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QWER123456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4월 25일 (월) 16:39 판
유비(劉備)
생몰년도 161년 ~ 223년
현덕(玄德)
출생지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망지 백제성(白帝城)
시호 소열제(昭烈帝)
묘호 열조(烈祖)
국적 촉한(蜀漢)

소개

삼국시대 촉한의 건국자.

인격이 아닌 흔히 말하는 스펙으로 따진다면 유비는 조(曹), 손(孫), 유(劉), 동(董), 원(袁) 중에서 단연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이 황족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후한말 한나라 황족들 가운데 자신의 입지를 가장 제대로 활용한 인물로 후한 12대 황제였던 영제 유굉이야 유씨 황가에서 제일 가는 함량미달이고, 그의 아들인 후한의 1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 유협은 동탁과 조조 등에 시달려 제대로 제국을 다스리지 못한 허수아비 황제이며, 유우는 인간성 하나는 끝내주게 선량했으나 뭐가 중요하고 뭐가 쓸모없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없었다. 유언은 멋대로 익주에서 할거 했으며 유표 역시 형주에서 멋대로 할거하고 형주를 잘 다스렸다고는 하나 호족에게 휘둘렸다, 유장은 착하기만 하지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했고, 유요는 독불장군이며, 유엽은 한나라 황족이면서도 위나라의 건국에 일익을 담당했다.

조조와 손견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과는 달리 유비는 남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명백하며 유비는 언제나 타인의 조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생애

어린 시절

몰락한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전한 6대 황제인 한경제 유계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선조였던 유승의 아들 유정이 탁현의 육성정후에 봉해졌으나, 주금 문제에 좌죄되어 후작을 잃었으며 이후의 세계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유비의 조상들은 대대로 탁군에 정착해서 살았던 것 같다. 조부 유웅, 부친 유홍은 대대로 주군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그 뜻와 기개, 야망이 남달랐던 인물로 유비가 어릴 때 종중의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 거야"라고 말해서 숙부 유자경이 가문을 망치겠다고 꾸지람을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라 함은 곧 천자의 수레를 타겠다는 발언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독서를 즐겨하지는 않았고 동물, 식물, 음악, 미술,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 표정에 잘 드러내지 않았고, 호협(豪俠)들과 교우를 맺는 것을 좋아하니 젊은이들이 다투어서 그를 따랐다고 한다.

이후 15세가 되자 모친이 학문을 익히도록 하자, 동종인 유덕연, 요서 사람인 공손찬과 함께 예전에 구강태수를 지낸 같은 장군 출신으로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던 노식을 섬기게 되었으며 이때 후일 뒷배가 되어준 공손찬과 만나 형으로서 섬겼다.

황건적의 난 이후 서주를 얻기까지

황건적의 난 당시 기주 중산국의 대상인 장세평과 소쌍 등은 재산이 수천금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유비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유비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후 유비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독우(감찰관)이 자신을 내쫒으려고 여겨 독우를 두들겨패고 관직을 버림으로서 금방 잃어 버렸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를 보내 단양으로 가서 모병하게 하니 유비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서주 하비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가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유비는 조조를 만나게 되고 조조와 함께 조조의 고향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영제 사후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유비 역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이후 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유비는 지인인 공손찬에게로 가서 별부사마, 평원국의 국상(태수급)을 겸했다. 이때 유평이란 자가 유비를 불만스럽게 여겨 휘하 사람에게 유비를 몰래 암살하게 하려 했는데, 유비는 그 일을 모르고 그 사람을 매우 후대하였고 그 사람은 죄책감에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났다. 이 시절에 사람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는데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아랫사람이라도 거리낌 없이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이 당시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된 공융이 태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비는 병력을 따로 보내 구원했다.

이때 조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서주를 침공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였다. 서주목 도겸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유비와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유비는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에서 이민족 오환의 기병을 가지고 서주를 구원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 4천을 유비에게 주고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의 명칭 가운데 하나인 '유예주'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미축에게 일러 유비에게 서주를 맡겼고 유비는 사양했으나 진등과 공융이 계속 권하니 유비는 서주목에 올랐다. 이때가 194년이다.

방랑군주

이때 여포가 조조한테 패배하여 서주로 도망쳤는데 유비는 여포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이때 유비 휘하의 진군이 유비에게 여포를 쓰지 말라고 청했지만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년 원술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를 이를 막았다. 조조가 표를 올려 유비를 진동장군으로 삼고 의성정후로 봉했다. 유비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유비의 수하 장비는 하비의 수장 조표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로인해 조표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이후 유비는 동족으로 가서 서주와 양주사이의 도시 광릉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이때 양봉, 한섬은 서주, 양주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유비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유비는 곤궁한 처지에 몰려 여포에게 화친을 구했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으며 유비를 서주로 돌아오게 하고 그 세력을 아울러 원술을 공격했다. 여포의 부하들이 유비를 도모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포가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유비는 불안을 느끼고 소패로 가서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유비를 다시 뒤통수쳤고 유비는 견디지 못해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으로 삼았아 패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조조는 군사들을 보태어 동쪽으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가 고순을 보내 이를 공격하자 조조는 하후돈을 보냈으나 결국 여포에게 패하여 유비의 처자들은 여포에게 빼았긴다. 결국 유비와 조조는 연합하여 여포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때가 198년이다.

조조 휘하에서

유비는 다시 가족들을 되찾고 조조를 따라 허창으로 되돌아왔다. 유비는 좌장군이 되었고 조조는 유비를 매우 예우하여 어디를 나갈땐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한편 유비는 동승과 함께 황제인 헌제에게 의대에 있는 조서를 받고 조조를 몰래 도모하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나중에 동승, 장수교위 충집, 장군 오자란, 왕자복의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 무렵 조조가 유비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당신과 나 조조뿐이오. 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유비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이 얘기에 놀라 수저를 떨어뜨렸다. 이때 곧바로 천둥벼락이 치자 유비는 조조에게


"성인(聖人)이 말하길, ‘빠른 천둥과 거센 바람에는 필시 낯빛을 고친다.’ 하셨으니 실로 그러합니다. 한바탕 벼락의 위세가 가히 이 정도군요!"

라고 둘러댄다.

한편 원술이 쫄닥 망한 이후 서주를 지나 북쪽으로 원소에게 도망가려고 하자, 조조는 유비를 보내 주령, 노초를 이끌고 원술을 요격하게 했는데, 곽가, 정욱등은 유비는 위험한 인물이라며 그러면 안된다고 해도 조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던 중 유비군이 도착하기 전에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이휴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으며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이러자 서주의 군현들이 모두 유비의 편에 섰고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고 유비 편에 서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와 동맹하였고 조조가 유대, 왕충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원소, 유표에게 가다

결국 건안 5년(200년), 조조는 본인이 나서 동쪽으로 유비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유비는 청주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옛날에 무재로 천거했기에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맞이했다.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업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며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 여기에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유비의 군사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한편 조조가 원소와 관도대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의 황건잔당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을 참하는 공을 세우고 유비에게로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유비는 한편으로는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조가 채양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결국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한 후 또 다시 친히 남쪽으로가서 유비를 공격했다. 이에 유비는 미축, 손건을 유표에게 보내 소식을 전했고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선주를 영접해 손님으로서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 유비에게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호응하자 많아지자 유표는 유비를 경계하게 된다. 유비는 이후 몇년간 평안한 생활을 하면서 유표더러 허창을 기습하라는 계책을 냈지만 유표가 망설여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나중에서야 후회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 유비는 이때쯤 양자 유봉을 들엿고 적벽대전 직전 후계자인 유선이 태어났다. 그리고 제갈량을 삼고초려를 통해 참모로 맞이한다.

조조의 공격에 강하로 떠나다

하북을 평정한 이후 조조는 본격적으로 유표가 죽은 형주를 공격하게 된다, 우선 하후돈, 우금, 이전 등으로 공격하게 했는데 유비는 박망에서 복병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에 조조는 다시 친청했는데 유비는 조조의 군대가 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유종이 항복을 청하고 감히 이 일을 유비에게 알리지 않았다. 얼마 뒤 유비는 친한 이를 보내 유종에게 물었다. 유종은 송충을 보내 유비에게 자기 뜻을 알렸으니 유비는 크게 놀라 이런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격노하고 유종과 송충을 크게 꾸짖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유비는 차마 그럴수 없다고 거절하고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유종의 측근들과 형주인들 다수가 유비에게 갔다.

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만에 이르고 짐수레가 수천 대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사람들에게 배 수백 척을 타고 가게 해서서 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때 주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유비에게 사람들을 버리고 가라고 하자 유비는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라고 일갈하고 계속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에 조조가 유비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짐같은 것은 다 내버려두고 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조는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급히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에 이르러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조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유비는 한진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가 1만 군사로 배를 타고 구원해 면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남인 강하태수 유기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이때 노숙을 만나 손권의 뜻을 들었고 이후 유비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동맹했다.

적벽대전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과 병사 3만을 보냈고 유비는 2만의 군사로 힘을 합해, 조조과 적벽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병선을 불태웠다. 유비는 오군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조의 군대를 추격해 남군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역병이 돌아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조가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후 유비와 주유는 남군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관우와 장비 역시 이 싸움에 투입시켰다. 주유가 조인을 상대로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는 등 격렬하게 사웠고 유비는 이 사이 형남 4군을 평정하고 유기가 죽은 이후 그 뒤를 이어 형주목의 자리에 오른다.

이에 손권은 유비를 내심두려워 하여 자신의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냈고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이후 남군땅 남부인 공안을 주어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유비가 주둔하고 있던 하구를 차지한다. 이후 남군 태수인 주유가 죽자 노숙은 남군 전체를 유비에게 빌려 주는 것을 제안했고 이에 유비는 남군을 차지해 명실상부한 형주의 주인이 된다. 이후 유비는 손권이 촉 땅을 치려는걸 유장이 같은 종실의 후예라면서 반대했는데 본시 그 마음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통해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는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반대한 것이다.

익주평정

한편 북으로 돌아간 조조는 관중과 한중땅을 점령할 마음을 품었고 이는 마초와 유장의 두려움을 사게 만들었다. 마초는 관중의 군벌을 규합해 조조를 공격했고 이에 조조가 한중땅을 공격하는 것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유장은 늘 장로를 싫어했고 조조가 한중을 접수하면 익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비는 익주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했음으로 이 제의를 들어 익주로 들어가 장로와 싸우는 듯 하면서 익주의 민심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장송이 유비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 유비는 유장과 싸우게 되고 방통이 죽자 제갈량, 황충, 조운, 장비를 익주로 불러 들인다. 결국 낙성이 함락되고 조조에게 패하고 장로 휘하에 있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하니 유장은 견디지 못하고 성도에서 항복하였다.

이로서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는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비는 익주의 금고를 열어 제장들에게 금은을 나누어 주었고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또 조운의 조언을 들어 과수원 뽕밭등 논밭과 집들을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후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수백채의 역사를 짓게 하고 인프라를 정비하였으며 새로 화폐를 발행하고 반란을 제압해 익주를 안정화 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익양대치와 한중공방전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싸우는 사이 손권은 자신의 누이 손부인을 시켜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익주로 납치하려다가 실패한다. 본디 손부인은 성격이 과격하고 무예를 좋아해 군주의 침실에서도 무장한 여병사 백명을 들이는 등 유비에게 위협을 가해 유비측이 불안해 했으나 결국 이로서 두려움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제갈량과 조운, 장비가 이를 막긴 했지만 유비측은 손권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 손권 역시 익주를 먹었으니 마땅히 빌린 형주땅을 반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있었다. 이에 손권은 제갈근을 보내 유비에게 형주 반환을 요구했으나 유비는 양주를 공격하고 나서 주겠다고 했고 이에 손권은 분노하여 노숙과 여몽을 시켜 과거 유비가 직접 점령했던 형남 4군 중 장사, 계양, 영릉을 공격해 차지했다. 이에 유비 역시 군사 5만을 이끌고 이들과 대치하였으나 때 마침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니 이에 유비가 서로 동맹을 맺고 땅을 분할하는 조약을 맺으니 상수를 기점으로 서쪽인 남군, 무릉, 영릉은 유비가 가지고 동쪽인 강하, 장사, 계양은 손권이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로서 양측의 형주소유권 분쟁은 일단 마무리 된다.

유비는 이후 익주로 돌아와 본격적인 한중을 공격할 태세를 취한다, 먼저 마초와 오란을 보내 공격하게 했고 이후 장비를 보내 장합을 격파한다. 그리고 이후 황충을 투입하여 정군산에서 하후연을 죽였으며 유비 휘하에서 법정이 한중을 취할 계책을 내고 조운 등도 활약하였다.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이엄이 제압하도록 했고 제갈량이 후방에서 군정을 담당했다. 하후연이 죽은 후 위군은 장합의 지휘하에 분전했지만 유비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에 밀려났고 결국 조조가 친정하여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조조는 패하여 한중은 계륵이라는 말을 남기고 후퇴한다. 결국 유비는 한중을 점령하고 상용을 유봉,맹달을 시켜 점령한 후 한중왕에 오르니 이는 유비가 스스로 한중땅에서 일어난 한고조 유방의 고사를 잇겠단 뜻이었다.

형주공방전과 이릉대전

합비전투와 유수구 전투 이후 손권은 서주쪽으로 진출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노숙의 뒤를 이은 오의 도독인 여몽도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하여 형주의 나머지 서쪽을 병탄하고 양양과 번성을 가지고 촉의 영안, 백제성까지 아울러 장강방어선을 굳건히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마침 손부인의 유선 탈취 시도나 익양대치 등으로 형주에 주둔하던 관우는 손권을 몹시 싫어했고 또 손권이 겉으로는 친근하게 지내지만 실상은 형주를 치려는걸 알고 있었음으로 봉수대를 쌓고 방비를 하면서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손권은 관우에게 혼인동맹으로 관우를 떠 보지만 관우의 '오소리 같은 놈' 소리를 듣고 대노하였다.

한편 조조는 조인을 시켜 번성에서 유비의 형주를 다시 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때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켜 조인이 진압하고 번성으로 돌아왔는데 관우가 먼저 선수를 처서 양양과 번성을 공격한다. 이에 조조는 자신의 최정예인 7군 3만을 구원병으로 우금, 방덕에게 딸려 보내지만 관우와 이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도중 장마로 인해 7군은 수몰되었고 관우는 이를 이용해 배를 타고 화살을 쏘아가면서 7군을 크게 격파하고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였다. 이에 관우의 이름이 중국을 진동시키고 이에 따른 반란이 일어나자 조조는 서황등 여러 장수들을 동원하고 마침 형주를 공격하려던 손권과 긴밀하게 동맹을 맺었다. 이후 서황이 관우의 번성포위망을 격파하고 관우가 양양으로 물러나 면수를 기점으로 배를 동원해 조조군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양양을 포위하였는데 3만명의 포로들과 관우군의 식량을 대기가 어려워지자 상관 동족의 오나라 군량고를 털었다. 이에 여몽이 미리 내통하고 있던 미방을 통해 사인을 항복시키고 남군의 저항을 꺾고 형주를 점령하니 관우는 패망하여 반장에게 잡혀 참수당한다.

이에 유비는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였는데 결국 맹달은 두려움에 위나라로 투항하고 유봉은 상용까지 빼앗겨 유비는 유봉을 크게 질책하고 유봉을 남겨두면 유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것이라는 제갈량의 조언을 들어 유봉을 죽였으며 유비는 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후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가 헌제의 황제위를 선양받아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나라가 세워지자 유비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촉한이라고 한다.

이후 유비는 빼앗긴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오를 친다. 제갈량, 조운등이 이를 말렸으나[1] 유비는 이를 듣지 않았고 222년 가을 7월, 마침내 제군을 이끌고 오를 공격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유비는 몹시 분노하여 거절하였다. 유비는 진격하여 남군 상당수 땅을 점령하고 마량을 보내 무릉만을 호응하게 했다. 육손은 이미 고릉군에서 패배한 데다 강릉 근방까지 밀렸고 손환을 대장으로 하는 원군도 이도현에서 가로막혀 포위되었다.

강릉 바로 앞인 이릉현까지 밀린 육손은 지연전을 펼쳐 유비의 진채와 수군이 길게 늘어서게 만들고 겨울의 메마른 기후를 이용해 화공을 시행했는데 육손의 첫 화공은 불리했으나 마침 때는 겨울이었으니 메마른 기후 덕분에 화공이 크게 성공하여 촉한군은 마침내 대파되었다. 이에 유비도 장강 지류를 건너 마안산에 올라갔고, 거기서 전면에 세운 군영이 불타는 것을 보고 자귀현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유비는 배를 버리고 육로로 회군하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수군 궤멸과 연관되어 있을것이다. 이후 유비는 군을 수습해 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손권은 마침 위나라가 처들어오고 있었고 유비가 아직 백제(白帝)성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으며 이로서 촉한과 손오의 국경은 이 근방으로 확정되었다.

세상을 떠나다

유비는 패배 이후 마음에 병을 앓았는지 이질이 심해져 병이 깊어졌고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탁고하고 상서령 이엄이 이를 돕게 했다. 223년 여름 4월 계사일, 유비가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63세였다. 그는 제갈량에겐 "유선이 도울만하면 그를 도와 주고 아니라면 그대가 취하도록 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후계자인 유선에게는 "힘쓰고 또 힘쓰거라!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말고, 선이 작다고 해서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아비는 덕이 없어 본받을게 못 된다. 내가 죽은 후 너희 형제는 승상을 어버이처럼 섬기며,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진수의 평가

평한다. 선주(유비)는 포부가 크고 굳세고, 너그럽고 후하고 사람을 알아 보고, 선비를 잘 대우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주와 신하의 지극히 공정함은 고금의 아름다운 본보기다. 기지와 임기응변, 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능력

삼국지에서 묘사되기론 유비는 자신의 주변인물들을 잘 써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묘사된다. 결론적으로 놓고 보면 조조나 손견 같은 천하의 능력자들과 결과물이 같다. 이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된 것이었냐 하면 유비는 적재적소에 '각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의 능력을 알아내고 파악하며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안목을 죽어라 키웠다. 이런 사람이 회사의 사장이 된다면 엄청나게 번영을 누릴 것이다. 유비는 인재선발능력과 인재배치능력으로 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능력도 딱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훈련했다. 조조처럼 전체 분야에 걸쳐 잘한 것도 아니고 손견처럼 싸움만 무식하게 잘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책사들처럼 머리만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유비는 자신의 능력 부족을 다른 사람으로 커버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휘하 사람들에게는 항상 잘했고 자신의 부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아했다. 게다가 자신이 나설 수 있으면 최대한 나서고 어떻게든 유능한 인재를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일례로 유파라는 인물이 있는데 유파는 항상 유비를 증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자존심 따위 다 버리고 유파를 계속 등용하려고 애썼다. 유파는 유비에게서 계속 도망쳤으나 끝내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서 유비의 부하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유파가 유비의 부하가 되자 촉의 재정 상태를 아주 넘사벽 수준으로 만들어놓았다. 촉을 거의 재벌 수준으로 발전시킨 게 유파였고 유비는 유파가 그런 인물인지 일찌감치 간파했던 것이다.

용인술 면에서의 평가

상황을 판단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며 사람의 능력과 특징을 파악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때문에 여포가 조조에게 패배하고 나서 배신의 대명사 여포에게조차 그동안 해온 행적들을 들춰가며 여포를 죽게 만들었다. 또한 유비는 자신을 띄우는것에도 능숙하여 이미 평원 시절부터 인의로 이름이 났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도겸의 구원을 할때도 유비는 안으로는 서주 사람들을 보호하고 바깥으로는 조조를 견제했다.

유비는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의 능력으로 꾸역꾸역 채웠다. 일단 자신의 사람이 되면 제대로 된 사랑을 베풀었다. 위연은 유비에게 임관할 당시 신참 듣보잡 나부랭이 취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에게 엄청난 신뢰를 줬는데, 유비는 위연의 충성심을 어여삐 여겨 위연에게 한중태수라는 파격적인 자리를 줬다. 이게 왜 파격적이냐 하면 위연의 경쟁상대가 다름 아닌 장비와 조운이었기 때문이다. 위연 따위가 도저히 한중태수로 임명될 것 같지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신뢰를 하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이 유비였다.

그리고 유비가 조조나 손견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것이 바로 인격이다. 조조는 자신을 분노하게 하는 자들을 싹쓸이하고 손견 역시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싹쓸이했다. 하지만 유비는 절대로 싹쓸이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릉대전을 앞둔 상황에서 유비의 외척인 미방이 오나라로 배신했을 때, 유비의 외척이자 그 형인 미축이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를 결박하고 도부수를 데려와서 "폐하, 신이 무능하여 신의 동생인 미방이 오나라로 투항했습니다. 신을 죽여주십시오!"라고 유비에게 빌었다. 하지만 유비는 호쾌하게 웃은 뒤 미축의 결박을 풀어주고 도부수를 물러가게 한 다음 미축을 용서했다. 이 정도로 유비는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유비는 장임을 꼬셔보려고 갖은 아양을 다 떨었으나 장임은 유장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충의지사답게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

사실 이릉대전 역시 관우만 살았으면 절대로 일으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유비는 자기 휘하의 장수들을 핏줄로 여겼다.

각주

  1. 이때 이미 법정이 죽어 제갈량은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폐하를 막을수 있었을것이며 적어도 크게 패하시게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으며 조운은 우리의 국적은 위나라지 오가 아니라고 간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