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조운(趙雲)
생몰년도 ? ~ 229년
자룡(子龍)
출생지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망지 익주 한중 촉군 본영
시호 순평후(順平侯)
국적 후한촉한(蜀漢)

소개[편집 | 원본 편집]

후한 말, 촉한의 장수, 삼국지 촉서 관장마황조전에 사적이 있으며 촉한의 개국공신 중 하나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하북에서[편집 | 원본 편집]

조운은 신장이 8척에 용모가 남자다웠다. 원래 기주에서 천거되었는데 이후 본인을 따르는 관리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공손찬에게로 나아갔다. 당시 원소가 기주목(冀州牧)을 칭하여 공손찬은 기주인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는데 조운이 귀부해 온 것에 기뻐하여 조운을 놀리면서 기주사람들은 모두 원소를 원한다는데 어째서 나를 선택한 것이냐고 묻자 조운이 천하가 흉흉하니 누가 옳은지는 알수 없지만 백성들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 어진 정치가 있는 곳에 따르기로 했으니 그런 뜻으로 귀부한 것이지 원소를 무시하고 당신을 사사로이 따르는 것은 아니라 말했다.

당시 공손찬은 휘하 장수였던 유비를 보내 전해를 도와 원소를 막게 하니 조운이 파견되어 유비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이때 유비는 늘 조운과 만나면서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조운의 마음은 유비를 따르게 되었다. 이후 조운의 형이 죽자 그는 공손찬에게 말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유비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손을 맞잡으며 애틋하게 작별했다. 당시 공손찬은 인망이 높았던 유우를 죽이는 등 인심을 잃을 짓을 많이 했는데 조운은 형의 상을 계기로 아예 공손찬을 버리려고 생각한 듯 하다. 어쨌거나 조운은, 끝내 (유비의) 덕을 저버리지는 않겠다고 말한 후 낙향하여 지냈다.

건안 5년(서기 200년), 유비가 원소에게로 가자 조운은 업에서 그를 만났다. 유비는 조운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잠잤으며, 은밀히 조운을 보내 무리를 모으게 해 수백명을 얻었는데 이들이 모두 유비의 부곡이라 칭했으나 원소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로보아 조운은 유비의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주에서[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유비를 따라 여남, 형주(荊州)에 이르렀다. 이후 유비가 박망파에서 하후돈을 격파했을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 잡았었는데, 하후란은 조운의 향리인(鄉里人) 으로 소소하게 서로 아는 사이였다. 조운은 유비에게 그를 살려주도록 청하고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軍正)으로 삼게했으나 조운이 이로써 그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신중하고 사려깊음이 이와 같았다.

유비가 조조의 침공을 맞아 남쪽 강릉으로 도주할때 당양(當陽)현 장판(長阪)에서 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은 이들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 이에 조운이 이미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유비가 수극(手戟)을 내던지며 "자룡이 나를 버리고 달아났을리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운은 조조의 정예 기병대인 호표기 사이에서 몸소 유비의 아들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품에 안고 유비의 부인 감부인(甘夫人)을 보호해 이들이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고 얼마 뒤 유비와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조운은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강남 4군을 평정하는데 종군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기존의 계양태수였던 조범(趙範)을 대신했다. 홀몸이 된 조범의 형수 번씨(樊氏)의 미모가 뛰어났는데, 조범이 그녀를 조운에게 짝지어주려 했다. 조운이 사양하며 조범과 서로 동성이니 경의 형이 내 형과 같다고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맞도록 권하는 사람에게 조범이 급히 항복했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없고 천하에 여자가 적지 않다고 했다. 과연 조범이 도주했지만 조운은 번씨를 취하지 않았기에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다.

이후 유비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荊州)에 남았다. 이때 조운에게 유영사마(留營司馬)를 겸하게 했다는데 유비의 부인이자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은 교만하고 횡포하기 심해 오(吳)의 관리와 병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거침없이 법을 어겼다. 유비는 조운이 엄중한 성품으로 필시 이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 여겨 특별히 내부의 일을 맡겨 관장하게 했는데 손권이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고, 손부인이 은밀히 유비의 아들 유선을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하니 제갈량의 명으로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유선을 구해 돌아왔다.

익주에서[편집 | 원본 편집]

유비는 가맹(葭萌)관에서 환군해 유장(劉璋)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는데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서쪽으로 진군하게 하니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익군장군의 대략적인 역할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잡호장군이었다는 것이다. 잡호장군의 특성상 익군(翊軍), 즉 군을 돕는, 군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익(翊)의 특성상 본대 중앙군 기준으로 좌우익에 해당하는 위치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익주를 장악하고 국정에 집중해야 했던 유비가 수족이자 그림자로서 움직여 줄 조운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주었을 수도 있다.

당시 익주가 평정된 뒤 당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가옥과 성 바깥의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霍去病)은 흉노(匈奴)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는데 또한 나라의 적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 각자 고향로 되돌아가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편안하게 머물게 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마음을 얻을 것입니다."
— 조운, 정사 삼국지 촉서 조운전

이에 유비가 이를 따랐다. 당시 유비군 내에서 조운이 토지와 가옥 배분이라는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 발언권을 강력하게 행사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여기서 조운은 성도의 토지를 하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그 뜻을 관철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심을 어떻게 하면 장악할 수 있을지 판단하고 백성들에게 공정한 배분을 주장하는 모습에서 조운의 강직함과 공정함, 대국적인 안목, 사리사욕과 거리가 먼 성격을 추정할 수 있다. 이때 유비가 다수 제장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조운의 주장을 들어주는 것에서 조운의 발언권에 힘을 실어주어 그를 신뢰하는 유비의 의도가 엿보인다.

한중공방전[편집 | 원본 편집]

한중공방전 당시 조운은 유비를 따라 이에 참가하였다. 황충에게 하후연이 패하자 조조가 직접 친정하여 유비와 함께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이에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진영을 나와 황충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때마침 조조의 군대가 대거 출전하니 조운이 조조군의 선봉에 의해 공격받아 바야흐로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하여 형세가 위급해지자 적진에 돌진하고 한편으론 싸우며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조의 군대가 무너져서 패했다가 다시 합치자마자 조운은 다시 적을 무너뜨리고는 본진으로 달려 되돌아왔다. 이때 휘하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적의 진영으로 되돌아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조군이 추격하여 포위를 하기 시작하자 면양을 지키던 장익은 성문을 닫고 수비에 치중하려고 하였으나 조운이 영(營)으로 들어와서 다시 문을 활짝 열고는 깃발을 내리고 북치는 것을 멈추었다. 조조의 예민한 성격을 이용한 기만책이었던 것. 예상대로 조조는 이를 보고 복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고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융노를 쏘아 조조군을 공격하고 병사들을 풀어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조조군은 워낙 대군이 갑작스럽게 한꺼번에 달아난지라 병사들끼리 서로 밟고 밟히면서 도주하였으며, 그 와중에 한수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조운은 공성계로 조조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던 것이다.

유비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진영에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膽)로다."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이것이 용맹한 장수의 성정을 이르는 일신시담(一身是膽)의 유래가 된다. 이후 유비는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촉군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 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이라 했다.

촉한 건국 이후 행적[편집 | 원본 편집]

형주공방전 당시 손권이 형주(荊州)를 습격하여 관우를 죽이자 유비는 대노했고 황제로 등극한 이후 손권을 치려 했다. 이에 조운이 간언하며 말했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니며 게다가 먼저 위(魏)를 멸하면 오(吳)는 저절로 복종해올 것입니다. 조조는 비록 죽었으나 그의 아들인 조비가 찬탈했으니 응당 뭇사람들의 마음에 의거해 조속히 관중(關中)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수와 위수 상류를 점거해 흉역한 자들을 토벌하면 필시 관동(關東)의 의사(義士)들이 양식을 싸매고 말을 채찍질해 달려와 천자의 군대를 영접할 것입니다. 위(魏)를 내버려두고 먼저 오(吳)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병세(兵勢)가 한번 엇갈려 교전하게 되면 급히 풀 수 없습니다."
— 조운, 정사 삼국지 촉서 조운전

이는 북벌을 시행하면 유비의 위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서북 지방의 호족,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으로 조운이 가진 대국적인 안목과 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거기에 평생을 모시면서 같이 일한 군주의 불호령과 같은 결정에도, 이치에서 벗어날 경우 반대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마침내 동쪽을 정벌하려 떠났으며 그 대신 조운을 후방에 남겨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결국 조운의 예상대로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하자 조운은 신속이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진병해 유비가 머물던 영안(永安)에 도착했는데 오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유비가 붕어한 이후 유선이 제위에 오른 건흥 원년(223년)에 조운은 황실의 중앙군인 중호군(中護軍)을 맡았으며 동시에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동쪽 오나라의 국경에 주둔하는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했다. 정남장군은 곧 남쪽을 정벌하기 위한 정군직이니 이 시기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하면서 남만 정벌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원했을것으로 보인다. 중호군은 호군의 중요직으로 중령군, 중도호 등과 함께 금군을 지휘하고, 무관을 선발하며,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호군은 중앙군의 성향이 매우 강하며, 무관을 선발하고 무장들을 감독했기 때문에 막강한 군권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요직이었다. 촉의 호군 제도는 후한의 대장군 제도를 답습했는데, 대장군 출정시 중호군 1인을 두었다고 한다. 이 당시 대장군 역할은 당연하게도 남만 정벌과 북벌의 총책임자였던 제갈량이었으므로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하며, 원정군 내에서 중앙군 역할을 하며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년), 제갈량이 출군하여 야곡도(斜谷道)를 거친다고 널리 소문내자 조진(曹眞)이 대군을 보내 이를 막으려고 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鄧芝)로 하여금 가서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箕谷)에서 불리하여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제갈량과 함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되었다. 촉서나 위서의 묘사에서 가정 쪽은 명백한 패배/대승으로 적는데 기곡 쪽은 제갈량 이외엔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고 조운의 상대였던 조진전에선 기곡의 전과를 자랑하지 않았다. 기곡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조운은 기산의 본대가 퇴각할 때까지 기곡에 있었다. 일단 적의 총사령관인 조진의 수비군을 잡아둔 사이 제갈량이 기산을 급습해 삼군을 취했다는 점은 평가할만 하다. 조운은 적애 북쪽의 일백리 잔도를 불살라 더 이상의 추격을 막고 한중으로 돌아왔다.

한중으로 되돌아 온 이후 제갈량이 가정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졸과 장령들을 다시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箕谷)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兵將)들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인지를 묻자 등지가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수물자와 집기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거의 없으니 병장(兵將)들을 잃을 까닭이 없다고 하였다, 또 조운의 군수품에 여유분의 비단(絹)이 있어 제갈량이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으니 하사품이 있을 수는 없으며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가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시라"라고 하니 제갈량이 감탄하여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조운은 등지와 함께 적애의 수비를 담당해 군사를 둘로 나누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둔전을 행했다, 제갈량이 형인 제갈근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당시 갑자기 홍수가 나서 적애 남쪽에 있던 잔도가 유실되니 조운이 사람을 파견하여 벼랑을 따라 돌아 올라가게 한 뒤에야 등지와 서로 소식을 알 수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애에서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무리했는지 건흥 7년(229년)에 죽었다.

이후 후주 경요 4년(서기 261년)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 조운은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시호를 받은 다음해에 시호를 받았는데 유선은 자신을 구한 은인인 조운이 다른 개국공신들이 시호를 받을때 시호를 못 받았음을 안타까이 여겼는지 조서를 내려 '조운은 선제(유비)를 따르며 공적이 많았고 자신이 어렸을때 위험에서 구해준 인물이니 조운에게 합당한 시호를 내리라'고 했고 이에 당시 대장군 강유(姜維)가 당양에서의 일을 조운의 대표 일화로 소개하여 시법을 살펴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順)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平)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라고 했다.[1]

시호법에 따르면 순(順)은 성품에 대한 찬양이고 평(平)은 일처리에 있어 공정함을 뜻한다 명백히 무관임에도 그는 인격과 성품, 공정함으로 고평가를 받았다.

후사[편집 | 원본 편집]

조운의 맏아들 조통(趙統)은 조운의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郎),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 차남 조광(趙廣)은 아문장(牙門將)으로 강유(姜維)를 수행해 답중(沓中)에서 싸움에 임하다 전사했다. 강유가 답중에서 북벌을 하던 시기는 조운 사후 30여년 후이며 아들 이하 자손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아 조운이 후사를 늦게 보지 않았느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또 강유를 수도로 가 천자를 알현케 하며 중호보병을 맡아야 한다고 제갈량이 추천한 것을 살펴볼때 강유가 자신이 시호를 선정한 옛 상관의 아들인 조광의 무재를 눈여겨보아 데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연의[편집 | 원본 편집]

관우, 장비급으로 일기토 묘사가 많으며 주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바람처럼 달려와 구해주는 멋진 역할을 자주 맡는다.

공손찬 휘하로 들어갈때는 위기에 빠진 공손찬을 구하면서 문추와 일기토를 벌여 쫓아내었다. 유비군에 합류하는 시기가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로 변경되었고, 첫 만남과 재회의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 장판파에서는 '철을 흙 베듯 베며 예리하여 비길 바가 없다'는 절세의 명검인 청강검(靑釭劍)을 얻는 묘사가 있으며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의 대군을 돌파하면서 종횡무진한 활약을 펼친다. 거기다 더해 기껏 구해내온 아두를 유비가 던지며 조운에게 말하길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그대 같은 장수는 또 구할 수 없다라는 같은 대사까지 하면서 조운과 유비의 의리를 부각시킨다.

연의에서는 정사의 사방장군에 조운까지 포함되어 오호대장군(오호상장)이 된다. 이는 촉서 관장마황조전의 다섯명에게 후대의 나관중이 새로 별호를 만들어 붙인것이다.

연의에선 정사, 연의 창작 할 것없이 조운의 손에 목이 달아난 이들이 많으며 국의는 정사에선 원소군의 객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오만해져 처신을 잘못했다가 숙청당한 인물인데 연의에서는 조운을 띄워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조운에게 죽는다. 고람은 원소군 장수였으나 관도대전 중 장합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으나 연의에서는 여남에서 조운에게 죽는다. 또 이릉에서 대패한 유비를 구하면서 오나라의 명장 주연을 죽였다. 이로인해 이릉대전 이후의 오나라 분량 일부까지 죽여버렸다. 주연은 실제로 이릉대전 이후 조운보다 더 오래 살았다.

1차북벌엔 가상인물인 한덕과 그의 아들들을 죽여 한 일가를 완벽히 척살하며 마무리. 이밖에도 상산초옹 에피소드, 북벌에서의 제갈량과의 환상 듀오, 세심하고 꼼꼼한 이미지, 후대사람이 문앙을 조운에 비긴 시를 수록하는 등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조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조운을 상대하기 위해 상대무장들의 능력치도 버프되는 것은 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발톱과 어금니(조아-爪牙, 용맹한 무장을 비유)가 되었으니 관영, 하후영의 무리로다.[2]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관장마황조전
정남장군(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써 공훈을 날렸다.
— 양희, 정사 삼국지 촉서 계한보신찬

정사를 쓴 진수는 그를 용맹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일신의 무력 뿐만 아니라 공성계 같은 일화를 가진 나름대로 임기응변을 갖춘 용장이었다. 다만 대군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는 기곡의 패배가 있는 등 검증된 부분이 없다. 조운은 주로 외곽 지역의 수비, 선봉대장, 유비 혹은 제갈량의 측근으로서만 행동했다. 조운은 중호군으로 금군을 지휘하고,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하여,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즉 일군의 지휘관쪽이라기보단 유비, 제갈량 직속 돌격대장부터 황실 정예부대장, 후방 군정 등을 다방면으로 처리하던 역할이며 조운이 유비, 제갈량에게 했던 직언을 살펴보았을때 정치적인 고려와 통찰력이 있는 무장이기도 했다. 성품에 있어서도 조운은 소위 경솔하게 뽐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삼가고 조심하며 겸손하며 공정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매체[편집 | 원본 편집]

조운의 기곡전투를 다룬 기곡의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각주

  1. 제갈량강유를 장완과 장예에게 추천할때 조운이 맡은 중호군의 중호보병을 맡겨야 한다고 했으니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을 것이다.
  2. 한 고조 유방의 공신으로 유방 주위에서 시립하며 공을 세운 장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