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장비(張飛)
생몰년도 ? ~ 221년
익덕(益德)
출생지 유주 탁군 탁현
사망지 익주 파군 강주현
시호 환후
국적 촉한(蜀漢)

문무를 겸비하고 충직한 인물이었지만, 소인과 휘하 사람들에게 자상하진 못했던 깡패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장비는 유주 탁군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상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유비가 조조와 여포를 격파하고 함께 허도로 돌아온 뒤 조조이 장비를 중랑장(中郎將)으로 임명했다.

장비는 여포 사후 웬 어린 여자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아버렸는데 그녀가 하후돈의 조카였다. 이 때문에 사마씨 가문이 위나라를 자기것으로 만들고 조씨 일족과 하후씨 일족에게 위해를 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하후상의 아들인 하후현이 저자거리에 끌려가 참수당하는 등 말이 아니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하후패가 촉으로 넘어왔다. 하후패가 촉으로 넘어오자 유선이 직접 하후패에게 아들을 보여주면서 조카이니 친족으로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후패가 쉽게 촉나라 장수가 되었던 것도 장비의 아내가 하후씨 일족이기 때문이였다. 사실보면 조씨 일족과는 다르게 하후씨 일족은 은근히 유비 휘하에서 일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유비가 촉으로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했다. 강주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인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는데 엄안의 기개와 충심을 보고 그를 살려주고 중하게 대하였다, 또 장비는 유파를 공경했는데 유파가 장비를 개무시하자 화를 냈지만 그렇다고 장비가 유파를 어떻게 하진 않았다. 장비가 사대부나 지사들을 다룬게 대개 이러했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승리하고 성도에서 유비와 만났다.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 법정, 장비와 관우에게 각각 금, 은, 돈, 비단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또 장비를 파서태수로 삼았다.

한중공방전 당시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돌아가니 파땅은 안정을 찾았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비를 우장군, 가절(假節)로 임명했다. 이윽고 황제가 되자 거기장군, 사례교위로 올리고 서향후에 봉했다. 장비의 웅장위맹은 관우에 버금갔기에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장비는 군사 1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에서 출발해 강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장비 휘하의 장수 장달, 범강이 장비를 죽이고 그 수급을 지닌 채 물길을 타고 내려가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장비 영채의 도독이 표를 올려 선주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의 도독이 표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이후 260년 시호를 추증해 환후(桓侯)라 했다. 장비는 문무를 겸비하고 충직한 사람이었으나, 성격이 붙같은 데다가 소인에게는 매우 가혹했다. 장비는 맨날 이 때문에 유비한테 지적을 당하고도 그놈의 버릇을 못고쳐서 부하의 손에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장남 장포는 일찍 죽었다. 차남 장소가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시중 상서복야(侍中尙書僕射)에 이르렀다. 장포의 아들 장준은 상서를 역임했는데, 제갈첨을 수행해 면죽에서 등애와 싸우다가 죽었다.

능력[편집 | 원본 편집]

두뇌 면에서의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실제 삼국지정사에서 장비는 문무를 겸비한 그야말로 뛰어난 인재이다. 그의 무예는 장판교에서 조조의 군대를 후퇴시켰을 정도이며, 그의 문예는 백전노장인 장합을 계략에 빠뜨려 개고생시켰을 정도였다. 장비는 보기와는 달리 두뇌가 만만치 않게 똑똑했다.

장비는 절대 일자무식이 아니다. 장비는 틈틈이 학문과 병법을 익혀서 계략으로 적을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런 장비의 계략의 주된 피해자는 장합이었다. 장비는 무예 못지않게 학식과 전략도 빛났다. 현대의 추측으로는 장비는 지식인 계층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높게보고 있다.

무술 면에서의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그렇다고 장비가 무예가 후달리는 인물이라는 건 아니다. 무예 역시 조조군을 진동시킬 만큼 뛰어났고, 황건적의 난이 발생해서 성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황건적 수 백 명을 혼자 죽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유비에게 도망친 것이다. 게다가 고함질 한 방으로 그 조조를 쫄게 만들었으니 장비의 무술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가히 촉 최강이라 불릴만하다.

또한 군재 역시 일군의 사령관을 하기에 아주 적합할 정도로 매우 뛰어났으며 실제로도 장합이 장비에게 맥을 못 추렸을 정도였다. 장합은 원소군 시절부터 관록을 개쩔게 쌓아왔고 나중에 조조에게 투항한 뒤 위나라 최고의 백전노장이 됐다. 하지만 이렇게 군인으로서 뛰어난 장비임에도 불구하고 왜 유비는 한중태수 자리를 장비가 아닌 위연에게 줬을까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장비가 아랫것들에게 가혹하게 군다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유사시에 위연이 최전방을 담당하고 장비를 여차하면 지원군으로 쓸 생각이었을 공산이 크다, 장비가 임명된 파서태수는 어디로든 위급시에 지원을 갈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 장비를 마초 견제용으로 썼다는 사람도 있는데 마초는 애당초 유비 휘하에선 팽양이 책동한 모반을 자기가 나서서 고발하는등 유비한테 설설 기었다.

인격[편집 | 원본 편집]

능력은 뛰어난데 소인과 아랫사람에게는 오만하고 혹독했다. 그래도 내 새끼인데 내 애기인데 보듬어주는 유비와는 다르게 장비는 그딴 거 없이 토시 하나만 잘못해도 호독한 처벌로 일관했다. 이 때문에 졸병들은 서로 장비의 부하가 되기를 매우 싫어했고 병사들에게 잘해주는 관우유비의 부하가 되기를 매우 좋아했다. 윗사람을 잘 모시고 학자를 존중하며 그들과 교양을 나누는 장비의 바람직한 성격 이면에는 이렇게 잔혹한 성격도 공존했다.

장비는 윗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직하고 자상한 부하였으며 사대부들의 교양을 존중하는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그런데 소인을 항상 무시하고 부하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라서 허구한 날 유비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부하들을 무지막지하게 아끼고 귀여워하는 유비의 성격과 부하들을 그저 엄벌하기만 했던 장비의 성격은 코드 자체가 안 맞았다. 하지만 장비는 윗사람의 말이라면 칼같이 듣는 위인인지라 유비에게 꾸지람을 들으면 당분간 부하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습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지나면 또 부하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문제는 이 때문에 장비의 인생이 완전히 끝났다는 점이다. 장비는 자신의 처세 때문에 죽었으니 성공했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연의[편집 | 원본 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오히려 수혜를 받았다, 일자무식의 멍청이로 나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연의의 장비는 처음에는 분명일자무식이었지만 갈수록 성장하여 각종 계략을 쓰는 문무겸비의 장수로 거듭난다, 연의에서 장비의 성정은 정사의 냉정하고 아랫사람에게 가혹한 성격이 아니라 단순무식해 보여도 나름대로 정감이 가는 호걸로써 재해석되었다. 오늘날의 장비의 무식한 돌격대장 이미지는 장비의 정치나 지력을 낮게 책정하는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등의 영향이 크다.

이상하게 연의 이전의 삼국지평화 같은 작품이나 민담에서는 장비의 성품이 쾌활하고 파천황적인 부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연의에서도 정사의 이런 면모를 쓰기는 어려웠을것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혹독하고 냉혹한 캐릭터는 뭔가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이미지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의 성격을 서민적으로 개조하고 그에 맞는 지적수준이 할당되어 장비가 일자무식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또 부하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이미지를 평소에는 안 그런데 술만 마시면 부하들에게 혹독하게 군다는 식으로 술고래 이미지로 바꾸기도 했다. 물론 정사에 장비가 술고래였다는 얘기는 없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