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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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在寬.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정재관은 1880년 5월 22일 황해도 황주목 청원면 원정리(현 황해북도 황주군 석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1922년 4월 3일동아일보 기사에 게재된 '정씨순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정씨는 원래 황해도 황주군 원정리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관후하고 용감 인자한 이로 경성관립사범학교에 재학하였다가 20년 전에 하와이에 이거하여 즉시 미국 본토에 입하야 신한민보 주필로 한인지방총회장을 겸하고 있을 때에 전한국 외부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슨을 장인환이 상황에서 총살하는 그 전야에 스티븐슨이 상항 여관에 있을 때 우선 권총의 징계를 하였다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정재관은 경성관립사범학교에 재학했다가 1903년경에 하와이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한 까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하와이에서 곧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한 뒤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1906년 5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서기로 일했으며, 1907년 4월부터 1908년 2월까지는 총무를 맡아 회장 안창호를 보필했다. 이후 1908년 2월부터 1909년 1월까지는 총회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05년 11월 20일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하고 1907년 4월 26일부터 '활판인쇄' 체제를 갖추면서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2권 창간호 논설에서 독립전쟁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함을 역설했다. 한편 1908년 2월 신한민보가 창간되었을 때 주필을 맡았다.

1908년 3월 22일, 정재관은 공립협회의 최유섭, 대동보국회의 문양목, 이학연과 함께 조선의 외교고문 더럼 W. 스티븐스가 머물고 있던 폐아몬트 호텔을 방문했다. 그들은 스티븐스의 친일 성명 발표를 항의했지만, 스티븐스가 시종일관 무시하자 격분하여 그를 구타했다. 그 뒤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암살하자 그를 위해 변호해주기도 했다.

1909년 5월 1일, 정재관은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에서 국민회 원동위원부를 책임질 권한을 부여받고 연해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도중에 국민회가 조선을 거부하고 신한국을 세우는 것에 반감을 품고 이탈해버렸고, 정재관은 이강, 김성무, 전명운, 한사교 등과 함께 국민회 원동위원부를 설치하는 일을 논의했다.

이후 정재관은 이강과 함께 만주를 순행하며 러시아와 만주 등지에 국민회 부속 지방회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러시아 일대의 국민회 조직 활동은 점차 확장되었고, 1909년 11월 초 13개 지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10년 5월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될 무렵, 러시아 일대에는 20개의 국민회 지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연해주에서 간행되고 있던 대동공보의 주필로 일했다.

1909년 10월 10일, 정재관은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에서 대동공보사의 유진률, 이강, 윤일병, 정순만, 우덕순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했다. 이후 그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걸 지원했다. 또한 그는 미주 국민회에서 추진한 독립군 기지 개척사업에도 참여하여 태동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주식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봉밀산 토지를 구입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마적이 횡행하는 바람에 경비만 소모한 채 실패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임박하자,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성명회 선언을 발표하여 세계 각국에 일본의 조선 강점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다. 이에 8월 17일 밤 김익룡, 유인석, 김학만, 정재관 등 주요 인사 10여 명이 이범윤의 집에 모여 열국에 전보로서 탄원서를 발송할 것을 결의했다. 다음날 오후 3시 한인정 한민학교 내에서 약 150여 명의 한인을 소집하여 전날 밤 결의를 발표하고 일동의 동의를 구하였고, 협의 결과 성명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전보 대신에 문서를 만들어서 일본 이외의 각 조약국에 발송할 것을 결의하고, 이범윤, 유인석, 차석보, 김학만 외 4명을 이사로 삼고, 정재관, 유진률 외 2명을 기초위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범윤이 기초해서 그 대요를 대동신보사에서 인쇄해서 각지에 배부하고, 조선 인민의 동의를 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발표된 성명회 성명서는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정재관은 이 성명서에 서명했다.

이무렵 191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창호는 이강, 이갑, 정재관 등과 만나서 밀산 지역의 땅을 구입하여 독립군 기지로 삼으려 했다. 정재관은 땅을 구입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1월 3일 안창호와 함께 각 금광소재지를 방문했다. 또한 그는 기독청년회 청년들을 포섭하고자 그들을 후원했으며, 한편으로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해 민족 부흥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연해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범윤 등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즉각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재관, 안창호 등 국민회 계열은 지금 당장은 일제를 이길 수 없으니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범윤은 이씨 왕조의 복벽을 꿈꿨지만, 정재관, 안창호 등은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갈등이 깊어진데다 이전부터 연해주에 자리잡고 있던 함경도 출신 한인들이 평안도 출신의 국민회 인사들을 외면하면서 활동이 어려워졌다.

급기야 1910년 1월 23일 자신의 동료인 정순만이 같은 독립운동가인 양성춘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1911년 6월 21일엔 정순만이 양성춘의 아내 전소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자신의 입지에 불안감을 느낀 정재관은 1911년 9월 10일 자바이칼 지역인 치타로 이동했고, 그해 10월 치타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각 지방회에 통고문을 발송했고, 1912년 2월 15일 미주의 중앙총회로부터 정식총회 조직에 관한 사무를 담당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러던 중 이상설 등이 이끄는 권업회는 치타에 있는 국민회에게 권업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이상설은 정재관에게 편지를 보내 '이모의 당파', '정모의 당파' 운운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힘을 합쳐야만 조국 광복을 기약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함경도파인 김익용도 평안도파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있던 백원보에게 정재관 등이 권업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정재관은 권업회에 참석하여 교육부장에 선임되었고, 1912년 4월 4일 제1회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승진했으며, 1913년 10월 6일 특별총회에서는 총회로, 1914년 1월 19일 정기총회에서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권업회에서 이종호와 이상설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치타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4년 12월 초 같은 편인 일본과 갈등을 빛고 싶지 않았던 러시아 당국에 의해 배일인사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1915년 1월 22일 석방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기거했다.

정재관은 세계대전 발발 후 러시아 당국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 당국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인으로 귀화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전쟁에 자원 입대하여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다. 그러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이에 1918년 7월 21일, 정재관은 항일운동가 39명과 함께 니콜리스크에 모여 향후의 행보를 논의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했을 때, 우리 민족은 귀화인, 비귀화인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방해하기로 결의했다.

정재관은 무기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르쿠츠크 독일 첩보본부와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받아내려 했다. 또한 그는 1918년 10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한인신보 사장으로 선출된 뒤 가옥 건축과 활자 구입을 목적으로 러시아 돈 2만여 원을 모집하여 가옥 건축에 착수하고, 각 지방에 의원을 파송하여 3만여 원의 예산을 모집하고자 했다.

1919년 3월 13일 만주 용정에서 3.1 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을 때, 그는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에 서명했다. 또한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1 운동 1주년을 마징하여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 약 20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만세운동기념식이 거행되었을 때, 정재관은 여기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의 독립선언기념회는 우리가 최후의 선전(宣戰)을 하는 날이다. 일반 동포들의 총과 칼을 가지고 일어나서 날마다 오늘부터 무기를 준비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행동하자.

1920년 3월, 정재관은 수청 지방에서 마적 토벌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규면, 김경천 등과 합세했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마적 토벌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단체 명칭을 창해청년단이라고 정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참모장을 맡았고, 김규면은 단장, 김경천은 총지휘관을 맡았다. 정재관 등은 수청 지역을 3지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지휘관, 참모, 병사들을 배치하고 은밀히 러시아 적군과 결탁하여 일본군과 맞설 시기를 노렸다.

이후 마적 토벌에 성공한 창해청년단은 군정과 민정을 단행했다. 김경천은 수청 일대를 중심으로 군정을 맡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도 통제했다. 그들이 관할 구역을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려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발급한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한편 정재관은 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을 도맡았다. 그는 매년 매호 마다 10원씩 걷어들여 군자금으로 활용했고,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둔전병제도도 실시했다.

1921년 7월, 이만에서는 한인무장유격부대들의 지휘관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정재관은 김경천, 채영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사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1921년 8월, 그는 한창걸 등과 함께 한인혁명군을 조직하였고, 치타 공산당과 상호협약을 체결했다. 한인혁명군은 적군이 일본군과 교전할 때 기꺼이 도와줄 뿐만 아니라 백군과 싸울 때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적군 역시 한인혁명군이 조선 국경을 넘어 공격할 때 도와주기로 하고 총기, 탄약, 군자금의 소요액 역시 보조하기로 했다.

또한 정재관은 소자하 지방에서 여러 동지들과 협의해 한인총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거주민의 생활 안정과 식산을 도모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사와 교육을 후원하게 했으며, 전 지방을 12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각 구에 소학교를 한 개씩 설치하여 만 8세 이상의 남녀는 반드시 학교에 다니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정재관의 활동에 강한 경계심을 품었다. 1921년 일제 정보기록인 <불령단관계잡건 제시베리아부 1921년 12월 10일 주요 불령선인에 대한 조서보고의 건>에는 정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인신보사 사장 역임, 배일의 거두임.

그러나 이렇듯 왕성하게 활동하던 정재관은 1922년 2월 27일 돌연 병에 걸려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정재관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5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