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후보의 13대 대선 포스터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선거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선거대한민국에서 틀:날짜/출력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배경

전두환은 자신의 7년 임기가 끝나가자, 12·12 군사반란의 동지이자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인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더 이상 전두환의 독재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재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 등은 들끓던 여론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틀:날짜/출력부터 야권인사와 종교계인사 등을 중심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를 6월 항쟁이라 한다. 결국 국민적 저항에 굴복한 노태우는 틀:날짜/출력, 6·29 민주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약속하게 된다. 이에 따라 13대 대통령선거는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의 원칙을 준수하는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되었다.

전개

노태우 출마

민주정의당에서는 전두환의 후원 속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노태우는 선거기간 동안 독재자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노태우는 6·29 민주선언을 통해 국민의 뜻에 승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외쳤다.5,000억쯤은 가지고 있어야 보통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보다. 니들이 그지야? 노태우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안정 속에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출마

과정

단일화에 대한 기대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노태우, 그리고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통일민주당김영삼, 평화민주당김대중,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 다수의 유권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다. 마침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두 사람의 선의와 양식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09/08/18/20090818002015_0.jpg?width=500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김영삼 간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김영삼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화끈하게 밀어준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그 이후 신민당 총재선거에서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적이 있었다. 5공 시절에는 둘이 함께 민주화투쟁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대중이 유신체제, 신군부 등으로부터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옥고를 치르면서 살아남은 재야의 투사였다면, 김영삼은 야당의 당수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민주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외국의 사례로 비유하자면 '김대중=넬슨 만델라(남아공 아프리카 민족회의)','김영삼=레흐 바웬사(폴란드 자유노조)'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던 셈.] 약 16년에 걸쳐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던 셈이다.

단일화 합의의 무산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이었건만, 점점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지친 재야에서는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두 사람의 합의를 촉구했고,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마침내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 [1]전 민주당 대표의 술회는 이렇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독재정권이 덧씌운 멍에이지만 김대중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적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씨가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더라. 그러니까 후보도 당권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2] 김대중씨가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더러 발가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링크]

사실 김대중이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실제로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정변이 일어날 우려를 했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힌 적도 있었다. [3]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야권 원로들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언젠가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합의할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10월27일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국민은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진행된 토론회에 나타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자못 싸늘했다. 이날 토론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면서도 서로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http://www.kgnews.co.kr/news/photo/200908/208184_32055_4218.jpg?width=500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연사의 연설이 끝난 뒤 마침내 김영삼이 연단에 올랐는데,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우~ 우~” 하는 야유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4] “(대선 후보를)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이런 외침도 터졌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청중이 항의하려 했지만, 야유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은 정치인생 30여 년에 처음 겪는 굴욕감에 떨며 고려대학교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야당, 재야인사 등은 김영삼이 대선 주자로 나오는 걸 권했으나, 당시 젊은 학생 운동권의 다수를 차지하던 NL들에게는 김대중이 더욱 인기 있었다.

반면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은 마치 그의 개인 유세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뒤이어 그의 지지자들에게 목말이 태워진 채 고려대학교 앞 안암로를 행진하기까지 했다. 이때 김대중은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라고 외쳤으며, 결국 다음날, 김대중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전격 탈당한다고 선언했다.

평화민주당의 창당과 4자 필승론

마침 동교동계 의원들은 자기들에게 총재 등 주요당직이 주어지지 않자 상도동계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고, 탈당한 김대중을 따라나섰다. 김대중은 자기를 따라나선 정치인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함으로써 야권은 분열된 채 선거를 맞았다. 그 후 김대중이 김영삼측에 자신이 당권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한 것은 앞서 있었던 통민당 입당 당시의 양측의 합의를 재인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시 김대중의 참모들 가운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 모두 양보해버리자는 의견을 개진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예를 들면 조윤형). 그래서 김대중은 대선출마 포기조건으로 차기 총선에서 자신에게 공천권의 20%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김영삼에게 최후의 제안을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것마저 거절했다고 한다.[5]

이로 인해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한화갑 등이 YS와의 결별을 주장하면서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4자 필승론.

당시 국내 유권자 수는 25,127,158명(2510만)이었다. 지역별 유권자 수와 후보별 우세 지역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6,332,346명 경기 3,270,127명 부산 2,233,092명 경남 2,122,061명 경북 1,782,461명 충남 1,708,727명 전남 1,580,881명 전북 1,241,878명 대구 1,236,326명 강원 1,018,999명 인천 955,271명 충북 854,232명 광주 520,488명 제주 270,629명

후보들에게 우세한 지역에서의 유권자 수를 더한 것과, 서울-경기-강원-인천-제주의 유권자 수를 더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김영삼 4,315,553명 김대중 3,343,247명 노태우 3,018,787명 김종필 2,562,959명

각 후보들의 연고지가 아닌 서울-경기-강원-인천-제주의 유권자수가 11,847,372명.

선거에 후보들의 연고지역 유권자들만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특정 후보의 우세가 점쳐지지 않는 11,847,372명의 유권자들도 표를 행사하게 된다. 이에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연고지인 호남을 시작으로, 유권자 수는 많지만 각 후보들과는 연고가 없는 서울-경기권을 공략하는 선거 전략을 세운다.

즉,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는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대결하며 표가 갈리게 하고, 김종필 후보는 이미 한물 간 사람인데다, 인구가 적은 충청지역만 압도한다면... 김대중 자신은 연고지인 호남지역과, 인구가 많은 서울/경기권을 휘어잡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사람이 모두 나와도 결국 김대중이 이기는 선거', 4자 필승론이었다.

김종필 출마

김종필은 구 민주공화당(박정희 정권) 세력들을 결집시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총재 자리에 오른다. 자신의 고향인 충남도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불상사

여기가 바로 지옥이군요!

노태우 후보의 전주 유세장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며 유세장이 엉망이 되었다. 시민들은 ‘김대중’을 연호하였다.

  •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김대중을 지지하는 광주시민들이 ‘김대중’, ‘양보’를 외치며 폭력시위를 벌여 김영삼 후보는 4분 동안 자제만을 호소하다가 연설은 하지 못하고 연단을 내려와야 했다.

  •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

김영삼을 지지하는 대구시민들이 ‘김영삼’을 외치며 폭력시위를 벌여 돌멩이와 병을 연단을 향해 던지는 소란사태가 벌어졌으나, 이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대동단결’, ‘질서유지’를 외치며 분위기가 안정, 김대중은 연설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선거 결과

선거 결과가 발암물질이다.

야권 표가 김영삼김대중으로 크게 분열되면서 당초 당선 가능성이 낮았던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신군부를 몰아내기 위해 벌인 6월 항쟁이 성공을 거두어 열린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다시 신군부 출신의 인물을 당선시키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노태우의 전국 득표율은 겨우 37%로서, 이는 대통령선거 역대 최저 득표율 당선이다.

선거유세 중 발생한 폭력시위와 북한 공작원에 의한 대한항공 805편 폭파사고가 ‘안정’을 외치는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분석도 있다.

후보자 정당 득표수 %
노태우 민주정의당 8,282,738 36.64
 
김영삼 통일민주당 6,337,581 28.03
 
김대중 평화민주당 6,113,375 27.04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1,823,067 8.06
 
신정일 한주의통일한국당 46,650 0.20
 
무효표 463,008
총 투표수 23,066,419 100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25,127,158 89.2%

지역별 득표율

지역 / 시 · 도
노태우
민주정의당
김영삼
통일민주당
김대중
평화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득표수 % 득표수 % 득표수 % 득표수 %
수도권 서울특별시 1,682,824 29.95% 1,637,347 29.14% 1,833,010 32.62% 460,988 8.20%
인천직할시 326,186 39.35% 248,604 29.99% 176,611 21.30% 76,333 9.20%
경기도 1,204,235 41.44% 800,274 27.54% 647,934 22.30% 247,259 8.51%
강원도 546,569 59.33% 240,585 26.11% 81,478 8.84% 49,954 5.42%
충청도 충청북도 355,222 46.89% 213,851 28.23% 83,132 10.97% 102,456 13.52%
충청남도 402,491 26.22% 246,527 16.06% 190,772 12.42% 691,214 45.03%
호남
(전라도)
광주직할시 22,943 4.81% 2,471 0.51% 449,554 94.41% 1,111 0.23%
전라북도 160,760 14.13% 17,130 1.50% 948,955 83.46% 8,629 0.75%
전라남도 119,229 8.16% 16,826 1.15% 1,317,990 90.28% 4,831 0.33%
영남
(경상도)
부산직할시 640,622 32.10% 1,117,011 55.98% 182,409 9.14% 51,663 2.58%
경상남도 792,757 41.17% 987,042 51.26% 86,804 4.50% 51,242 2.66%
대구직할시 800,363 70.69% 274,880 24.28% 29,831 2.63% 23,230 2.05%
경상북도 1,108,035 66.38% 470,189 28.17% 39,756 2.38% 43,227 2.58%
제주도 120,502 49.77% 64,844 26.78% 45,139 18.64% 10,930 4.51%
지역별 최다 득표자는 진한색으로,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한 후보는 연한색으로 배경을 처리하였다.

기어코 지역감정의 지옥문이 열리고 말았다. 대구-경북지역은 노태우 몰표, 부산-경남지역은 김영삼 몰표, 호남지역은 김대중 몰표, 충남지역은 김종필 몰표가 나온 가운데, 그나마 전 지역에서 고른 득표율을 얻은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만들어진 지역정치구도는 그대로 굳어지면서, 한국 정치의 최대 골칫거리가 된다.

  • 수도권: 야당표가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크게 분열되면서 어부지리로 여당후보인 노태우가 가장 많은 득표수를 가져갈 수 있었다. 다만 서울에서는 타 지역들과 달리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유난히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당시에 기반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호남주민들이 일자리를 찾기위해 서울로 이동하는 현상(이촌향도, 離村向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 영남: 노태우의 연고지인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노태우가 크게 선전하였다. 대구에서는 노태우의 득표율이 7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대로 김영삼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지역에서는 김영삼이 크게 선전하였다. 부산에서는 김영삼의 득표율이 5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선거는 영남지역(정확히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민주당 계열 대통령 후보를 밀어준 마지막 선거가 되었다.
  • 호남: 김대중의 연고지인 호남지역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90%에 이르는 독재자급 득표율(광주 94%, 전남 90%, 전북 84%)을 기록하였다. 여론조사에서는 김대중의 득표율이 이렇게까지 높게 나타나지는 않아서, 이 같은 결과에 호남주민 스스로도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 충남: 김종필의 연고지인 충남지역에서는 김종필 후보가 45%로 몰표를 받았다.
  • 강원/충북: 전통적인 보수 성향 지역인 강원/충북지역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선전하였다.

선거 이후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노태우는 5년 임기동안 민주화 정착, 경제발전, 북방외교 등의 성과를 기록하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하지만 노태우는 12·12 쿠데타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는 점 때문에 임기 동안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김대중은 이 선거를 부정 및 불법 선거로 규정하며, 투쟁의 뜻을 밝혔다. 김대중은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다면 자신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때 양김사이에 단일화가 성공했었다면 부산-경남-호남 지역이 함께 진보진영의 텃밭으로 묶이며 영-호남 지역갈등은 옅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실패했으며, 이후 3당합당 과정을 거쳐 부산-경남 지역은 대구-경북 지역과 함께 보수진영의 텃밭으로 묶이게 된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에는 부산,경남 지역에서 민주계 정당의 득표율이 20%를 넘는 일은 없게 되었다.

틀: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1. 본래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이후 국회의원, 성균관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타계.
  2. 실제로 대선국면이 본격화되면서 상도동계 일각에서 대권과 당권의 분리는 선거유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한 사례가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은 소장파의 김대중에게, 당권은 대여온건파의 유진산에게로 분리되어 있어 선거에 패배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당시엔 대권과 당권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여당측의 선거부정이 아니었다면 야당이 이긴 선거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3. 이보다 앞선 서울의 봄 시절, 훗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에게 체포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조차도 "다른 후보는 모르겠지만 김대중 후보는 사상이 불순한 자다.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군부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지경이었다. 신군부 반란군에게 체포된, 정치군인과는 거리가 먼 그조차도 당시 그런 인식을 가졌을 지경이니...
  4. 지금이야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특정 정파의 보스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지만,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두 김씨는 존경 받는 정치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둘 중 한쪽을 지지하는 사람도 다른 쪽을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다.
  5. 옛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할 때 김대중에게 아무런 지분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에 비해 세력도 훨씬 딸리면서 자꾸 지분 달라며 김영삼에게 지저분하게 흥정을 요구해대니 김영삼 입장에서는 확 짜증이 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설에는 김대중의 출마를 당시 정권이 전면에서 부추겼다는 주장도 있다. 김대중에게 유리하다는 정보나 여러 지지 편지들을 보내서 김대중의 눈을 흐리게 했다는 것. 물론 신빙성 있는 주장은 아니다. 6.29 선언에서 직선제를 받아들인 것도 "표 분열이라면 노태우가 필승"이라는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지만, 이는 반대로 양 김이 단일화한다면 노태우는 필패가 된다.(...) 양김이 분열할지 단일화할지는 가능성은 반반이다. 대선에서 양김은 반드시 분열하고 그렇지 않아도 간단한 이간질만 시키면 분열은 성공한다는, 극히 높은 ~~무당~~예지력을 가졌을리가... 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이들이, 겨우 50%의 확률에 도박을 걸 이유가 없어 설득력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