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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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
생몰년도 ? ~ 220년
운장(雲長), 장생(長生)
출생지 사예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망지 형주 남군(南郡) 맥성(또는 양양군 임저현)
시호 촉한 : 장목후(壯穆侯)
송나라 : 무안왕(武安王)
원나라 :
제천호국대장군, 검교상서, 수관회남절도사(齊天護國大將軍 檢校尙書 守管淮南節度使)
겸산동하북사문관초토사, 겸제조제궁신, 무분지처검교관(兼山東河北四門關招討使 兼提調諸宮神 無分之處檢校官)
중서문하평장정사, 개부의동삼사, 가전도통군(中書門下平章政事 開府儀同三司 駕前都統軍)
무녕후, 장목의용무안영제왕, 호국숭녕진군(無佞侯 壯穆義勇武安英濟王 護國崇寧眞君)
명나라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
청나라 :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
이 이상의 시호는 너무 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국적 촉한(蜀漢)

소개[편집 | 원본 편집]

관우는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중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숭배받는 삼국지 인물이다.

오늘날 그의 일생은 소설 삼국지연의와 민담에 의해서 크게 확대되어 널리 알려졌고 그는 관성제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신으로서 숭상받고 있다, 즉 중국판 '신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흔히 관우가 삼국지연의에 의해 명성을 얻었다는 얘기가 나오긴 하나 이미 당나라 무성왕묘에 관우는 역대 명장 반열에 들었다.[1] 관우가 왕, 진군 소리 붙은건 이미 송원나라때부터였고 삼국지연의는 원말명초 소설이다. 한나라 이후 전장에서 용맹한 자에겐 관우장비의 용맹(漢以後稱勇者必推關張)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청나라 시대 역사학자 조익은 전한다.

관우는 송나라때 왕, 진군 소리를 듣기 시작했으며 명청때는 황제의 시호를 받았다. 청나라 옹정제 때는 아예 전국 각지에 관묘를 세울 것을 지시해서 공자의 제사와 같이 본다, 가을에 성대히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행하고 관우를 주신으로 국가적인 제사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엔 임진왜란 당시 들어온 관제묘가 몇 개 세워져 있고 몇몇 무속신앙등이나 토속 종교에서도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곳이 있다. 중국에서 관우는 신으로 추앙받고 아예 관우라고 불리지도 않고 '관제'(關帝), '관공'(關公)으로만 불린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관도대전까지[편집 | 원본 편집]

관우의 초기 생애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으로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었으며, 하동군 해현 사람이었지만 유비가 있던 탁군으로 도망하여 망명했는데 어떤 일로 탁군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비가 향리에서 무리를 모았을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이를 도왔다. 이후 유비 휘하에서 활동했으며 유비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여 부곡(部曲, 병력)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유비, 관우, 장비는 잠을 잘 때에도 침상을 함께 썼으며 그 우의는 형제와도 같았다. 관우와 장비는 여려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도 하루종일 유비를 모시고 서 있었고, 또 그를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후 여포를 공격할때 조조에게 여포의 부하 진의록의 처 두씨를 달라고 했다가 조조에게 빼앗겼고 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유비가 조조에게 있을때 관우는 조조를 죽일것을 권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조조에게서 유비가 도망하였을때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을 지키도록 하고, 태수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후 조조가 직접 공격하다 유비는 크게 패하여 관우와 장비, 처자를 버리고 원소에게로 도망했는데 관우는 이때 조조에게 사로잡혀 허창으로 끌려간다. 조조는 그에게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후하게 대우했지만 관우는 조조를 섬길 마음이 없었다.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대장 안량을 파견하여 백마를 포위하자, 조조는 장료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관우는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대장기[2][3]를 응시하더니 말에 채찍질을 해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어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조는 즉시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관우는 조조 휘하에 있을때 장료, 서황 등과 친했는데 처음에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생각해 장료에게 의중을 묻게 했다. 이에 관우가 탄식하며 말하길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 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장료는 조조에게 이를 고하려 하다가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는데 결국 탄식하면서 "조공은 내가 섬기는 군주요, 관우는 형제와 같다." 라고 관우가 한 말을 고하니 조조는 관우가 천하의 의사라며 감탄했다.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조는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지만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 놓은 후 유비가 있던 원소군으로 홀연히 떠났다. 이후 유비 휘하에서 유비가 가는 곳마다 다시 조조군과 싸웠다.

적벽대전에서[편집 | 원본 편집]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정벌했는데, 유비는 번성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사람들을 태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장판에서 유비군이 대파당하자 유비는 한진을 끼고 도주했는데 이때 관우의 배를 만나 구원을 받았고 함께 하구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유비가 조조를 칠때 종군했으며 유비와 주유가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자 일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길을 끊는 역할을 했다.

이때 관우는 단독으로 서황, 만총, 문빙, 악진, 이통을 상대하여야 했는데 서황은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으며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해 남군 바로 위에 위치한 임저가 위에 넘어가고 남군일대 만이들과 부곡 몇 개가 투항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이통이 자신의 군사를 나누어 관우와 싸우게 하고 자신은 일부의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유비와 주유의 포위망을 뚫어 조인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후 유비는 형남 4군(무릉,장사,영릉,계양 들을 공격하여 차지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 탕구장군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청니대치[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청니에서 악진과 대치했는데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과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촉으로 떠나고 얼마 후 대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량이 장비, 조운과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를 원조하기 위해 떠났다. 관우는 2차례에 걸쳐 수만의 병력과 핵심 무장, 참모들을 다 떠나보낸 형주에서 홀로 위군과 대치해야 했다.

이는 형주 전체를 수복하기 위한 전면공격은 아니고 손권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형주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국지전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익주 공략을 우선시하기 위해 형주 전선을 희생하는 도박을 건 것으로 보이며 결국 관우는 별 수 없이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익양대치[편집 | 원본 편집]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을무렵 손권은 유비와의 형주 소유건을 두고 대치하여 여몽을 시켜 군을 이끌고 형주를 공격하게 했다, 장사와 계양은 군대를 이끌고 편지를 보내 협박하여 항복시켰으며 영릉은 태수 학보가 오군의 계략에 속아 항복했다. 이에 유비는 5만을 이끌고 직접 형주를 구원하고 익양에서 관우를 시켜 노숙과 대치했다. 노숙에게 회담을 제의하는데, 관우는 "형주땅은 유비가 노력해서 얻은 땅"이라며 항변했으나 노숙의 "그건 손권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반박하는 말에 밀려 커다란 성과는 보지 못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는데 자신에게 병사를 주면 관우를 공격하여 포로로 만들것이라고 자신하고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관우의 도하지점으로 이동했고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한편 노숙 역시 진영을 만들면서 관우를 대비했는데 이것을 노숙제라고 불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던 도중 조조의 한중 공략 소식이 알려지고 유비는 손권과 협상해 상수를 경계로 남군, 무릉, 영릉을 자신의 소유로 하고 나머지 는 손권의 소유로 하자고 하면서 대치가 종료된다.

형주 통치[편집 | 원본 편집]

합비전투, 유수구 전투 이후 손권은 '관우를 취해 장강을 모두 점거하여 형세를 더욱 늘릴 만 못합니다'라고 진언하는 여몽의 계책을 따랐다, 여몽과 손권은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이후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했다.

한편 관우 역시 손권을 믿지 않았기에 봉수대를 쌓고 방비하여 오나라의 침공을 대비하였다. 번성을 침공할때도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이는 여몽이 관우가 번성을 토벌할때 뒤에서 도모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형주 공방전[편집 | 원본 편집]

유비는 한중왕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조는 우금과 방덕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이 수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관우는 배를 이용해 화살을 쏘면서 위군을 격렬하게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어 살아남은 7군 잔병 3만을 잡아 포로로 삼았으며 사령관 우금은 항복시키고 방덕의 목을 베었다. 위나라에선 난을 일으키는 자들이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다, 관우의 위엄은 화하에 떨쳤고 번성과 양양을 포위했다. 이후 서황의 조인 구원도 실패했다.

조조는 천도까지 논했으나 사마의, 장제가'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 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조는 이에 따랐으며 본인이 직접 출병했다. 한편 서황은 조인을 구원하기 위해 신병들만 있을때는 싸우지 않고 기다리다가 12영의 군사를 모아 사총에서 관우의 보기 5천명을 격파하고 10겹의 녹각을 격파했으며 성안에서 만총이 협공하니 관우의 번성포위는 풀린다. 이에 관우는 후퇴해 면수를 수군으로 굳게 통제하고 양양을 단단하게 포위하여 양양과 북쪽의 위군 간의 연락이 끊긴다.

한편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었고 장군 사인은 공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중에서도 미방은 관우와 사이가 틀어졌고 남군태수로 있을때 남군성에 불이나 많은 물자와 기물을 태운 죄로 질책을 받아 두려워하며 손권과 몰래 내통하였다. 이후 여몽이 잠깐 기만책으로 아직 큰 공적이 없던 육손과 자리를 교대하고 이에 육손은 좋은말로 관우를 꼬고 협력할 것을 약속하니 관우는 육손을 경시하여 수비병을 뽑아 지원군으로 보내고 7군을 잡아들여 식량이 부족해지자 상수의 관문인 상관의 군량고를 털었는데 여몽이 이를 기회로 형주로 침공했으나 내통이 있었으니 척후나 봉화가 발동되지 않았다, 우번이 공안을 굳게 지키려고 하고 오의 항복사자를 만나지도 않으려던 사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형주에 우리와 내통한 내응자가 있으며 포위되어 굳게 지키려고 해도 살길이 없을것라고 언질하자 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항복했다, 남군에서는 미방 혼자만 성문을 열고 항복했는데 갑작스러운 내응에 남군에서 여몽에게 반격을 하려고 했으나 우번의 충고를 들은 여몽이 신속하게 남군을 제압하고 남군의 민심을 통치를 후하게 베풀어서 무마시켰다.

관우는 이렇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을 임저에서 참수했다, 관우가 격파된 이후에도 육손은 형주를 돌아다니면서 형주를 진압해야 했고 형주에서 저항이 있거나 촉으로 탈출한 군원들도 있었으며 무릉만이들은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였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260년에 촉한에서 장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당나라 시절 무성왕묘 72인에 배향되었으며 송나라 시절 관우를 왕이나 진군에 봉함으로서 점차 백성들 사이에 관우신앙이 퍼지게 되었다. 이후 관우 신앙이 퍼지고 각종 민담이나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으로 관우 신앙은 더욱 강해져 명나라 시절엔 마침내 황제의 시호를 받았다. 오늘날 관우 신앙은 관성제군 신앙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능력[편집 | 원본 편집]

각지의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정욱,곽가 : 관우, 장비는 만인지적이다.

온회 : 관우는 평소 용맹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이름나 그 기세를 타고 올라온다면, 근심이 될 것입니다.

주유 : 유비는 용맹한 영중의 자태가 있고, 관우와 장비같이 곰같고 범같은 장수들을 가지고 있어, 결고 오래도안 굽히면서 남을 위해서 쓰여줄 자가 아닙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론, 가장 좋은 계책은 유비를 옮겨 오(吳)에 두면서, 그를 위해서 성대하게 궁실을 짓고 미녀와 완상(玩賞)물을 많이 두어 그의 이목을 즐겁게 해주고, 관우 장비 이 두사람을 나눠 각자 한 곳에 두어, 주유 저 같은 자로 이들을 얻어 함께 싸우게 한다면, 대사(大事)는 아마 정해질 것입니다. 지금 땅을 함부로 나눠줘 그들의 대업을 세우는데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모두 변방에 두신다면, 교룡(蛟龍)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는 못속의 한갓 물건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유엽 : 관우가 유비를 돕는데 유비가 뭐를 못하겠느냐? 관우와 장비가 삼군을 뒤덮을 용맹으로 장군이 된다면 도모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위나라 각료들 : 촉은 작은 나라로, 이름난 장수로는 오직 관우가 있었을 뿐입니다.

제갈량 : 마초가 강하긴 하나 관우한테는 안 된다.

여몽 : 여몽은 관우와의 땅을 나누어 접경에 위치해 있었는데, 관우가 용맹하고 날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양양을 얻고 남군을 얻으면 관우에게 의지할게 뭐가 있습니까? 관우는 신하 주제에 광패하게 구니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합니다.' - 손권에게 한 말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다.' - 육손에게 한 말

'그렇지 않아도 힘은 임무를 맡으셨는데, 그곳도 게다가 관우와 인접한 곳으로 말입니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관우와 마주보게 되었으니까, 간단하건 복잡하든 뭔가를 준비해서 그를 맞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 노숙에게 한 말

계한보신찬 : 관우와 장비는 굳세고 씩씩하여,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윗사람을 잘 받들었으며, 호랑이처럼 웅장하고 거셌다.

인격[편집 | 원본 편집]

진수의 평가로 관우의 성격을 논할 수 있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범 같은 신하였다. 관우는 조공에게 힘써 보답하고 장비는 의로써 엄안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않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치의 상례로다. - 관우전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士大夫)에게는 오만했고, 장비는 군자(君子)는 경애했지만 소인(小人)은 돌보지 않았다. 선주(유비)가 늘 이것을 경계하여 말하길,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禍)를 초래하는 길이오.”라 했으나 장비는 이를 고치지 않았다. - 장비전

결론[편집 | 원본 편집]

관우는 일찍이 유비와 함게 전중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장비와 함께 만인지적의 칭호를 받았다. 실제로 돌격대장으로서의 관우는 안량참수의 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용맹하기 그지 없었다. 또 온회전에는 위군의 온회가 홍수가 날 것을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관우는 이를 이용해 자신의 군대는 수몰을 피하면서 역으로 수몰된 7군을 크게 격파하고 모두 사로잡았으니 용병에 있어서도 시기와 장소를 잘 알고 용병했다고 할 수 있고 여몽의 병탄 계책을 알아채고 방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대부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성격 때문에 포로가 된 병사들을 살리려고 쌀을 무단으로 탈취한 것이나 동맹 군주인 손권과 사대부 가문의 자손인 육손을 경시한 것.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엄히 질책하여 불안감에 떨게 하는 등 성품에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것이 스스로의 패망을 불렀으니 진수 말 따라 관우의 패망은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의[편집 | 원본 편집]

연의에서는 그야말로 충의의 화신으로 그려지며 화웅, 문추 참살과 오관육참 등의 각종 공적이 더해져 의리와 무용의 화신으로 손꼽힌다. 관우의 성품에 대해서는 연의에서도 그 오만함을 지적하나 관우의 죽음에 관련있는 자들이 좋지 못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아들 관흥에게 사후에도 버프를 걸어주는 장면으로 촉한의 숨은 결전병기(?)로 활약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중국에는 민간에 관우 신앙이 꽤 많이 퍼져있다, 상인 출신이라는 설이 있어서 중화권에서는 관우를 재복(財福)의 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관우상을 집 입구에 두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병온 명군에 의해 조선에도 관우신앙이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서울의 동묘가 그 사례.
  • 관우 본인의 일화가 몇가지 있다. 관우가 방덕에게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살았다는 이야기나 관우가 팔수술을 받았는데 피가 대야에 넘치는데도 태연하게 고기를 먹으면서 주위와 담소를 나누었다는 일화, 춘추좌씨전을 좋아하여 암송했다는 일화, 서황과는 친분이 있었는데 번성공방전 중 서황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서황이 갑자기 관우의 목을 치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자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대형 이 무슨 말씀이오?'라고 묻자 서황이 '이것은 나라의 일입니다'라고 답했다는 등의 일화가 있다. 그외 태평어람 도검록 인용에는 관우가 만인적이라는 이름을 새긴 두자루의 도를 사용했는데 패하고 사로잡히게 되자 그 검을 물 속에 던졌다는 일화도 있다.

각주

  1. 당나라 시기 무성왕 묘에 든 장수들은 다음과 같다. 백기, 한신, 제갈량, 이정, 이적, 장량, 전양저(사마양저), 손무(손자), 오기, 악의, 범려, 손빈, 염파, 왕전, 조참, 주발, 이광, 곽거병, 등우, 가복, 구순, 마원, 황보숭, 장료, 관우, 주유, 육손, 양호, 왕준, 사현, 모용각, 단도제, 왕승변, 모용소종, 우문헌, 한금호, 사만세, 위지경덕, 소정방, 장인단, 왕준, 왕효걸, 관중, 전단, 조사, 이목, 팽월, 주아부, 위청, 조충국, 오한, 풍이, 경감, 단경, 등애, 장비, 여몽, 육항, 두예, 도간, 왕맹, 장손숭, 왕진악, 오명철, 곡율광, 우근, 위효관, 양소, 하약필, 이효공, 배행검, 곽원진, 장제구, 곽자의
  2.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 안량을 찌르고서 그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이 휘개를 파성넷의 번역문에서 “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라고 해놨는데, 호삼성이 휘개는 융거(병거)의 덮개라고 주석에서 해석해 놔서 그렇다. 휘(麾)는 군진(軍陣)에서 사용하는 대장기이고, 개(蓋)는 그 대장기의 꼭대기 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니, 즉, 휘개라 하면 높다란 대장기 꼭대기이다.
  3. 삼국지사전 (산동교육출판사),고대한어사전 (상무인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