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QWER123456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4월 25일 (월) 09:22 판 (→‎소개)
유비(劉備)
생몰년도 161년 ~ 223년
현덕(玄德)
출생지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망지 백제성(白帝城)
시호 소열제(昭烈帝)
묘호 열조(烈祖)
국적 촉(蜀)

소개

삼국시대 촉한의 건국자.

인격이 아닌 흔히 말하는 스펙으로 따진다면 유비는 조(曹), 손(孫), 유(劉), 동(董), 원(袁) 중에서 단연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이 황족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후한말 한나라 황족들 가운데 자신의 입지를 가장 제대로 활용한 인물로 후한 12대 황제였던 영제 유굉이야 유씨 황가에서 제일 가는 함량미달이고, 그의 아들인 후한의 1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엮던 헌제 유협은 동탁과 조조 등에 시달려 제대로 제국을 다스리지 못한 허수아비 황제으며, 유우는 인간성 하나는 끝내주게 선량했으나 뭐가 중요하고 뭐가 쓸모없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없었다. 유언은 멋대로 익주에서 할거 했으며 유표 역시 형주에서 할거하고 형주를 잘 다스렸다고는 하나 호족에게 휘둘렸다, 유장은 착하기만 하지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했고, 유요는 독불장군이며, 유엽은 한나라 황족이면서도 위나라의 건국에 일익을 담당했다.

조조와 손견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과는 달리 유비는 남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명백하며 유비는 언제나 타인의 조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어린 시절

몰락한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전한 6대 황제인 한경제 유계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선조였던 유승의 아들 유정이 탁현의 육성정후에 봉해졌으나, 주금 문제에 좌죄되어 후작을 잃었으며 이후의 세계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유비의 조상들은 대대로 탁군에 정착해서 살았던 것 같다. 조부 유웅, 부친 유홍은 대대로 주군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그 뜻와 기개, 야망이 남달랐던 인물로 유비가 어릴 때 종중의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 거야"라고 말해서 숙부 유자경이 가문을 망치겠다고 꾸지람을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라 함은 곧 천황의 수레를 타겠다는 발언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독서를 즐겨하지는 않았고 동물, 식물, 음악, 미술,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 표정에 잘 드러내지 않았고, 호협(豪俠)들과 교우를 맺는 것을 좋아하니 젊은이들이 다투어서 그를 따랐다고 한다.

이후 15세가 되자 모친이 학문을 익히도록 하자, 동종인 유덕연, 요서 사람인 공손찬과 함께 예전에 구강태수를 지낸 같은 장군 출신으로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던 노식을 섬기게 되었으며 이때 후일 뒷배가 되어준 공손찬과 만나 형으로서 섬겼다.

황건적의 난 이후 서주를 얻기까지

황건적의 난 당시 기주 중산국의 대상인 장세평과 소쌍 등은 재산이 수천금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유비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유비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후 유비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독우(감찰관)이 자신을 내쫒으려고 여겨 독우를 두들겨패고 관직을 버림으로서 금방 잃어 버렸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를 보내 단양으로 가서 모병하게 하니 유비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서주 하비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가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유비는 조조를 만나게 되고 조조와 함께 조조의 고향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영제 사후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유비 역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이후 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유비는 지인인 공손찬에게로 가서 별부사마, 평원국의 국상(태수급)을 겸했다. 이때 유평이란 자가 유비를 불만스럽게 여겨 휘하 사람에게 유비를 몰래 암살하게 하려 했는데, 유비는 그 일을 모르고 그 사람을 매우 후대하였고 그 사람은 죄책감에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났다. 이 시절에 사람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는데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아랫사람이라도 거리낌 없이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이 당시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된 공융이 태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비는 병력을 따로 보내 구원했다.

이때 조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서주를 침공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였다. 서주목 도겸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유비와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유비는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에서 이민족 오환의 기병을 가지고 서주를 구원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 4천을 유비에게 주고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의 명칭 가운데 하나인 '유예주'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미축에게 일러 유비에게 서주를 맡겼고 유비는 사양했으나 진등과 공융이 계속 권하니 유비는 서주목에 올랐다. 이때가 194년이다.

방랑군주

이때 여포가 조조한테 패배하여 서주로 도망쳤는데 유비는 여포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이때 유비 휘하의 진군이 유비에게 여포를 쓰지 말라고 청했지만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년 원술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를 이를 막았다. 조조가 표를 올려 유비를 진동장군으로 삼고 의성정후로 봉했다. 유비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유비의 수하 장비는 하비의 수장 조표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로인해 조표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이후 유비는 동족으로 가서 서주와 양주사이의 도시 광릉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이때 양봉, 한섬은 서주, 양주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유비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유비는 곤궁한 처지에 몰려 여포에게 화친을 구했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으며 유비를 서주로 돌아오게 하고 그 세력을 아울러 원술을 공격했다. 여포의 부하들이 유비를 도모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포가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유비는 불안을 느끼고 소패로 가서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유비를 다시 뒤통수쳤고 유비는 견디지 못해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으로 삼았아 패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조조는 군사들을 보태어 동쪽으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가 고순을 보내 이를 공격하자 조조는 하후돈을 보냈으나 결국 여포에게 패하여 유비의 처자들은 여포에게 빼았긴다. 결국 유비와 조조는 연합하여 여포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때가 198년이다.

조조 휘하에서

능력

삼국지에서 묘사되기론 유비는 자신의 주변인물들을 잘 써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묘사된다. 결론적으로 놓고 보면 조조나 손견 같은 천하의 능력자들과 결과물이 같다. 이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된 것이었냐 하면 유비는 적재적소에 '각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의 능력을 알아내고 파악하며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안목을 죽어라 키웠다. 이런 사람이 회사의 사장이 된다면 엄청나게 번영을 누릴 것이다. 유비는 인재선발능력과 인재배치능력으로 황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능력도 딱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훈련했다. 조조처럼 전체 분야에 걸쳐 잘한 것도 아니고 손견처럼 싸움만 무식하게 잘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책사들처럼 머리만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유비는 자신의 능력 부족을 다른 사람으로 커버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휘하 사람들에게는 항상 잘했고 자신의 부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아했다. 게다가 자신이 나설 수 있으면 최대한 나서고 어떻게든 유능한 인재를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일례로 유파라는 인물이 있는데 유파는 항상 유비를 증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자존심 따위 다 버리고 유파를 계속 등용하려고 애썼다. 유파는 유비에게서 계속 도망쳤으나 끝내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서 유비의 부하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유파가 유비의 부하가 되자 촉의 재정 상태를 아주 넘사벽 수준으로 만들어놓았다. 촉을 거의 재벌 수준으로 발전시킨 게 유파였고 유비는 유파가 그런 인물인지 일찌감치 간파했던 것이다.

용인술 면에서의 평가

상황을 판단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며 사람의 능력과 특징을 파악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때문에 여포가 조조에게 패배하고 나서 배신의 대명사 여포에게조차 그동안 해온 행적들을 들춰가며 여포를 죽게 만들었다. 또한 유비는 자신을 띄우는것에도 능숙하여 이미 평원 시절부터 인의로 이름이 났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도겸의 구원을 할때도 유비는 안으로는 서주 사람들을 보호하고 바깥으로는 조조를 견제했다.

유비는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의 능력으로 꾸역꾸역 채웠다. 일단 자신의 사람이 되면 제대로 된 사랑을 베풀었다. 위연은 유비에게 임관할 당시 신참 듣보잡 나부랭이 취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에게 엄청난 신뢰를 줬는데, 유비는 위연의 충성심을 어여삐 여겨 위연에게 한중태수라는 파격적인 자리를 줬다. 이게 왜 파격적이냐 하면 위연의 경쟁상대가 다름 아닌 장비와 조운이었기 때문이다. 위연 따위가 도저히 한중태수로 임명될 것 같지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신뢰를 하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이 유비였다.

그리고 유비가 조조나 손견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것이 바로 인격이다. 조조는 자신을 분노하게 하는 자들을 싹쓸이하고 손견 역시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싹쓸이했다. 하지만 유비는 절대로 싹쓸이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릉대전을 앞둔 상황에서 유비의 외척인 미방이 오나라로 배신했을 때, 유비의 외척이자 그 형인 미축이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를 결박하고 도부수를 데려와서 "폐하, 신이 무능하여 신의 동생인 미방이 오나라로 투항했습니다. 신을 죽여주십시오!"라고 유비에게 빌었다. 하지만 유비는 호쾌하게 웃은 뒤 미축의 결박을 풀어주고 도부수를 물러가게 한 다음 미축을 용서했다. 이 정도로 유비는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유비는 장임을 꼬셔보려고 갖은 아양을 다 떨었으나 장임은 유장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충의지사답게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

사실 이릉대전 역시 관우만 살았으면 절대로 일으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유비는 자기 휘하의 장수들을 핏줄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