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태조(太祖)
생몰년도 155년 ~ 220년
맹덕(孟德)
출생지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망지 낙양(洛陽)
시호 무황제(武皇帝)
묘호 태조(太祖)
국적 위(魏)

1 소개[편집]

치세능신, 난세간웅

후한의 마지막 승상이자, 위나라의 사실상 시조. 초세지걸(세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런 평가와 동시에 백성을 괴롭힌 인물 중 하나로 불리고 뛰어난 문인이자 지휘관임과 동시에 성격적인 결함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망할 뻔한 적도 있었으며 의인과 지사를 높게 평가하고 인재를 가까이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 밖에 나먼 가차없이 처단하는 면모도 있었던 인물.

그야말로 난세의 간웅으로 그 복잡다단한 면모 덕에 지금까지도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조조는 환관 조등(曹騰)의 의붓아들인 조숭(曹嵩)의 아들로 조등에게는 의붓손자에 해당된다. 그런데 조등은 그냥 환관이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환관이였다. 그 후한을 쥐락펴락했다던 십상시(十常侍)들조차도 조조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십상시들의 선배격인 조등이였기 때문이였다. 조등은 도저히 즉위할 가망이 없는 후한의 11대 황제였던 환제 유지(劉志)조차 즉위시킬 정도로 파워가 막강한데다가 청류파와 탁류파 모두에게 인정받았을 정도의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러니 십상시들은 조등에게 알아서 기었다.

이 정도로 특정 분야의 최고봉 가문인 조조였지만 당대 환관이라는 신분의 특성상 청류파 사족들에게는 탁류파로서 경시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권력자 조등의 손자라는 네임벨류는 그가 일찍부터 출세대 도움을 주어 어렸을때부터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학업을 게을리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뒷배경 덕분에 20세가 되자 무난히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 당시 낙양북부위로 있으면서 건석의 숙부를 곤장 친 일화는 그만큼 조조의 뒷배가 강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똑같은 짓을 했던 왕윤은 십상시에게 죽을뻔했다.

2.2 황건적의 난[편집]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싸움에 참여하였고 영천(潁川)의 적(賊)을 토벌한 공으로 그는 제남상이 된다. 제남상이 되자 그 곳에서 조조는 부패한 관리를 면직시키고 사당을 때려 부숴 재물을 갈취하는 일을 막는 등의 선정을 베푼다. 그 뒤 동군태수로 전임되나 그 동안 황제 측근의 권신들에게 여러 번 밉보였기에 집안이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질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낙향한 뒤에는 성 밖에 별장을 짓고 독서와 사냥에 매진하며 지냈다.

2.3 반동탁연합[편집]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자 조조를 호의적으로 보고 조조를 효기교위로 임명했으나 조조는 임관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도망자로 수배되어 천구 여백사를 죽이고 '남을 저버링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1]는 말을 한다. 이후 교모의 반동탁연합군 격문에 참여[2]하여 반동탁연합에 종사 하였다 이 당시 반동탁연합군은 연의의 묘사와는 달리 하내, 산조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하내의 군대는 군량부족으로 쩔쩔 매고 있었고 조조가 주둔하고 있던 산조의 연합군도 서로 눈치를 보며 나서지 않았는데 조조는 교전을 적극적으로 촉구했으나 장막 등 산조 지역의 관리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조조는 자신의 병력만을 이끌고 독단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나 변수에서 서영의 반격을 받아 군이 와해되었다. 조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종제인 조홍이 조조에게 말을 주어 밤중에 달아날 수 있었다.

이후 양주자사 진온의 협조를 받아 양주로 가서 4천의 병력을 징병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병사들의 반란을 겪어 500여 명을 제외하곤 모두 흩어지게 된다. 이때 병사들이 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머물던 장막을 불태우자 조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위서에 남아있다. 이에 패국으로 가서 다시 1천의 병사를 모아 합친 뒤 천오백의 군사를 이끌고 원소가 있는 하내로 간다. 이후 동탁이 선봉인 손견에게 패하고 낙양을 불지르고 도주한 이후 지리멸렬해진 반동탁연합군은 해산된다.

2.4 연주목이 되다[편집]

이후 원소에게 빌붙어 있다가 황건잔당에게 공격받는 연주자사 유대를 구하고 연주목이 된다. 참고로 이 계책은 진궁의 진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사로잡은 30여 만의 황건잔당과 남녀 백여만 명 중에서 정예병을 청주병이라 불렀는데 이 청주병은 평생 군복무에 자식까지도 군복무를 해야하는 제도 였다. 이 제도는 조조 이후도 남아 장패가 사용한 이후에야 사라지게 된다. 이후 유대의 뒤를 이어 원소가 도와줘서 연주목이 되는데 조조는 중앙정부에서 유대의 후임으로 파견한 연주자사 금상을 공격해 쫓아냈다.

이후 원술과 싸워서 이기고 도겸과 싸웠는데 이 과정에서 부친 조숭이 죽는다. 이에 조조는 서주를 침공하여 수십만의 서주백성들을 도륙한다. 한편 이런 조조의 행보를 보고 있던 진궁은 장막과 함께 반란하여 연주를 차지하는데 순욱이 2개성을 간신히 지켜서 조조는 근거지는 잃고 떠도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후 장막이 고용한 여포와 치고박고 싸우는데 조조는 복양에서 여포에게 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말을 달려 불길을 벗어나다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까지 입었다. 이후 공세에 나서 농성하는 여포를 100일동안 포위하다가 또 다시 패배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원소에게 구걸하여 원소가 5천명을 주자 간신히 연명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원소가 조조에게 가족을 보내 업에 거주하도록 하고자 했는데 정욱이 반대한다, 딱봐도 볼모로 보내라는 얘기.

이후 조조는 메뚜기 떼의 창궐로 일시적으로 위기를 넘기고 이후 여포는 진궁과 합류해 동민이라는 곳에서 만 명을 이끌고 조조와 결전을 벌였는데 이때 조조는 참호를 파서 절반의 병력을 숨겼다가 전투가 무르익자 이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여포군을 대파한다, 여포군을 대파한 조조는 이후 장막의 일족을 멸족시켰다. 195년 7월에 헌제는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향했고 동승, 양봉 등이 이를 호위했는데 조조가 이를 받아들이고 헌제를 탈취하려는 무리와 싸워서 이겼다. 이후 서주를 잃고 방랑하던 유비를 맞아들인다.

2.5 황제 옹립 이후[편집]

이후 조조는 수도를 허창으로 옮기고 사공이 되는데 후한서에 보면 조조가 쫄아서 대장군직을 원소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이후 조조는 유표의 뒷배가 있던 이각,곽사의 잔당 장수를 쳤다. 근데 여기서 조조는 장수를 이기고 장제의 처이자 장수의 숙모인 추씨과 간통해 장수의 격분을 샀고, 장수가 이를 원망하는 것을 알고는 그 참에 장수의 측근들까지 회유해 장수를 숙청하려 하다가 걸려서 팔과 타고있던 말에 화살까지 맞고 튄다. 이에 아들 조앙이 말을 탈 수 없어 조조에게 말을 바치니 조조는 살았으나 조앙은 죽었다. 이 사건으로 조안민, 조앙, 전위 등이 희생되었다.

이후 수춘으로 도망간 원술과 싸우는데 원술을 크게 이겼다. 이 당시 군량이 부족해지자 군량을 줄이려다가 병사들의 반발을 샀고 이 때문에 군량담당관을 죽여 이놈이 그랬다고 속인것은 유명한 이야기.

이후 유표와도 싸웠는데 조조는 장수를 양성에서 포위하였으나 유표가 배후를 끊으려 하자 철수한다. 철수 도중 안중에서 조조는 험지에 가로막히게 되었는데 이통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조조군에 합류하였고 그 뒤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병사를 매복시켜 이미 군이 달아난 것처럼 속인 뒤 이통을 선봉으로 삼아 급습하여 유표의 추격군을 격파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여포를 유비와 함께 쳐서 서주를 함락시키고 수고를 격파했는데 원소가 처들어 오자 수고 격파 당시 자신을 배반했던 위충을 사로잡았는데, 위충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의 일을 맡기곤 퇴각한다. 인재를 아끼는 조조의 대범함을 보이는 일화로 알려져 있으나, 적진 한복판을 점령한 뒤 태수로 삼곤 버리고 간 셈이니 대놓고 버리는 패였고, 사실상 죽으란 소리나 다름없다, 이후 동승의 의대조 사건이 발생하고 조조는 동승 일파를 처형하고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동귀비도 예외없이 처형했다. 이후 유비를 공격해 격파한다.

2.6 관도대전[편집]

2.7 적벽대전[편집]

손권과 전쟁을 시작하여 손권과 유비에게 패배했다.

2.8 구석을 받고 위나라의 왕이 되다[편집]

이후 적벽에서의 패배로 천하통일의 기회를 놓친 뒤, 권력에 더더욱 집착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황제와 비슷한 특전을 누리는 구석을 받으려 하거나, 한황제 유협으로부터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을 마구 휘두르기까지 했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인 조비가 황제가 되게끔 멍석을 깔아준 것일 수도 있는데, 이 때문에 조조가 충신이라는 옹호론은 더욱 힘을 잃는다.

2.9 한중공방전[편집]

한중 공방전에선 친히 유비를 정벌하려고 갔으나 유비의 맹공세로 인해 좌절 되었으며 결국 계륵이라는 말을 남기고 퇴각함으로서 유비의 한중왕 즉위를 방치하고야 만다.

2.10 죽음[편집]

이후 조조는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손권이 자신에게 밀서를 보내 관우를 기습하여 형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는 손권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남하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서황과 만총이 미리 관우를 격파하였고 번성의 포위가 풀리게 되었다. 이렇게 손권과 연합하여 관우를 무찌른 조조는 다시 낙양으로 북상하였지만, 조조는 갑자기 병을 얻게 되어 220년 1월에 죽었다.

3 능력[편집]

3.1 문신으로서 평가[편집]

사실 조조는 처음에는 공부하기 무지하게 싫어했으며 맨날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싸돌아다니며 밤늦도록 놀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인 조숭에게 호되게 혼났는데 이것이 자기 숙부인 조길이 자기 아버지에게 자기가 한 행동을 싸그리 고자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조조는 어느 날 공부를 하던 도중 자신이 마비증상이 있는 척하며 숙부가 놀라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했는데, 이에 조숭이 다가오자 갑자기 멀쩡한 모습을 보이며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숙부가 저를 믿지 못해서 아버지께 고자질을 하는 것입니다."

라고 역관광 태워버렸고 이에 조숭은 조길의 말을 전혀 믿지 않게 됐다. 이 정도로 조조는 매우 영민했다. 조조는 위왕이기 이전에 위나라 최고의 문장가 반열에 오를정도로 문무에 능한 사람이었다. 동군태수를 그만두고 독서에 정진한 것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엇을 것이다.

3.2 군재 평가[편집]

위에서 나오듯이 조조 스스로 검으로 수십명의 병사를 죽일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 게다가 조조는 궁술 솜씨도 베테랑이라서 조조가 사냥을 나갔을 때 조조가 직접 활로쏴서 죽인 꿩의 숫자가 65마리나 될 정도였다. 손견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위에서 나온 여러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스스로 친정하다가 죽을뻔한 적도 많았다.

군재의 경우도 역시 탁월한데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아 위무주 손자로 만들었으며 관도대전에서는 물량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원소를 상대로 탁월한 전략과 전술, 부하 참모들의 의견조율 등의 능력을 발휘해서 결국 승리를 쟁취하고 강북 일대를 모조리 평정했다. 자기보다도 더 뛰어났던 그 원소를 상대로 말이다. 다만 적벽대전에서는 수상전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주유와 유비에게 패배하고 한중공방전에서는 친히 친정했음에도 유비에게 패하고 철수하는 모욕을 겪기도 했다.

3.3 인격[편집]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쓸모있는 자기 부하를 매우 사랑하였는데 일례로 자신의 첫째 아들인 조앙과 자신의 호위장인 전위가 같이 전장에서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조앙의 죽음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다. 비록 자기 아내에게는 엄청난 타박을 듣기는 했지만, 그 대신 조조는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

또 조조는 분명 동귀비, 복왕후, 헌제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한나라 황실을 겁박했지만 헌제는 조조가 살아있는 동안에 유협은 그나마 십상시 시절이나 동탁 시절과는 달리 비교적 안정되게 황제의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주변의 신하들이나 지친들이 계속 조조한테 죽었으니 마음이 편할리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냉혹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르려 하자 순욱이 반대했는데 조조는 패업의 1등공신인 순욱에게 빈찬합을 보내 사실상 너에게 더 이상 줄것이 없다고 통보했고 순욱은 자결했다는 설이 있다.[3] 또 격한 성정으로 인해 조조는 아버지가 죽은 이후 도겸과의 싸움에서 서주의 백성들을 잔륙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원소의 포로 수만명을 생매장하고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짓을 많이 하여 회수지역 백성들이 죄다 도망간 적도 있었다. 조조는 많이 냉혹하고 많이 잔인했다. 그리고 조조의 이 악랄함으로 스타덤에 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유비였다.

거기에 여자를 지나치게 밝힌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 때문에 자기가 이긴 장수의 뒷통수를 맞아서 첫째 아들 조앙과 호위장 전위를 잃어야 했고 여포를 토벌한 이후 여포의 부하였던 진의록의 처 두씨에게 홀딱 반해서 비록 최고의 장수라고 보긴 힘들지만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던 관우의 마음을 잃었다.

4 각주

  1. 연의에서는 스케일이 커져서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진 않겠다는 대사로 바뀐다.
  2. 연의에서는 조조 본인이 쓴 걸로 되어 있는데 실제론 조조는 그냥 참가한 것이다.
  3. 삼국지 열전에 따른 공식적인 기록은 수춘에서 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