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전투

{{{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15년 2월~1916년 1월
결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승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병력:
본문 참조
병력:
본문 참조

배경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독일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접근하여 왔으며, 오스만 투르크를 경유하여 중동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한다는 3B 정책[1]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경우 오랜 적대국인 러시아영국과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독일과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투르크군을 훈련시킬 독일군을 초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의 잔데르 장군이 1913년 12월에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터키의 육군 감찰부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유럽에 전운이 감돌면서 영국은 자국의 조선소에서 건조중인 외국 함정 중 자국 해군에 사용 가능한 모든 함정을 징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오스만 투르크로 인도하기로 하였던 전함 2척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중 1척은 완성된 상태였다. 이러한 영국의 신조 전함 인계를 거부하겠다는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 정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틈을 타고 독일이 끼어들어서 독일은 자신들의 전투순양함 개밴(Gaeben)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Breslau)를 투르크에 넘기는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 쇼혼 제독이 지휘중이던 이 두 척의 독일 함정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지중해에서 독일 본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이들은 영국프랑스의 감시망을 피하여 이스탄불에 입항하였다. 이들이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 오스만 투르크 정부는 두 함정을 구매하였다고 대외적으로 공포하였으나 승조원은 그대로 독일의 해군 장병들이 탑흥하고 지휘관도 쇼혼 제독이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10월 하순에 쇼혼 제독은 투르크와 독일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흑해에 자리한 러시아의 주요 군항인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세바스토폴 등지의 외해에 기뢰를 부설하고 러시아의 함선을 격침시키기까지 하였다. 결국 이러한 도발로 인해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도 전선이 형성되면서 1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추가되게 되었다.

1914년 말, 유럽의 서부전선의 대치상태가 참호전의 양상을 띠면서 완전한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의 대군에 대처하는 독일의 병력은 전체 전력의 20% 미만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무장상태가 빈약한 정도를 넘어서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력이 상당수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을 통하여서 부족한 무기를 공급받으려고 하였는데 문제는 러시아측이 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해상 교통로는 독일이 통제하는 발틱 해쪽 통로와 오스만 투르크가 통제중인 다다넬즈 해협을 통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 질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해결보기 위하여 러시아를 제대로 무장시키고 독일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분산시키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또한 러시아의 남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함께 계획중이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의 전쟁위원회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하여 봉쇄된 흑해의 러시아 항구로 향하는 항로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동맹국이지만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를 연합국 측으로 가담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벌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유럽쪽 세력을 약화시킬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가 영국에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해군측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주장하자 영국 전쟁위원회는 틀:날짜/출력 "이스탄불을 목표로 갈리폴리 반도를 포격하고 탈취하는 해군원정을 2월 말에 실시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다다넬즈 전투

연합국의 작전계획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다넬즈 봉쇄전대 사령관인 카든 중장에게 작전계획 보고를 지시하였으며, 1915년 1월 11일 보고한 카든의 작계는 다음과 같은 4단계의 공격계획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1. 다다넬즈 해협 입구의 모든 적 방어진지 파괴
2. 네로우스까지의 기뢰원에 대한 소해와 소해를 제원하기 위한 적 방어진지 제압
3. 네로우스의 적 방어진지 제압

4 네로우스에 대한 소해와 해안 요새를 포격하면서 네로우스를통과하여 마르마라 해에 진출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요청된 전력은 구식전함 12첨, 전투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전단 선도함 1척, 구축함 15척, 잠수함 6척, 수상기 4기, 소해정 12척 및 기타 보조 함선들이었다. 해군성에서는 이 계획을 승인하였으며, 프랑스 역시 구식전함 4척을 침공용으로 제공하는데 동의하면서 작전계획은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었다. 추가 증원 세력이 에게 해로 향하는 동안 이러한 대규모 작전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었던 카든 제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처칠은 부사령관에 드로벡 소장을, 참모장에 키즈 준장을 임명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방어계획

오스만 투르크는 자신들의 다다넬즈 해협 방어를 에게해에 가까운 해협 입구 12마일 근방에 집중하였다. 다다넬즈 입구측 육지 끝단에 있는 4개의 해안요새에 27문의 해안포가 배치되어있었으며, 네로우스로 향하는 위쪽에는 12마일 거리에 11개의 요새에 88문의 포를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이 두 지점 사이에는 해안을 따라 소구경의 해안포가 추가로 배치되었다. 이외에 독일의 원조를 받아 내로우스 근해에 기뢰를 잔뜩 부설하였으며, 기뢰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뢰원 부근에 포대를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야간에 몰래 소해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한 탐조등까지 설치하였다. 또한 해협 입구와 중간의 고지대 사이에는 이동ㅇㅇ 곡사포를 배치하였다. 다만 투르크측은 요새 해안포의 대규경 포탄이 부족하다는 점이 약점이었다.

작전경과

1915년 2월 19일 아침 다다넬즈 해협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카든의 1단계 작계는 다다넬즈 해협 입구의 모든 방어진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갈리폴리 반도 끝단에 있는 헬레스 곶과 세드 ㅇ엘 바 마을에 인접한 2개의 요새와 해협 건너편 아시아쪽 해안의 쿤 케일 마을 부근에 있는 2개의 요새가 주요 공격 표적이었다.

총사령관 카든 제독은 전투순양함 인플렉서블에 승함하여 기함으로 삼았다. 5척의 구식전함들은 해안포의 최대사거리 밖 외해에서 요새에 대한 사격을 시작하였다. 요새의 투르크군은 해안포의 사정거리에 전함이 접근하면 바로 발포하여 연합국 함정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부 함정이 손상을 무릅쓰고 가까이 접근하여 주간 내내 포격을 퍼부어 결국은 요새를 폐허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다음 단계로는 기상상황이 되는대로 함정의 육전대와 해병대가 해안 끝단에 상륙하여 함대가 파괴하지 못한 잔여 포대를 공격하였다. 결국 3월 4일 4개 요새에 대한 파괴작전이 완료되었으며, 카든 제독은 1단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소식에 영국의 전쟁위원회는 계획대로 작전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어 투르크와 앙숙이던 그리스 정부에서는 3개 사단을 갈리폴리에 상륙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이스탄불을 그리스가 점령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러시아가 반대하고 대신 러시아의 육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이어서 2단계 작전인 다다넬즈 해협의 소해작전과 해안선 양편에 배치된 포대를 제압하는 작전이 시행되었다.날씨가 좋은 날마다 전함들이 해협에 진입하여 포대에 사격을 가했으나 성과는 미미하였다. 이동용 곡사포가 여기저기 위치를 바꾸거나 은폐를 철저하게 하여서 제대로 된 포격이 불가능하였다. 무전기를 장치한 수상기를 정찰기가 목표를 확인하여 수시로 위치를 알려주기는 하였지만 기상조건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케페즈 포인트에 부설된 기뢰원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기뢰원은 해협 입구 앤쪽 7마일부터 시작되어 해협 전체를 가로질러서 부설되었다. 반면 영국군의 해상 작전 중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 바로 이 기뢰를 소해하는 소해작전이었다. 이 소해작전을 민간 어부들의 비무장 트롤 어선에 임시로 소해구로 수행하였던 것. 해협의 거센 조류 덕분에 어선의 속력 자체가 거의 나지 않았으며, 소해구가 절단되는 일도 수시로 일어났던 것. 결정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민간 승조원들은 전투원이 아니었던 관계로 주위에 포탄이 떨어져서 물기둥이 치솟기만 하여도 바로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야음을 틈타서 소해를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탐조등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가하자 어선들은 또 다시 도망갔던 것. 이에 빡친 카든 제독은 소해정 지휘관을 함대에서 차출한 현역 장교로 재배치하고 승조원들도 부사관들로 교체하여 케페즈 포인트에 있는 기뢰원까지 소해하며 들어갔다. 몇 차례의 포탄을 맞았지만 인명피해는 9명에 그쳤던 것. 한편 투르크측에서는 연합국 전함들이 해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아시아쪽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확인하고 3월 8일 밤에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아시아쪽 해안과 평행으로 20발의 기뢰를 몰래 부설하였다. 이 기뢰들은 3발밖에 소해되지 못하였으며, 이후 대형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작전수행에 빡친 영국의 해군성은 카든에게 압력을 가하여 결국 카든이 사임하고 부사령관으로 있던 드 로벡 제독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드 로벡 제독은 예하 모든 전함을 4척씩 전방으로 내보내서 내로우스 요새를 제압하고 동시에 구식전함들은 해안의 소형 곡사포와 교전하면서 동시에 소해도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먼저 들어간 4척의 영국 전함들이 한시간 반 정도 요새에 포격을 실시한 뒤 2열로 들어간 4척의 프랑스 전함들이 전방으로 이동할 때 쯤에는 육상으로부터의 포격은 상당히 감소하였다. 이에 드 로벡 제독은 계획된 대로 프랑스 전함들을 뒤쪽으로 물리고 다시 영국의 전함을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이에 아시아 방향의 해안을 따라 계획된 철수 침로로 들어가기 위하여 프랑스 함정들이 우현으로 변침항 종열진을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터키가 지난 3월 8일 밤에 투르크가 몰래 부설한 기뢰원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곧이어 프랑스의 전함 보브가 기뢰에 접촉하여 승조원 600명과 함께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에 1선의 영국 전함들도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던 영국 전함 중 인플렉스블이 보브가 침몰한 위치 바로 인근에서 기뢰에 접촉하여 함수가 침수된 채로 겨우 해협을 빠져나갔고, 얼마 후 구형전함 이레시스터블도 기뢰에 접촉하여 아시아 쪽 방향으로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손상된 이레시스터블을 예인하도록 지시받은 전함 오션도 기뢰에 접촉하여 두 함정 모두 근라 밤에 침몰하였다. 이 덕분에 순식간에 연합국의 전함 3척이 침몰, 1척은 대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다넬즈 전투의 종결

일단 네로우스를 방어하던 투르크군과 독일군은 연합국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안도하였으나 네로우스 요새를 방어하던 투르크군의 포대는 파괴되거나 고장난데다 포탄도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연합군이 재차 시도할 경우 네로우스의 기뢰원을 뚫고 쉽게 돌파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다다넬즈 해협에서 퇴각하여 전진기지인 에게 해의 렘노스 섬에 도착한 드 로벡 제독은 육군의 지상작전과 연계되지 않고는 다다넬즈에 대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이를 처칠이 수용하면서 연합국 해군의 2단계 작전은 실패로 종료되었다.


갈리폴리 전투

갈리폴리 전투의 부대 배치 현황

결과

각주

  1. Berlin-Byzantium-Bagd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