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The Beatles
그룹 정보
나라 영국
장르 팝ᆞ
활동기간 1963년 ~ 1970년
구성원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전구성원
피트 베스트
스튜어트 서드클리프

앞 줄의 네 명. 왼쪽부터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소개[편집 | 원본 편집]

비틀즈는 영국의 전설적인 4인조 밴드이다. 1963년 영국리버풀에서 데뷔하여 1970년까지 활동했다. 멤버는 해체 때(1970년)를 기준으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이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대중음악을 넘어 전 세계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1960년대아직 근대의 색채가 강했던 시대에서 현대 시대로 이끈 사회문화의 지휘자였다.

비틀즈는 대중음악을 영원히 바꿨다는 평가부터 대중음악의 역사는 비틀즈의 등장 전후로 나눈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로, 현대 대중음악의 창세기로 평가받는 등 위대한 음악적 성과를 이루었다.[1][2] 역사 이래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뮤지션으로서, 2001년 기네스북에 가장 많은 음반을 판 것이 인정되어서 등재되었고, 멤버인 폴 매카트니는 음악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 중 세계 최고의 갑부로 뽑혔으며, 2009년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다. 비틀즈는 활동 당시 수익의 97%가 넘는 세금을 정부에 바쳤어야 했다.

저널, 평단, 평론가들 사이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를 뽑으라면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밴드. 데이터 분석 결과,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선정됐다.[1] 음악사로 보면 비틀즈를 기준으로 본격적인 현대 대중음악의 시대가 시작된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모던 팝 시대를 이룩하면서, 문화와 사회도 전반적으로 혁신시켰다고 평가받는다.[3] 정치인들은 비틀즈가 시대를 바꿨다고 언급한다.[2]

음악계를 비롯한, 정치, 사회, 문화,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타임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서 한 명으로 선정됐다.[4]

우리 나라에선 Let It Be와 Yesterday, All You Need Is Love 등의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5년 5월 2일,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의 내한공연이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멤버[편집 | 원본 편집]

음악적 영향[편집 | 원본 편집]

1950년대의 초창기 로큰롤과 초기 R&B의 혼합으로 사장된 로큰롤의 부활을 이끌면서, 기본 로큰롤에서 다채로운 록 음악으로의 진화에 기여하며 거의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쳤으며, 다양한 시도들로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든다. 척 베리와 같은 아티스트들이 로큰롤이라는 신생 장르를 개척하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를 세계적 주류 문화로 끌어올렸다. 이어서 1960년대에 등장한 비틀즈가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과 철학적인 가사, 앨범 전체의 통일적 구성, 타 장르와의 크로스오버,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 등을 통해 이성과의 연애를 주로 노래하던 기존 대중음악계를 보다 다양한 예술적인 장르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이러한 성취는 록 음악의 각종 하위 장르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대중음악 장르들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하고 영향을 주었다. 비틀즈는 대중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대중음악의 예술성을 끌어올리며 문화적으로 합법화시켰다. 1963년 12월, 타임즈에서 클래식 평론가 William Mann이 비틀즈에 대한 감사 인사 등을 썼을 때, 당시 영국 신문의 '예술 섹션'에서 처음으로 대중음악이 노출된 것이었다. 비틀즈는 1966-67년 동안 저널리스트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중음악과 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주요 현상이었으며, 전용 언론의 출현, 문화 주류에서 진지한 보도가 동시에 발생했다. 음악 평론가 팀 라일리는 비틀즈를 "매우 복잡한 예술"을 대표하는 대중음악 최초의 레코드 아티스트로 식별했다. 비틀즈는 대중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꿨다고 평가받고 있다.[3]

비틀즈의 명반 중 하나인 Rubber Soul앨범 자체가 통일성을 이룬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된 현대 대중음악계의 최초의 사례였다. 여기서 현대 대중음악의 최초라는 뜻은, 재즈와 영화 사운드 앨범을 제외해서 뜻한다. 이렇게 싱글곡 기준이었던 기존의 대중음악계에 예술성을 이룬 앨범으로 파란을 몰고오며 당시 활동하던 다른 뮤지션들에게 큰 자극을 주며 그들도 싱글곡 위주가 아닌 명반 제작에 몰입하게 되는데, 이렇게 앨범시대를 개막하며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집었다. 앨범 기준의 작품 활동을 대중음악계의 질서로 잡은 것이었다.

그렇게 음악 창작 활동을 앨범 위주로 만들면서, 앨범 커버 또한 중요성을 부각하게 한다. 그동안 그저 표지에 지나지 않았던 앨범 커버에 신선한 시도들을 도입하면서 앨범 커버의 예술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비틀즈의 시도들은 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도 악기인 시타르를 처음 서양 대중음악에 시도하였고 여러 악기를 대중음악에 최초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이런 여러가지 악기들을 비롯하여, 백마스킹 등 여러 신기술들을 레코딩에 도입하였다. 특히 인도 악기인 시타르를 비롯해 인도 음악이나, 동양 불교의 선 사상 등을 서양 대중음악에 융합하기 이르며 역사상 대중음악사 최초로 동양과 서양의 융합을 이루어낸다. 대표적으로 그들이 탄생시키고 정립한 사이키델릭 록이 대표하는 사이키델릭 장르가 있다.

그리고 그동안 포크 음악계를 제외하곤, 단순하거나 그저 연애만 노래했던 대중음악계에서의 노래 가사에도 혁신을 일으킨다. 사회, 인생, 평화, 사상등 여러 주제로 또한 여러 방식의 작사 방식으로 대중음악계의 가사 형식에 혁신을 불러왔다. 비틀즈의 노래들은 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중음악사 최고 역작으로도 불리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당시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의 인식을 모든 세대에게 전환하게 만든 작품으로 불린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현대 대중음악사에서 성별,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장르를 보편적으로 즐기게 만든 것은 페퍼 상사가 최초였다.

1960년대 미국 음반의 시장의 최고 60% 이상의 판매고를 보이면서, 대중음악 시장에 그동안 유래없던 대호황을 불러오며 음악 시장에 폭발적인 성장을 일으킨다. 게다가 당시는 테이프나 CD도 아닌 LP가 유행하던 시기인데, 테이프나 CD에 비해 몇배나 비쌌던 점을 생각하면 가히 놀랍지 않다 할 수 없다.

뮤직비디오 또한 비틀즈가 1966년 최초로 시도하면서[5] 이후로 기본적인 음악 영상에 여러 기법을 도입하며 현대 뮤비의 프로토 타입을 구성한다. 그리고, 또 다른 비틀즈의 명반 Revolver부터 각종 실험적인 기법을 적용하면서 실험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정치, 사회에 미친 영향[편집 | 원본 편집]

비틀즈는 아직 냉전 시기 당시에, 공산권에서 자유주의 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이자 상징으로 취급받으면서, 공산주의의 폐쇄적이고 반서구, 독재적인 체제를 부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비틀즈가 공산주의를 죽였다"[4]라는 말부터, "소련은 비틀즈가 망하게 했다"는 말까지 다양하다. 당시 소련 정부등은 비틀즈를 막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5] 통일부 블로그에서도 대략 간추린 설명이 나와있다.[6]

사회 운동에도 각종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으로 68 혁명으로도 불리는 68 운동이 있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레논의 이름을 딴 레논 벽은 그 자체가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가 되면서, 체코의 공산당 정부를 부수게 만들었으며 현재에 와서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통하고 있다. 이 레논 벽 활동은 21세기에 들어서 2019년에도 등장한다.

인종차별 완화에도 큰 활약을 한다. 비틀즈가 공연을 다니며 활약하던 1964~66년대 당시는 인종 분리가 아주 당연한 시대였는데, 이때 비틀즈는 음악 역사상 최초로 인종 분리석을 금지시킨다. 그전까지 인종 분리석에 대항하며 공연을 거부했던 음악가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뜻이 통한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비틀즈가 최초로 이 인종 분리석을 깨부셨다. [7] 이러한 비틀즈의 행동은 음악계에 새로운 양심을 부여했다고 평가받으면서 극찬을 받았다. 또한, 그외에도 여러가지 행동을 하면서 흑인 인권에 힘썼다. 이것은 해체한지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폴 매카트니 등 개별 멤버들도 인권 운동을 하며 모범을 보이고 있다.

특히 멤버들중 존 레논은 흑인 인권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인종차별 대한 거부 성정이 격했는데, 이는 그의 아내 오노 요코가 아시아인에 일본인이어서 더욱 그런 것으로 판단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에 끝났는데 1960년대에 아시아인종에다 일본 국적이라면.. 더 무엇을 설명하겠는가?

1960년대 반문화의 리더로서 사회, 문화 전반에 여러가지 영향을 주었다.[8] 개인에 대한 존중, 인간의 성, 여성의 권리, 전통적인 권위 방식에 대항, 같은 사회인으로 평등,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권리,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실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다른 해석 등에 따라 시대 정신이 흘러갔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많은 주요 운동들은 1960년대 반문화권 내에서 시작되거나 발전되었다. 이 당시 비틀즈는 반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환경주의 사상 또한, 이 시기에 반문화의 도움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1960년대 당시에 영국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당시 비틀즈에 부여된 세금은 수입의 96~97%로 어마어마했다. 지금 폴 매카트니의 재산이 1조 5천억원을 넘는 것으로 판단했을때, 엄청 났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제2의 디트로이트 전철을 밟던 영국의 리버풀도 비틀즈 덕분에 새롭게 관광도시로 탈바꿈하며 크게 재성장했다.

문화에 미친 영향[편집 | 원본 편집]

문화계에서 이룩한 업적 또한 엄청났다. 현재에 와서는 근대로도 불리는 1960년대는 시대적으로는 현대로도 포함되나, 꽤나 근대적인 문화 시대였다. 비틀즈가 1964년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켜 그들의 음악, 머리, 패션, 태도, 표현 등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만들어 사회, 문화계가 전체적으로 자유롭게 변하며 현대적인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다.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이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9][10]

세부적인 영향을 분석해본다면, 패션에서는 타임지 선정 올타임 100대 패션 아이콘 중 하나로서[6] 당대부터 지금까지도 패션업계가 여러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가장 크게 특정 스타일이나 의류 등을 보편화시킨 뮤지션으로 언급되면서, 현대 정장 스타일을 형태화했고, 터틀넥 스웨터 유행에 업적이 있으면서 캐주얼 스타일 등을 유행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들의 60년대 후반기 패션도 당시 큰 사회적 운동 중 하나였던 히피 운동에 큰 영향을 주면서, 패션계에 여러 영감을 주었다. 존 레논은 2020년대 지금도 패션 아이콘으로 종종 회자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당대부터 리처드 포이리에같은 문학 비평가들이 후반기 비틀즈의 노래 등을 분석하며 사회적인 열기를 띄었었고, 현재에 와서도 비틀즈의 노래 등은 시의 저수지다, 문장의 광산이다 등 여러 찬사를 받으며 지금도 문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7]

영화계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그들의 1964년작 영화인 A Hard Day's Night타임지 100대 영화 중 하나로, 주크박스 영화의 시민 케인, 팝 음악 영화의 형식을 영원히 바꿨다는 찬사 등을 받으며 영화계의 중요한 고전으로 남아있다.

히트곡[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