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위 (18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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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大爲. 이명은 이대하(李大夏).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8년 1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안양리[1]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후 1903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했다. 이후 그해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장경 등과 함께 친목회(親睦會)를 결성하고 동포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으며, 1906년 4월에는 상항(桑港) 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한인 동포들의 구호사업과 교육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1908년 6월 오레곤주 포트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동년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보』라는 주보를 발행하여 매부 본국과 세계의 정세를 전달하는 한편, 기독교의 복음 전도 및 교포 교양에 공헌하였다.

1908년 10월, 그는 최정익(崔正益)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있는 한인단체를 통일할 것을 논의한 뒤 1909년 2월 미주 공립협회 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유일의 통일적 한인민족운동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창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UC 버클리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그 해 7월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되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명의로 각 지방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애국동맹단(愛國同盟團)을 조직하고, 번역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와 연서로 일본 왕에게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미국으로 망명해오는 애국지사와 신도(新渡) 유학생들을 위해 신원보증을 서거나 이민국 수속을 위해 대변인으로 헌신을 다하였다. 1911년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초청으로 담임목사로 취임한 그는 예배친교봉사회를 조직하여 교포들의 애국운동과 정치활동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가 결성되자,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노력하였다. 1913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6월에는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로 선임된 그는 언론을 통한 한인교포의 계몽운동과 항일독립운동, 민족교육운동 등에 힘쓰며 한인사회의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다.

1913년 6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지역에서 한인노동자들이 영국인 농장으로 일하러 갔다가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쫓겨난 사건이 발생하자, 주미일본공사(駐美日本公使)가 한인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해외 한인들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에 총회장이었던 그는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서한을 보내어 일본공사의 간섭행위를 강력히 항의하고 한인사회에 대한 간섭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인정한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1914년 4월 미국무장관은 물론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정받음으로써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대우를 받음과 동시에 미주내 망명자치정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재선된 그는 동년 3월 국문자모를 몸소 만들고, 독창적인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문선을 통해 만들던 기존 신문에 활자의 혁명을 일으켰다. 이 기계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1915년부터 1970년까지 「신한민보」를 제작하였다. 또한 망명객을 위한 숙식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한편, 70여 명의 사진결혼 신부들의 결혼식 주례를 몸소 서 주기도 하였던 그는 1916년 한인 최초로 uc버클리대학을 졸업한 뒤 산앤젤모에 소재한 태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8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한편,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8월 워싱턴으로 가서 이승만을 만나 구미주차외교위원회(歐美駐箚外交委員會)의 설립문제를 논의한 그는, 1921년 3월 김규식·송헌주 등과 함께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동 위원회의 사무장으로 임명되어 외교와 독립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동안 지나치게 과로했던 그는 중병에 걸렸고, 몇년 간 샌프란시스코의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하다 1928년 6월 17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동포들은 평안하지요.보고 싶어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이대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로 알려져 있으나 성태면에 안양리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성태면은 증산군 금송리와 대동군 나머지 리들로 쪼개진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