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

강유(姜維, 202년~264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장군이다. 자는 백약(伯約).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후기 촉한 북벌 때 선봉장으로 나섰으며 그 나름대로 성과도 올렸으나 지나친 북벌정책 때문에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항장 출신이면서도 촉한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던 듯.

촉한 멸망 이후 종회를 이용해 촉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강유에게는 낙곡 전투를 참전한 것은 물론이고 246년의 곽회, 하후패 격파, 이를 압도하는 도서 전투의 공로가 있었으나 호제와의 연계가 실패한 단곡에서의 패배가 오점이 되었다. 그러나 촉한 멸망 당시 제갈서를 따돌리던 기동을 보면 그가 전략적으로는 몰라도 전술적으로는 훌륭한 장수였음을 보여준다.

낙곡 전투는 방어전에 왕평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소수군으로 험지에서 적의 발목을 붙잡는데에 있지 이를 실질적으로 섬멸한 것은 비의와 강유의 본대였고 왕평의 역할이 작은 것이 아니지만 왕평이 모루 역할을 했다면 강유는 비의와 더불어 망치 역할을 충실히 했는데 강유의 공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면이 있다. 255년의 도서 전투의 경우에는 공격전에서 왕경의 수만군을 통째로 섬멸시킨 전투로 강유 자체가 총사령관으로 출전한 경우이기에 비의와 강유와 그 공을 갈라먹어야 하는 낙곡 전투의 왕평보다 지분이 훨씬 높다.

강유가 패배한 경우가 많다고 하나 실질적인 전술적인 패배로 유추되는 것은 256년의 단곡 전투와 262년의 후화 전투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소소한 출혈이 있으되 큰 피해라고 단정짓기 어렵거나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되 전략적으로 소득을 얻지 못한 전투들이었다. 강유의 북벌 전적에 대해서는 너무 두루뭉술하게 폄하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며 당대에 국력을 낭비한다는 비난도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촉한 최후의 기둥으로 여겨졌던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평가가 갈리는 장군.

대중문화 속의 강유[편집 | 원본 편집]

  • 삼국지 6의 짧은 시나리오 북벌강행'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