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록

펑크 록(Punk Rock)은 대중음악의 장르이다. 1960년대 중후반 탄생해 1970년대 중반 록 음악의 팽창 당시 크게 퍼져나갔으며, 록 음악을 넘어 이후의 대중 음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펑스(Punx)'라고 불리는 향유층을 토대로 음악을 넘어서 패션, 라이프스타일, 정치 등을 규정하는 하위문화로 발전했다.

비슷한 이름의 음악 장르 펑크(Funk)와는 별 상관없다.[1]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개러지 록과 프로토-펑크[편집 | 원본 편집]

본래 "Punk"라는 단어는 '폐품, 조잡한 것, 불량배' 등을 일컫는 속어였다. 이 단어는 주로 거칠고 난잡한 것이나 능력없는 사람, 무뢰배 등을 조롱하는 욕설로서 사용되었다. 1950년대 미국로큰롤 가수들은 기성 음악에 비해 거칠고 시끄러운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종종 Punk라는 비판을 받았다. 로큰롤은 최초의 록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배출하며 승승장구했으나, 지나치게 문란하고 거칠어진 로큰롤에 위협을 느낀 미국 기성 세대의 견제와 아이디어 고갈로 인해 빠르게 쇠퇴하게 된다.

미국의 로큰롤은 1960년대 비틀즈를 위시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다시금 불붙게 된다. 영국의 로큰롤 밴드들은 미국 각지를 돌며 공연을 펼쳤고, 이를 계기로 미국 각지에서 록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이들은 대부분이 악기를 쳐본 적 없던 음악 초짜 청소년들이었으며, 자기네 차고(Garage)에서 연습하고 곡을 녹음해 개러지 록(Garage Rock) 밴드라 불렸다. 몇몇 곡이 깜짝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평론가들은 이들에게 혹평을 퍼부었는데, 이 중 퀘스천 마크 앤 미스테리언스(? and Mysterians)의 음악은 "조잡하고 형편없다"라는 평을 받으며 펑크 록(Punk Rock)이라는 조롱섞인 별명까지 받게 된다. 이것이 '펑크 록'이라는 단어가 음악계에 최초로 등장한 사례가 되었다. 이 시기의 '펑크 록' 밴드들은 이렇듯 주류 음악계에서는 혹평받았지만 일부 팬들의 컬트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훗날 펑크 록의 부흥 이후 재평가받게 되었다.

1969년이 되자 펑크의 직접적인 시조가 되는 밴드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디트로이트의 MC5는 극단적으로 과격하고 신랄한 로큰롤을 연주해 록 음악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미시간주스투지스는 과격한 연주와 파격적인 가사와 무대 매너로 컬트적인 지지를 얻었고, 밴드의 프론트맨 이기 팝은 '펑크의 대부'로 불린다. 1970년 보스턴에서 결성된 모던 러버즈(The Modern Lovers)는 미니멀하고 도시적인 록 음악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뉴욕 출신의 글램 록 밴드 뉴욕 돌스는 직선적이고 거친 스타일의 독특한 글램 록을 선보였다. 이들은 펑크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확립되기 이전의, 후대의 펑크에 큰 영향을 끼친 프로토-펑크(Proto-Punk)로서 취급된다.

CBGB와 뉴욕 펑크[편집 | 원본 편집]

1973년 12월 10일, 뉴욕 맨해튼에 "Country, BlueGrass, Blues and Other Music for Uplifting Gormandizers", 줄여서 CBGB라는 이름의 작은 클럽이 문을 연다. CBGB는 이름과 다르게 다양한 장르의 무명 밴드들에게 공연 장소를 마련해 주었고 뉴욕 내의 각양각색의 밴드들이 CBGB에서 공연을 했다. 1974년, 텔레비전이라는 이름의 무명 밴드가 CBGB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가졌다. 관객들은 이들의 독특한 음악에 매료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은 매주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CBGB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당시 록 음악의 주류를 차지하던 복잡하고 화려한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과 대비되는 미니멀하면서도 혁신적인 록 음악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밴드의 베이시스트 리처드 헬(Richard Hell)은 헝클어지고 이리저리 뻗친 머리, 찢어지고 기워진 티셔츠와 청바지, 낡은 가죽 재킷이라는 독특한 패션을 선보였고, 이는 그대로 펑크 패션의 청사진이 되었다.

텔레비전의 등장을 기점으로 다양한 음악가가 CBGB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의 기타리스트 톰 벌레인(Tom Verlaine)의 지인이었던 시인 패티 스미스가 밴드를 결성했고, 예술학교 출신 학생들이 모여 결성된 토킹 헤즈가 텔레비전의 오프닝 밴드로 공연했으며, 플레이보이 클럽의 버니걸로 일하던 데비 해리(Debbie Harry)를 프론트우먼으로 한 밴드 엔젤 앤 더 스네이크(Angel and the Snake)는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론디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1974년 8월 CBGB에 처음 발을 들인 라몬즈는 강력하고 단순한 기타 리프, 3분을 넘지 않는 빠르고 알기 쉬운 곡, 반항적이고 솔직한 태도 등으로 펑크 록 사운드를 완전히 정립시켰다. 이들은 펑크 록의 선구자들로서 모두 다 대중음악사에 남은 전설적인 밴드가 되었으며 CBGB는 펑크 록, 더 나아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상당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그 지나친 급진성 탓에 대중적으로 어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뉴욕의 음악계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로부터 시작된 전위적인 록 음악 신이 자리잡아 있었기에 이러한 음악들이 탄생하고 매니아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컬트적인 마니아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대중들은 이들의 낯선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팝 성향을 받아들인 일부 밴드를 제외하고는 주류 음악계에 진입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런던 펑크의 성공[편집 | 원본 편집]

영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초반부더 지나치게 팽창한 록 음악에 반대하며 펍 록(Pub Rock)이라는 이름 하에 로큰롤의 초심을 되찾는 운동이 일고 있었다. 이들은 화려한 장비로 거대 스타디움을 꽉 채운 군중 앞에서 공연하는 당대의 거물 록 밴드들을 비판하며 싸구려 술집이나 소극장 등에서 공연하며 초기 로큰롤의 원초적인 사운드를 재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일부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으며, 이후 런던 펑크의 등장 이후 재평가된다.

1970년대 중후반 영국병(The British Disease)이라 불리는 현상이 영국 사회를 강타했다. 영국 경제는 갈수록 위축되었고 많은 청년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계급주의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청년 세대의 상류 계급과 사회에 대한 분노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1975년 연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런던 킹스로드에서 패션 숍 'Sex'[2]를 운영하던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은 1970년대 초반 뉴욕 돌스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CBGB와 뉴욕 펑크의 등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밴드를 매니지먼트하기로 한다. 무명 밴드 스트랜드(The Strand)의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한 맥라렌은 보컬리스트 존 라이든(John Lydon), 활동명 조니 로튼(Johnny Rotten)을 영입하고 밴드의 이름을 섹스 피스톨즈로 바꾼 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섹스 피스톨즈는 데뷔 이후 신랄하고 반사회적인 가사, 거칠고 무례한 태도로 금세 논란에 휩싸인다. 이들은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을 모욕하거나 싸움판을 벌이는 등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과격한 무대 매너로 런던 음악신에 악명을 떨치게 된다. 엉성하지면 놀랄 정도로 시끄러운 연주와 음정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러대는 조니 로튼의 노래는 기성세대와 보수층에게는 괄시받았지만 당시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영국의 청년층에게는 엄청난 호응을 얻게 된다. 말콤 맥라렌은 뉴욕 펑크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당대의 영국 사회에 이식했고, 섹스 피스톨즈는 이를 당대 영국 젊은이들의 분노와 결합해 폭발시켰다. 밴드는 빠르게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고 동시에 , 롤링 스톤즈 등 기성 록 밴드와 영국 왕실, 상류층에 대한 문제 발언들로 쉴새없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기성 세대는 이들의 음악을 검열하거나 아예 공권력을 동원해 진압하려고 했고, 극우파들에 의해 밴드 멤버가 피습당하는 사태로 몇 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밴드의 기세는 이미 멈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977년 이들의 유일한 스튜디오 음반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가 발매되고 차트 1위를 기록한다.[3]

섹스 피스톨즈의 활약으로 인해 펑크 록은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많은 음악가들이 이들의 음악에 충격을 받았다. 기성 뮤지션들 상당수는 이들을 음악적으로 논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고 비난했지만 일부 뮤지션들은 펑크 록이 가진 직관성과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1977년 섹스 피스톨즈에 이어 클래시, 버즈콕스, 댐드 등 걸출한 펑크 록 밴드들이 앞다투어 음악 시장에 등장하며 런던 펑크는 절정에 이른다.

펑크의 분열[편집 | 원본 편집]

인기의 정점에 오른 런던 펑크는 그러나 약 1년만에 붕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근본적으로 탈권위적이고 반체제적이었던 펑크가 주류 음악계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모순을 품고 있었다. 런던에서만 백여 개의 밴드가 활동하고 있었고, 날이 갈수록 과격해지는 이들의 퍼포먼스에 공연장들은 난색을 표했다. 펑크 향유층의 배타적이고 패쇄적인 모습은 대중을의 관심을 멀어지게 했다. 음악 자체가 지나치게 단순해 쉽게 질리는 것도 한 몫 했다. 결국 런던의 펑크 록 무브먼트는 1977년을 끝으로 음악 차트 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펑크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살아남아 수많은 장르로 분화되게 된다.

초기 펑크 탄생 시기 활약하거나 이들을 보고 음악을 시작한 뮤지션들은 펑크의 몰락 이후 기존의 펑크 록의 요소를 여러 장르들과 결합하여 음악적 실험을 거듭했다. 이들은 펑크 록의 단순한 구조를 바탕으로 재즈, 일렉트로닉, 현대 음악의 다양한 요소를 따와 펑크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다. 이는 포스트-펑크라고 불리며 상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 했으나 후대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몇몇 펑크 밴드는 디스코의 댄스 리듬과 초기 일렉트로닉 음악의 신시사이저를 받아들여 펑크의 직선성과 댄스 팝의 경쾌함을 조합한 신선한 음악을 했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에서도 유행한 이 장르는 1950~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적 조류 누벨 바그에서 이름을 따와 뉴 웨이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뉴 웨이브는 크게 히트해서 1980년대 팝 음악의 주류 장르 중 하나가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정치적이고 과격하던 런던 펑크의 특성을 받아들여 하드코어 펑크 무브먼트가 탄생하게 된다. 이들은 초기 그 과격성으로 기존의 미국 펑크 록 밴드들과 갈등을 빚었으나, 이후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들은 주류 음악계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해 격렬한 음악을 펼쳐 나갔다. 하드코어 펑크 운동은 이후 '하드코어'라는 하위 장르들을 낳았으며, 빠르고 강력한 사운드를 내는 록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위에 언급된 주요 장르들을 제외하고도 펑크는 많은 장르들의 모태가 되었다. 펑크는 기존의 록 사운드를 넘어서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었다. 1950년대의 로커빌리와 결합해 '사이코빌리'라는 장르가 탄생했고, 포크와 결합되어 '포크 펑크'가 탄생했다. 일렉트로닉을 접목한 펑크 록 뉴 웨이브와 반대로 펑크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전자 음악인 '신스 펑크', '댄스 펑크'가 나타나기도 했다. 펑크에 팝의 멜로디를 결합한 '팝 펑크'는 1990~2000년대에 걸쳐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렇듯 펑크는 후대의 록 음악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고, 이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붐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의 펑크 록[편집 | 원본 편집]

특징[편집 | 원본 편집]

음악적 특징[편집 | 원본 편집]

펑크의 음악적 특징은 1950년대 초기의 로큰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컬,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보편적인 록 밴드 구성을 띄며 보편적인 절-후렴 구조와 4/4박자를 사용한다. 이른바 "3-코드"로 대표되는 간단한 코드 진행을 사용하며 기술적으로 복잡한 기교를 요하진 않는다. 그러나 펑크 록은 기존 로큰롤에 비교하면 빠른 템포와 파워 코드를 유용한 디스토션이 걸린 시끄럽고 거친 기타 리프, 기타, 드럼 솔로의 배제 등의 차이점을 갖는다. 곡의 길이는 대체로 기성곡들에 비해 짧고 구조 또한 반복적이다. 보컬은 별다른 기교 없이 외치듯이, 혹은 읆조리듯이 노래하며 가사는 정치적이며 선동적이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비정치적인 가사라도 대부분은 당대 청년 계층의 입장을 대변하며 냉소적이고 염세주의,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띤다.

일단은 이상이 펑크의 기본적인 특성이지만 이는 정말로 기초적인 특징이고, 이와 다른 펑크 음악들도 많다. 이는 펑크 록의 간단하고 반문화적인 특성 탓에 온갖 장르들과 크로스오버되고 수없이 많은 실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초기 로큰롤을 제외하면 록 음악 중 이렇게 장르 분화가 많이 이루어진 장르는 펑크밖에 없다.

DIY[편집 | 원본 편집]

이들이 대중음악에 끼친 중요한 영향 중의 하나가 바로 DIY(Do it yourself) 문화의 창조이다. 이들은 주류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경로를 통해 성장해 나갔다. 펑크 록이 시작되던 1970년대 중후반 대중음악은 대형 음반사와 음악 잡지, TV, 라디오 등의 거대 자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시기의 뮤지션들은 지역에서 공연하다가 대형 음반사와 계약을 맺어 앨범을 내고, 거대 스타디움 공연과 TV, 잡지 등의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스타로 등극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러니 대중적 취향에 맞는, 즉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음악만이 음반사의 선택을 받아 데뷔할 수 있었고, 마이너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은 이변이 없는 한 음반 한두장 내는 게 고작으로, 그 뒤엔 별다른 활동도 못하고 잊혀져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대의 다른 가수들과 달리 거대 레이블의 도움 없이 스스로 소규모 음반사를 꾸리거나, 혹은 아예 음반사 없이 개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알렸다. 이들은 대형 기획사의 프로모션 없이 전국을 돌며 소규모 공연을 이어나가고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활동했다. 팬들 역시 자체적으로 팬에 의해 간행되는 잡지, 즉 팬진(Fanzine)을 발행하거나 지역, 대학 라디오로 이들의 곡을 알리는 등 자생적 시장을 구축했다. 이는 거대 자본 없이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지속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이러한 대안적 음악 활동이 바로 인디 음악의 시작이 되었다.

시각적 요소[편집 | 원본 편집]

1970년대 Punk 뮤지션들은 머리는 모히칸 헤어스타일 혹은 더벅머리를 하고 찢어진 옷가지와 스터드 박힌 장식, 가죽 재킷을 입고 다녔다. 이런 특유의 패션을 펑크 패션(Punk Fashion)이라고 부른다. 텔레비전의 원년 베이시스트 리처드 헬의 패션에서 유래되었으며 런던 펑크 붐 당시 섹스 피스톨즈의 의상을 맡던 비비안 웨스트우드에 의해 대중에 소개되었다. 본래는 펑크 향유층의 패션으로 펑크 음악과 빠질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나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필두로 한 신예 패션 디자이너들에 의해 미디어에 전파되며 현재는 펑크 음악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각주

  1. 한국어에는 무성 순치 마찰음이 없어 이 둘을 구별하여 표기하기가 난감하다. 일부 한국 평론가들은 구분을 위해 Funk를 "훵크"로 표기하기도 하나 실제 소리와 가까운 표기는 아니다.
  2. 상호 변경이 잦다. 개업 당시에는 Let it Rock이었고, 이후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Seditionaries, World's End 등으로 계속해서 개명되었다.
  3. 몇몇 잡지에서는 순위에 이 음반을 표기하기를 거부하고 1위 칸을 공란으로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