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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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圭冕. 호는 백추(白秋), 이명은 김주면(金周冕), 김남칠(金南七).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김규면은 1880년 3월 12일 함경도 경흥도호부 하면 태평동(현 함경북도 경흥군 태양리)의 빈농가에서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뒤 교육자가 되려 했지만, 교원이 되기 힘들어지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후 일제가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하면서, 친러시아 성향이 짙던 함경도 출신의 무관학교 학생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에 그는 군인의 길 역시 포기하고 한성부와 원산부를 돌며 상인으로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말콤 C. 펜윅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펜윅을 통해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 및 학교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07년 가족과 함께 만주 혼춘으로 망명한 그는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 소속의 전도사로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오가며 전도활동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후 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한인 사회의 민족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동휘, 김성무(金成茂), 장기영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한 끝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중국 왕청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던 1915년 조선총독부가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해 국내에 선교총부를 두고 있는 교단은 매년 포교자 명부를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야 하고, 일제 경찰들도 포교규칙을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로 교회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한기독교회가 이를 따르기로 하자, 김규면은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결성했다. 그는 혼춘현 초모정자에 교단 본부를 설치하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교세를 확장시켰다.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결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18년 3월 연해주 한인사회는 볼셰비키 혁명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를 개최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인 김알렉산드라홍범도, 이동휘 등 중국·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규면은 훈춘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 유동열, 이인섭(李仁燮) 등은 1918년 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창당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동휘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듬해 한인사회당에 가입했다.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 침공을 단행했다. 이에 김규면은 초모정자에서 대한성리교도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3월 12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창설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는 강령을 통해 “조국(祖國)의 완전독립(完全獨立)”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며, “민족(民族)의 대동주의(大同主義)를 제창하고 국부적(局部的) 당파(黨派)와 불공평적(不公平的) 야심(野心)을 박멸”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민단문답(新民團問答)’을 통해 단체의 기원과 이름을 ‘신민회(新民會)’에서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19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대한신민단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한인사회당과 대한신민단,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이 참석한 이 당대회에서는 3개 단체의 통일 연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는 통합에 동의하고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한인사회당의 결정에 따라 만주에 위치한 대한민신단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시켜 빨치산 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려 했다.

1919년 5월 김경천이 러시아 파르티잔스크 일대에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을 조직하자, 김규면은 여기에 가담해 명예단장에 취임하고 부대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지원했다. 1920년 7월 레닌그라드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자, 그는 박진순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 곧이어 연해주로 돌아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의해 체포될 뻔했다. 당시 마자노프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들이 사용할 의류와 약품 등의 물품을 준비한 그는 아무르 주 당국과 독립군 부대 수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블라고베센스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려혁명군이 자신을 잡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블라고베센스크 당국 정치부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블라고베센스크의 신문에 자신들이 그를 체포하려 했던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고베센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될 것이다.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사할린부대)와 독립군 통합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김규면이 속한 한인사회당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할 것을 지지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김규면을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 블라고베센스크 당국의 도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 김규면은 얼마 후 자유시 참변 소식을 접한 뒤 장기영, 이용(李鏞), 한운용(韓雲用) 등과 함께 이만으로 건너갔다. 당시 이만은 극동공화국과 백군 정부의 분계선 지대로 자유시에 있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힘이 비교적 덜 미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김홍일 등이 군비단(軍備團) 군사부를 개편해 만든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1921년 9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이 이만으로 이동해 고려의용군사의회(高麗義勇軍事議會)를 재편했다. 이때 김규면은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당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1922년 연해주에서 철수를 결정한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게 그 대가로 연해주에 있는 한인 무장부대를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한인 빨치산 부대를 무장해제시킨 후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의 길을 찾아 남·북만주나 중국 관내로 떠나기 시작했다. 김규면 또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장기영과 함께 상하이로 떠났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에 관찰원 자격으로 참석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한 창조파가 구성한 조각에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임시정부의 존속을 주장하는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1924년 4월, 김규면은 윤자영 등과 함께 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했다. 상해청년동맹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데 뜻을 두었던 개조파(改組派)에 참여한 이들이 주로 참여한 단체로 국제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김규면은 이동휘 등과 연락하며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지원하기 위해 한인들과 노동자들을 광동으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1924년 10월 4일 청년동맹회 임시총회에 참석한 그는 집행위원 11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임시총회에서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 내용에 의열단원들이 격분했다. 자단의 운동노선을 '공포론'이라 지창하면서 정당성을 부당하게 폄하했다는 이유였다. 급기야 의열단이 청년동맹을 문건으로 맹비난했고, 일부 간부들이 윤자영과 그를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의열단은 윤자영과 현정건이 청년동맹회를 빙자하여 일본 공산당에서 금전을 받아 유용하고 있다는 악소문을 퍼트렸다. 이에 청년동맹회는 '금전' 건의 당사자 윤자영과 현정건 2인에게 제명 조치를 내리고 감사부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했지만 사실무근임이 판명되었다. 얼마 후 의열단장 김원봉이 청년동맹회를 찾아와 폭행 사건에 대해 사과했고, 금전 관련 유언비어도 잘못된 것임을 시인했다. 이에 윤자영과 현정건은 즉시 복권 조치되었다.

1925년 5월, 김규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 대리(代理)로 임명되었다. 그 해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련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통총장 대리직을 맡고 있던 그가 소련 당국과의 교섭을 맡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련 정부로부터의 자금 지원 요청 교섭은 실패했다. 그 해 12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직을 사임하고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1925년 2월 상하이의 한 방적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중국인 여공을 학대한 것을 발단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고조되어 5.30 운동이 발발했다. 시위가 전국 각지에 확산되자, 김규면은 중국 학생계와 혁명가들과 연대활동을 펼치며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선생은 상회청년동맹회를 통해 중국 학생계와 긴밀히 연락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러던 중 상하이청년동맹회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규면은 피습을 당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10여 명의 청년이 일본 정탐을 찾는다는 구실로 연석회의장에 난입해 그를 구타하려 하자 이용이 이를 막았다. 이 때 연석회의 참석자들과 난입한 이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김규면은 난입자들이 발포한 총탄을 맞고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후일 자신의 회고록인 '비망록'에서 보이틴스키(Voytinskiy)와 화요회(火曜會) 인사들이 협동으로 벌인 ‘파시스트’적인 행동이라고 회고했다.

1925년 11월, 김규면은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한인 청년들을 황푸군관학교로 보내고, 이용과 함께 한인들로 구성된 북벌지원 군대를 만들어 광동으로 파견하며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고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자, 김규면은 중국을 떠나 연해주로 돌아왔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던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고려공산당 간부로서 연해주 지역 빨치산 위원회를 지원하는 일을 담당했다. 전러중앙집행위원회는 1933년 12월 원동 해방 10주년을 기념하여 연해주 해방전쟁에서 그의 공로를 포상했다. 그런데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 프셰니친이 돌연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연해주를 탈출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을 단행하면서 그의 셋째 아들 김인덕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67년 소련당국으로부터 러시아 혁명 50주년 기념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1969년 2일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향년 88세.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