송사를 당할 일이 있으면 당할 일, 본 회사의 고본을 팔고 다른 회사의 고본을 사기도 하는 일, 본사 소관 제조권과 발명하는 물건을 쓰고 팔기도 하는 일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수행했다. 사장은 윤병구가 맡았고, 김종림은 부사장 겸 재무로 선임되었다.

1921년 벼농사는 전년에 비해 풍작을 이루었지만 1920년도 농작의 실패와 농작물가의 저하로 인해 농업 병작을 하는 이들의 수효도 1백여인에서 20여인으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처럼 농업 경영의 어려움이 이어졌으나 김종림은 여전히 대한인국민회 윌로우스 지방회에서 대의원,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재무장에 직임을 맡아 공적 영역에서 활약하였고 공무 또한 소홀하지 않았다. 또한 1923년 덴버 부근의 비옥한 땅을 기반으로 하여 농상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윌로우스지방 고본모집위원을 맡았다. 농상주식회사는 사무소를 시카고에 두었고, 농원은 덴버에 두어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주식을 모을 때 개인적 영업의 이익 차원이 아닌 대의에 기여한다는 민족 공의 정서를 한인 사회에 호소했다.

여러분이여,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를 돌아볼지어다. 상관없다 책임없다 고집치 마시고 자신의 권의를 자중하샤 새사회 건설 에 공헌하자.

- 신한민보, '농상주식회사는 고본을 증가하야 사업을 대확장할 계획으로 활동', 1923년 11월 1일자 기사

이렇듯 김종림은 농업 분야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미주 한인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업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독립운동 후원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독립금 의연과 한인비행학교 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다. 이에 대한인국민회는 의연금을 모집해 3.1 운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종림은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1,345달러를 지불했는데, 이는 모집된 의연금 중 가장 많은 금액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애국금 수금위원인 송종익의 보고에 의하면, 윌로우스와 멕스웰 지방의 벼농장지대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한인 118명인데, 이들로부터 수합된 애국금은 총 42,955달러였다고 한다. 이 중 김종림이 의연한 애국금은 3,400달러였는데, 역시 가장 많은 금액이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에서 수봉하는 국민의무금은 물론이고 교회건축금과 동포사회 공동체를 위한 의연이 이루어질 때마다 빠짐없이 참여했으며, 박은식의 <한국통사>가 상하이에서 출판되었을 때 출판 의연금을 헌금했다.

3.1 운동 이후 한인자치운동이 번성했을 때, 김종림은 대한인 국민회 멕스웰 일대와 윌로우쓰 파출소 위원에 임명되어 한인사회의 자치 질서를 유지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리고 1919년 12월 2일부터 샌프란싀스코에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조소앙의 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인 노동사회개진당에 참여하였고, 창립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집행부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앞장서서 지원금을 찬조하고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12월 22일부터 30일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재미한인국민대회를 소집하였다. 국민대회는 각 지방의 대표원 29인이 출석해 16차례의 회의를 갖고 시국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원 중에는 김종림도 있었다.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보조를 맞추고 함께 독립전쟁을 준비해 갈 의지를 국민대회를 통해 결의하였다.

김종림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재무의 직임을 맡으면서 '21예금'[2]을 모금해 수납할 임무를 부여받았고, 이와 함께 비행기 구입과 학교 운영에 관한 예납금 수봉의 책임을 맡았다. 아울러 이후 설립되는 비행사양성소의 운영 책임까지 맡았다. 그러나 21예금은 응하는 이가 적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일제가 1919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간에 간도 일대에서 한인을 학살한 간도 참변 소식이 전해지자, 재미 한인들은 간도 한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금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김종림은 윌로우스지방에서 구제금 모금에 참여했다. 이렇듯 그는 각종 의연금 모집에 적극 참여했으며, 금액 면에서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액수를 의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공로를 인정하여 재무총장 이시영의 명의로 김종림과 임준기, 신고아희, 김승길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1920년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비행군단 창설의 임무를 위임받고 미국에 찾아왔다. 앞서 국민대회에서 공군 양성의 임무를 맡았던 김종림은 노백린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무엇이 가장 필요한 일인가를 물었다. 이 때 노백린은 “미국은 일본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비행기를 발명한 나라이니 여기서 우리 젊은 한인 조종사를 길러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고 한다.[3] 노백린은 1920년 2월 5일 실제로 비행훈련을 지도할 교관 초빙과 비행학교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했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는 한국인 오임하, 이용선, 이초,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 등이 재학하고 있었다. 노백린은 이들을 만나 비행학교 창설과 운영에 관한 구체적 의견을 나누고 조만간 출범할 비행학교의 설립에 필요한 여러 가지 협조도 구했다.

비행학교가 위치할 윌로우스에는 1910년 후반부터 벼농사에 종사하는 약 100여 명 이상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윌로우스에서 보내온 2월 20일자 전보에 의하면, 윌로우스의 농장주들이 모여 한인비행학교 설립에 합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윌로우스에 소재한 프린츠학교의 교사를 임시로 사용할 수 있는 허가도 받아냈다. 비행학교가 윌로우스에 정해진 까닭은 윌로우스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던 김종림이 비행군단 결성과 비행사 양성 학교 설립의 재정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농장 중 40에이커 규모의 땅을 비행훈련장으로 제공하고, 비행기 3대를 구입해 비행학교에 기증하고 훈련과 교육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는 비행장 건축은 물론 가솔린 탱크와 천막 등 모든 기구와 시설을 갖추는 경비 일체를 전담하였다. 그리고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던 윌로우스의 서양인 회사로부터 100달러의 찬조금을 받았으며, 중국인으로부터 20달러의 찬조금을 받았다. 또한 윌로우스 애국부인회를 비롯한 인근의 한인들은 필요한 음식물을 제공하기로 약조했다.

김종림은 3대의 비행기를 마련한 뒤 농장 내에 비행기 활주로를 닦고 훈련시설을 갖췄다. 그리고 훈련 교관으로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인 미국인 프랭크 K. 브라이언트를 초빙했다. 처음에는 프린츠학교 교사를 임시로 사용했으나 캘리포니아 교육국과의 협의를 통해 퀸스학교의 시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퀸스학교는 1914년 이민자를 위한 학교로 설립되었으나 1918년이래로 폐교된 채로 방치되어 있어서 학교시설 이용이 가능했다. 윌로우스의 한인청년 10명은 낮이면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 노백린의 지도아래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0년 3월 1일자 윌로스데일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노백린은 "비행학교는 3·1운동 연장선에 있으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고 호언하고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훈련생을 모집했을 때 24명이 지원했는데, 이중 최종 15명이 훈련생으로 선택되었다. 비행군단의 15명의 훈련생을 기반으로 비행사 훈련을 위한 학교 설립도 박차를 가하였다. 1920년 7월 5일 ‘한인비행사양성소’라는 교명으로, 각지에서 몰려든 200여 명의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개소식이 성대히 진행되었다. 개교식에는 총재 김종림과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참석하였다. 비행사양성소가 개소하기까지 동포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낸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총무 곽림대가 연설했다. 그리고 이날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킨 브라이언트 교관과 오임하가 개교 축하 기념 비행을 했다. 곽림대의 회고에 따르면, 15인의 훈련생들은 "동경에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는 결의를 내세우고 맹 훈련을 했다고 한다. 훈련생 외에도 10여명은 입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들 입학 학생들에 대한 정식 수업은 7월 6일부터 시작되었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수업 과목은 비행훈련과 함께 무선전신학과 비행 기수선학(정비)의 과목을 전부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제1회 졸업식은 1920년 7월 7일에 거행되었다. 졸업생은 4명으로, 우병옥, 오임하, 이용식, 이초였다. 비행사양성소에선 이들 졸업생을 훈련 교관으로 임명하여 입학생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졸업식에는 총재 김종림과 노백린 교장이 참석하였다. 일제 정보원은 이날 졸업식에서 한인들이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한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고 극언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노백린은 상하이로 돌아갔고, 김종림은 비행사양성소 총재로서 학교 운영을 온전히 책임졌다. 그는 감독 1인과 재무찬무원 1인이 학교를 관리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하고 새로운 장정이 제정될 때까지 비행학교의 임시 감독으로 곽림대를 선임하였다. 곽림대는 비행사양성소의 감독 직무를 수락하고 윌로우스 그랜 카운티의 한인비행사양성소로 부임하였다.

당시 비행군단 건립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41명으로, 이들은 표면적으로 회사 혹은 구락부 조직을 표명하였다. 총재 김종림을 비롯해 부총재 송덕용, 서기 강영운, 재무 이재수·신광희, 감독에 곽림대, 간사에 임치호·마춘봉·이암·진영구·이진섭·송익균·한성준·양순진·윤응호·이운경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상회를 운영하고 있던 실업가들이며 친목적인 클럽으로서 한인비행사구락부를 자처하였다. 한인비행사구락부는 김종림이 비행군단을 조직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에게 은으로 만든 빙컵을 선물했다. 또한 미국인 비행가들이 직접 비행기를 몰고 와서 심방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김종림은 학교운영의 총실무를 맡은 곽림대와 함께 학교운영 재원을 조달하는데 전력하였다. 1920년 6월 30일부터 7월 8일까지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에서 비행사양성소의 보조금을 지출하기 위해 회원 각자의 1년 수입의 50%를 소득세로 납부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비행사양성소 운영 재정 마련은 여의치 않았다. 구미위원부가 재미한인들의 독립의연금 수봉을 독점하면서 대한인 국민회의 재정 상태가 곤궁해져 비행학교를 지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종림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7월 25일 비행가양성소 장정을 공표하고 총재 중심의 운영체제 채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7월 26일에는 ‘비행가양성소취지서’를 발표하여 비행사를 양성하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행사를 공급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강조했다.

우리는 혈전에 공급하기 위하여 무엇을 준비함이 마땅한 바, 들이 넓으면 육군을 양성하고, 바다가 가까우면 해군을 연습하고, 공창이 있으면 무기를 제조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미주에 재류하는 우리의 형편으로는 명수가 적으니 육군을 편성함에 넉넉지 못하고 오직 열린 금전을 거두어 재력의 일부를 당함이 의무의 하나라 하겠나이다만은, 그 보다도 더 유익하고 필요한 사업이 있으니 이는 이 원동이나 어느 다른 천지에서는 할 수 없는 비행가양성이 그 사업이올시다.


지금 원동에서는 이 사업만은 미주에 재류하는 우리에게 의뢰하고 믿고 바라는 바, 만일 우리가 좋은 위치와 기회와 힘을 가지고도 저들의 바람을 공급치 못하면 이는 곳 의무를 저버림과 같은 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혈전에 공급하기 위하여 우선 헌신하는 청년들을 모아 비행술과 무선전신법을 실습케 하는바, 이 사업에 뒤를 공급하기 위하여 비행가양성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 장정을 만들어 우리 동포에게 넓히고자 하오니 누구시던지 혈전의 필요를 깨닫거든 속히 본사에 참가하여 군사의 준비로는 유일무이한 이 사업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많은 공이 되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신한민보, '비행가양성성소취지서', 1920.8.12.

비행학교는 사원으로 참여한 이들로부터 월례금 10달러씩 의연받았고, 훈련 학생들로부터 150달러의 학비를 받았다. 이 학비는 학생들이 김종림의 농장에서 직접 노동하며 받은 임금으로 충당되었다. 한편 비행사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중도에 퇴학하거나 졸업한 후에라도 반드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에 1년 이상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 11월 초 추수기에 윌로우스 일대에 불어닥친 대홍수로 인해 김종림을 비롯한 한인 사회가 큰 손실을 입으면서, 비행학교의 재정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중고로 구입한 비행기가 훈련 중에 고장이 나도 비행기 수리비용 조차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행학교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훈련생 가운대 박희성과 홍종만은 1921년 1월부터 새크라멘트에 있는 사립 비행학교로 전학하여 계속 비행 훈련을 받았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김종림은 다른 방도에서 군사훈련 지원을 도모했다. 곽림대와 최윤호가 1920년 가을학기부터 캔터키 무관학교에 입교했을 때, 김종림은 그들의 학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버지니아 밀리터리 칼리지에 재학 중인 이복원의 사관교육 학비도 지원했다. 그러나 1921년 4월 10일 레드우드비행학교 졸업 시험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졸업 대상자 박희성이 한인 청년들의 비행훈련에 호의적이었던 한 미국인으로부터 빌린 비행기를 타고 졸업 시험을 치르다 추락하고 만 것이다. 비행기는 대파되었고, 박희성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박희성은 <신한민보> 1921년 3월 31일자 기사에서 "우리 비행학생 성적, 박희성씨가 가장 능란"라고 보도할 정도로 우수한 조종술을 갖추고 있어서 한인 사회의 선망을 받고 있었다. 이날 사고로 인해 졸업 시험을 볼 예정이던 이용근과 정몽룡은 졸업시험을 포기해야 했다.

김종림은 4월 중순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장 최진하에게 청원서를 제출해 부상당한 박희성의 치료비와 대파된 비행기 보상비를 요청하면서, 비행학교가 계속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최진하는 독립운동과 나랏일에 유익함을 들어 재미 동포사회의 지원을 호소했고, 각지에서 박희성의 치료를 위한 동포들의 의연금이 보내졌으며, 중국 상하이의 대한적십자회에서도 박희성의 치료비로 50달러를 보냈다.

또한 대한인 국민회는 1921년 4월 26일 만장일치로 비행학교에 대한 지원을 최대한 협조하기로 결의하였다. 파괴된 백인 비행기의 보상문제는 현재 미주한인들의 재정상태가 매우 어려움에 처해있으므로 지출하기 어렵지만 박희성이 치료 후에 비행학교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리고 비행학교의 낡은 비행기를 중수하는 데 소요되는 500달라의 비용도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다방면에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행사양성소는 당초 기획했던 2년간의 교육일정을 채우지 못하고 1921년 4월 중순경 문을 닫고 말았다.

박희성은 동포 사회의 지원 덕분에 치료를 마치고 1921년 4월 28일 무사히 퇴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7월 18일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 비행병 참위에 임명하면서, 그들의 비행훈련이 임시정부 군사훈련의 일환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레드우드비행학교의 졸업시험을 통과해 5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하였고 국제비행가 자격증을 얻었다. 이렇듯 김종림이 기획했던 비행학교는 비록 교육기한을 채우지 못했지만, 임시정부의 비행장교를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의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23년 멕스웰에서 열린 3.1절 5주년 기념식에서, 김종림은 "이제는 대동단결"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재미한인사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대한인 국민회, 동지회 등의 조직이 지도 노선과 정치적 입장 차이 등의 문제로 인해 갈등을 빚었다. 게다가 김종림이 참여한 흥사단과 대한인 국민회 내부에서도 노선의 차이로 단원간의 갈등이 조성되었다. 그들은 안창호가 중국 관내와 한인사회에 실정에 맞춰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촉구한 것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은 침체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재미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의 활기가 살아났다. 1930년 1월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지의 한인들은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의연금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는 교민들이 모인 가운데 1930년에 3.1절 기념식을 개최한 후 나성한인공동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김종림은 한인공동회 규칙을 제정, 공표하고 7인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31년 만주사변 소식이 전해지자, 한인공동회는 미주 한인들의 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1931년 11월 9일 대한인 국민회와 통합하여 미주한인연합회를 출범시켰다. 로스엔젤레스의 동지회도 1933년 2월 한인연합회에 가담하여 통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3월에는 김규식이 미주의 동포사회를 순행하면서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의 후원을 호소했을 때, 한인공동회는 김규식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통일운동은 의연금 수합의 권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1929년 무렵부터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는 1939년까지 그 여파를 미치고 있어서 재미한인들의 경제상황도 어려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김종림은 나성한인공동회의 위원장을 맡는 한편 대한인 국민회에서도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어학교 설립을 위한 후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30년대 재미 한인의 30%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현실을 반영하여 1936년 7월 총회관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건축비 1만 달러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김종림은 앞서 1936년 5월 17일에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원탁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인 국민회 부흥책과 합동안을 논의하며 대한인국민회의 발전을 위해 전력하였다. 7월 5일 대의회를 개최하여 7개항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국민회는 새로운 대한인국민회총회관을 로스엔젤레스에 건축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김종림은 임시정부 지원에만 몰두하는 대한인 국민회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한인공동회 멤버들과 함께 중국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월례금과 후원금, 그리고 회관유지비 후원금 등을 기부하였다. 또한 1938년 흥사단 내부에서 이념 갈등이 벌어진 끝에 임득산, 최석순, 김홍서 , 서상석 등이 흥사단을 탈단하고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을 때, 그 역시 흥사단을 탈단하였다. 1940년 5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발족한 뒤 로스엔젤레스 후원회의 발의로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김종림은 남궁염·이진일·변민평·천세헌·김강·이경선 등과 회부를 맡아 집행했으며 제1차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연합회를 이루어 회원이 150여 명으로 증가했을 때, 김종림은 총무로 선임되어 실무를 맡았다.

한편 1941년 4월 20일부터 4월 29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미주 지역 9개 단체가 모인 가운데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개최 목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 ‘광복군의 후원’, ‘외교운동의 전개’를 통해 독립운동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데 있었다. 이 대회는 원동지역 대표까지 참가시키는 범한인대회로 기획하고 한국독립당 대표인 김구의 참가를 요청했지만 김구의 불참으로 인해, 미주한인들만의 ‘미주한족대회’가 되었다. 해외한족대회에서는 1941년 4월에 재미한인단체의 통일연합기관으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대미외교기관 설치, 미주국방공장 후원, 재정방침, 연합기관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가한 대한인국민회와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그리고 대한인동지회는 각각 독립군 수봉위원을 임명하고 모금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및 국방공작활동에 대한 재정후원에 주력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통일전선운동체로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 가게되자, 김종림의 독립의연 활동도 재개되었다. 그는 한인국방경위대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인 동지회와 조선의용대 후원회에 각각 의연금 50센트를 냈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소집한 제1차 민중대회에 참석해 특별운동비를 의연했다. 1942년 김종림은 중미식물회사를 운영했다. 이 회사는 동양인 음식에 사용하는 양조간장을 제조하는 화사로, 캘리포니아시청 위생국 감독 아래 간장을 생산했다. 김종림은 이러한 실업 활동을 벌이면서 독립금은 틈틈이 의연하였으며, 1942년 8월에 열린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에서 회장에 피선되었다. 이후 동지회 각 지방 대표원 심사에서 로스엔젤레스 지방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2년 6월 19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제2차 회의에서, 김종림은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각 지방 동지회 총지부 조직에 대한 토의를 통해 조직 명칭을 북미동지회 총지부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목적은 북미 각 지방에 동지회 역량을 집중하여 행정상 편의를 도모하는데 있었다. 1942년 6월 18일에 미주 동지회 각 지방대표회 환영만찬회가 시카고지방 동지회 주최로 개최되었을 때도, 김종림은 로스엔젤레스지방회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틑날인 19일에는 새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 동지회 북미총회관을 매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43년 4월 11일에 북미총회관 헌관식을 개최했다. 그리고 동지회 북미총회의 기관지인 <북미월보> 발간을 지원하여 1944년 4월 15일자로 창간호를 내게 하였다. 동지회 북미총회는 그 산하에 로스엔젤레스지방회와 중가주지방회를두었다. 회원은 100여 명 미만이었다. 대한인동지회 제3차대회에서 인구세를 거두어 재미한족연합회로 보내고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납하도록 조치했으며 미국 국방공채를 사서 동시에 미국 국방사업에도 협조하였다.

이 무렵,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한길수와 대한인 동지회 대미외교위원 이승만이 워싱턴에서의 대미 요ㅚ교의 주도권을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대한인 동지회는 한길수의 활동을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제4차 회의에서 재미한족연합회를 절대로 후원할 것과 해외한족통일을 견고케 할 것과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불량자 처리 문제 등에 대하여 연합회와 본회 중앙부에 청원키로 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미주 외교위원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통일전선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통하지 않고 별개로 활동해 또다시 분열 조짐이 일었다.

1942년 4월 26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에서 한인경위대(일명 맹호군)가 결성되었을 때, 김종림도 여기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 현기식을 거행하였고, 미국국방을 후원하기 위해 국방공채 발매활동과 각종 위문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단독 행동하는 이승만을 제명하자, 1942년 9월 27일 동지회 북미총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했다. 이후 1945년 5월 26일에 개최된 대한인동지회 제1회 미포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김종림은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유고로 불참하였고 이살음과 윤병구가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8.15 광복 이후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8.15 광복 후인 1945년 12월 2일에 개최된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 총회장과 부회장 후보장 선거에서, 김종림은 이범영과 함께 부회장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했고, 총회장엔 이살음, 부회장에 송철이 피선되었다. 그후 김종림은 새클라멘토 밸리에서 벼농사에 종사했고, 농한기에는 로스엔젤레스로 와서 북미 동지회 사무를 맡았다. 1946년 1월 5일 제5차 동지회 연례대표회에서 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하였고, 다음날 임원선거에서 사업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에 동지회 북미총회가 창립한 한미주식회사가 임페리얼 밸리에서 1천에이커 면적의 벼농사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농사 감독을 맡았다. 한편 임시정부 요인긔 이승만의 환국을 후원하여 총 6,873달라를 수합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김종림은 재미 한인 1세대가 사망했을 때를 대비한 장례식 비용 적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호상부 식비매입운동위원과 양로원법인조직위원을 맡았고, 1946년 2월 3일에 캘리포니아주 팔니어에 있는 양로원에서 열린 호상부대표회에서 양로원 법인 조직위원으로 선정되어 실무를 맡으면서 양로원 설치 기금으로 20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대한 부인 구제회와도 협력하여 의복과 금전을 모집하여 한국의 재해동포 구제운동에 참여했다. 김종림은 언론에도 관심을 보여 정몽룡, 송철과 함께 등사판 북미시보를 식자신문으로 전환, 발간하였고, 신문확장위원으로 임명되어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식자매입을 위해 의연금 100원을 솔선하여 기부했다. 또한 광복 후에도 동지회 북미총회에 독립군 254원을 의연했다.

1965년 7월 한국에서 전국적으로 내린 폭우로 인해 수해가 닥쳤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림은 수재민 구호를 위한 수해성금을 한국으로 보냈다. 구호금이 얼마나 되는 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1965년 12월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명의로 김종림에게 수여된 감사장이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1년 광복절 때 대한민국 정부는 외무부장관 김용식의 명의로 김종림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표창의 내용은 “오랜 기간 해외에 거주하면서 한국인사회의 융화와 복리증진에 기여해 왔으며, 국귀선양에 이바지한 공”이었다.

김종림은 말년에 자신이 의연금을 기부했던 양로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 1973년 1월 26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9년 4월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백인지주는 생산의 90%를, 한인 소작인은 생산의 10%를 차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2. 대한인 국민회가 자기 수입의 1/20을 독립운동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게 한, 일종의 소득세이다.
  3. 이상수, <송철회고록>, 키스프린팅, 1985, p.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