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왕평(王平, 생년 미상~248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다. 자는 자균(子均).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어렸을 때는 하씨(何氏) 집에 양자로 들어가 하평(何平)이라고 불리었으나 크고 나서 본래 성을 회복했다. 이후 한중공방전 당시 촉한에 투항했다.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제갈량은 마속한테 왕평을 부장으로 붙여주었는데 마속은 제갈량의 명을 어기고 요충지를 버리는 짓을 했다. 이에 왕평은 마속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군대로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나 천 명의 병사들만 가지고 북을 울리게 하여 장합이 복병이 있는지 의심하게 하여 머뭇거리는 사이에 혼자서만 패주하는 촉군을 제대로 수습해서 한중으로 귀환한다, 주장인 마속은 도망가는 와중에 자기가 맡은 소임 이상을 한 것이다. 이 덕에 제갈량, 조운 등이 다 벼슬이 깎이는 와중에 혼자만 승진하고 정후에 봉하게 되었으며 촉의 이민족 최정예부대인 오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제갈량의 4차 북벌에서도 장합을 물리쳤다. 제갈량 사후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자후 한 방으로 위연의 군대를 사방팔방 도망가게 만들었으며 결국 위연은 도망가다가 마대한테 죽임을 당한다.

이후 한중조상의 10만 대군이 들어오는데 장안에서 징발한 군사가 7만이었고 대촉전에서 잔뼈가 굵은 곽회의 병사가 3만이었다. 하후현, 곽회, 하후패, 사마소 외에도 자신의 가까운 측근들도 종군하게 했다. 사실상 위군의 정예가 모두 출전하는 올스타팀 격의 부대 상대로 한중의 촉군은 3만밖에 없었다. 다른이들이 다 후퇴해서 수비하자고 하는 와중에 왕평은 적은 군대라도 수비가 가능하다며 병력을 쪼개 적재적소의 요충지에 배치시켜 위군의 침입을 막고 이후 비의강유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한번에 몰아쳐서 10만 대군을 대파했으니 이를 낙곡대전이라고 한다.

이때 위군이 입은 피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자치통감》에선 '잃고 죽은 자가 많았고 관중이 텅텅 비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조진전에 부속된 조상전에서는 '동관 우측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됐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위군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군량 수송을 담당했던 강족과 저족이 위군에게 엄청난 원한을 품게 되어 후일 촉군이 위를 칠 때 저강과 협력해서 위를 공격하는 악재로 작용하고 위는 20년 동안 촉을 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일화[편집 | 원본 편집]

문맹으로 쓸 수 있는 글자가 10여 자 내외였지만 글을 구술하여 타인에게 그것을 적게 하는 방법으로 조리 있게 작성하였다. 또한 《사기》와 《한서》의 본기와 열전들을 읽게 하여 듣고 그 대의를 알았으며, 왕왕 논설하면서도 요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행동 또한 법도를 지키고 농담거리를 삼가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르게 앉는 등 정숙한 모습을 보였지만 말이 거침없어 상대방을 가리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깔본다 여겨 명예가 깎였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