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은 1960년대 후반에 탄생해 1970년대에 유행한 음악의 장르이다. 기존의 록 음악에 재즈, 클래식 등의 다른 장르의 요소를 결합하여 록의 저변을 크게 확장시켰다. 1970년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기원[편집 | 원본 편집]

1960년대 비틀즈의 등장 이후로 대중음악계에서는 수없이 많은 록밴드가 등장했다. 이들은 주로 사이키델릭 록 장르의 음악을 했는데, 이 사이키델릭 록이 프로그레시브 록의 직접적인 시초로 평가받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들은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아 약물, 동양 사상등에 심취해 있었고 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을 했는데, 이 실험들은 후대의 프로그레시브 록 계열에 그대로 흡수된다.[1] 재즈에서도 프리 재즈, 아방가르드 재즈 등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들이 등장하고, 다양한 음악 장르와의 크로스오버가 시도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훗날 프로그레시브 록의 장르 파괴/결합적인 성향과 재즈적 연주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던 음대 학생들 역시 당대 유행하던 신생 장르 록에 뛰어들었는데, 이로 인해 클래식에 영향받은 구조가 나타난다. 팬층에서는 이렇게 장르 탄생 이전의 프로그레시브적 요소가 들어간, 그래서 후대의 프로그레시브 록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음악을 프로토-프록(Proto-Prog)이라 부른다. 프로토 프록은 엄밀히 말해 프로그레시브 록은 아니지만, 장르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음악으로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 계통의 음악으로는

등이 있다.

탄생[편집 | 원본 편집]

이렇듯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록 음악의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함께 프로그레시브 록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가들이 서서히 활동을 시작했다. 시드 바렛을 중심으로 한 핑크 플로이드는 기존 사이키델릭 록과는 다른 신선한 음악을 들고 나와 주목을 받았고, 예스가 슈퍼밴드 크림의 고별 공연에 오프닝 밴드로 참여해 이름을 알렸다. 제네시스 역시 음반사와 계약해 첫 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은 신선한 면모가 있긴 했지만 아직 기존의 록, 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리고 1969년 10월 10일,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명반이 등장한다. 바로 킹 크림슨의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이 음반은 사이키델릭 록을 기초로 해서 재즈, 클래식, 아방가르드, 하드 록, 블루스 등 당대의 음악 장르들을 모두 끌어담은, 밴드의 첫 음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엄청난 완성도로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2] 이 음반의 발매 이후 수많은 밴드들이 앞다투어 이 음반처럼 다양한 장르를 접목한 복잡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했고, 음악 평론가들이 이를 두고 기존 록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은 진보적인(Progressive) 록이라 정의하면서 프로그레시브 록이 탄생하게 된다.

전성기[편집 | 원본 편집]

킹 크림슨의 "In the Court of..." 이후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핑크 플로이드, 예스, 제네시스 등 프로그레시브 성향을 갖고 있던 기존 밴드들이 본격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뮤직을 시도했고,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카멜, 르네상스, 반 데어 그라프 제너레이터 등 프로그레시브를 추구하는 밴드들이 속속들이 등장해 1970년대 중반까지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선구자 킹 크림슨리더 로버트 프립의 인성으로 인한 끊임없는 불화와 멤버 교체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음악적 성향과 탄탄한 구성으로 연이여 역사적인 명반을 쏟아냈고 예스는 짜임새 있는 곡 구성과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연주력으로 명반들을 뽑아냈다. 제네시스는 보컬 피터 가브리엘을 필두로 프로그레시브 록 기타의 전설 스티브 해켓과 천재 드러머 필 콜린스를 영입해 특유의 시에트리컬 록(Theatrical Rock) 성향을 뿜어냈고,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는 당시 대중 음악에 서서히 알려지고 있던 무그 신시사이저를 적극 도입해 클래식 음악에 강하게 영향받은 특유의 음악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는 리더 시드 바렛이 약물 중독으로 탈퇴했지만 이후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뱡향 전환, 록 역사에 남는 전설적인 명반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비롯해 명반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음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3]

그 외에도 포크와 클래식에 영향받은 제스로 툴르네상스, 서정성을 추구한 카멜, 탄탄한 연주력의 젠틀 자이언트, 목가적인 바클리 제임스 하베스트, 기타를 배제하고 관악기와 건반을 주로 사용한 전위적인 반 데어 그라프 제너레이터, 19살의 나이로 단 혼자서 데뷔 앨범을 제작한 마이크 올드필드 등 수많은 명 아티스트들이 등장했으며, 켄터베리 지역의 뮤지션들은 프로그레시브 록과 재즈를 조합한 켄터베리 신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에서 상업적/비평적으로 성공한 밴드가 끊임없이 나타났고 팬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명반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는 영국을 넘어 전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독일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제네시스예스의 영향을 받아 연극적이고 장중한 음악을 추구하면서도 이탈리아 음악 특유의 서정성을 결합해 록 프로그레시보 이탈리아노(Rock Progressivo Italiano)[4]라 불리는 특유의 음악성을 완성했으며, 독일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신시사이저를 넘어 대부분의 악기를 전자 악기로 구성해 반복적인 선율로 곡을 구성하는 전위적인 크라우트록(Krautrock)[5]을 추구했다. 크라우트록은 훗날의 일렉트로니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록 프로그레시보 이탈리아노의 주요 아티스트로는 프레미아타 포르네리아 마르코니, 뉴 트롤스 등이 있으며 크라우트록의 주요 아티스트로는 크라프트베르크, 노이!, , 탠저린 드림 등이 있다. 이 두 나라보단 못해도 다른 유럽 국가들도 훌륭한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을 낳았는데, 그리스에서는 훗날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반젤리스가 소속되었던 아프로디테스 차일드가 국민 밴드급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에서는 마니아들에게 컬트적인 반응을 얻은 쥴(Zeuhl) 장르의 창시자 마그마가 등장했다.

또다른 주요 록 시장인 미국에서는 의외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물론 핑크 플로이드 정도는 큰 대중적 성공을 거뒀지만 다른 밴드는 영국, 유럽시장에서의 반응에 비하면 영 시원찮은 반응을 받았다. 유명한 뮤지션들도 그리 많지 않은데, 록 계의 괴짜 프랭크 자파가 더 마더즈(The Mothers)라는 밴드를 결성해 음반을 세 장 냈고,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결합한 캔자스, 스틱스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다. 캐나다에서는 비틀즈가 이름을 바꿔 재결합했다는 소문이 돈 클라투와 훗날의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단초를 제공한 러쉬가 유명세를 탔다.

쇠락[편집 | 원본 편집]

이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프로그레시브 록의 인기는 70년대 후반 들어 급속도로 하락하게 된다. 시장이 과포화되면서 지나치게 어려운 음악이 된 것이다. 아티스트들은 "점점 얼마나 장대한 곡을 만들 것이냐", "얼마나 난해한 구성을 띌 것이냐", 또는 "얼마나 전위적인 연주를 할 것이냐" 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곡들이 점점 난해해지는 것은 대중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것과 동시에 평론가들의 등도 돌리게 했다. 난해한 곡을 잘 소화해내면 모를까, 상당수의 밴드들은 지나치게 스케일이 커진 곡을 버티지 못하고 자멸해버리기 일쑤였다. 멤버들의 불화 역시 문제였다. 곡들이 난해해질수록 밴드 내의 의견충돌은 심해졌으며, 상당수의 밴드들이 불화로 인한 잦은 멤버 교체를 겪었다. 이는 자연히 밴드의 음악적 밸런스를 붕괴시키게 되었다. 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중심 격의 멤버 한두 명이 음악적 권한을 독차지하는 형태가 되었으며, 중심 멤버의 음악적 부담은 매우 커졌다. 가뜩이나 난해해진 프로그레시브 록에서는 중심 멤버가 아무리 천재라도 혼자서 훌륭한 음반을 만들기는 어려웠고, 음반들은 나오는 족족 연거푸 혹평을 받았다.

예스는 보컬 존 앤더슨이 주도한 20분짜리 대곡 4곡이 수록된 야심찬 앨범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을 발표했지만 평단의 혹평과 함께 드러머 빌 브루포드와 건반의 릭 웨이크먼의 탈퇴를 부르게 된다. 킹 크림슨은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과 멤버 간의 끊임없는 불화로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했고, 제네시스는 75년 보컬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한다. 지나친 음악적 독재로 다른 멤버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었다.[6]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는 73년 앨범 "Brain Salad Surgery" 이후 멤버들의 창작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핑크 플로이드만이 이른바 "프로그레시브 록 5대 밴드"의 이름값을 하고 있었으나 이쪽도 실질적으로 베이시스트 로저 워터스의 일인독재 체제가 되어 있었다.

70년대 후반 프로그레시브 록의 음악적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영국은 사회 불안과 세대, 인종 갈등에서 비롯된 펑크 록의 열풍이 시작된 상태였고, 지루한데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소리만 하는 프로그레시브 락은 "부르주아 록"이라 불리며 젊은이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대중음악 산업이 상업화되고 확대됨에 따라 난해하고 대곡 위주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자연스럽게 외면되었다. 음악 신 내부의 불화, 그로 인한 끊임없는 질적 하락, 대중의 외면은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의 침체를 가져왔다. 1985년,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가 멤버들의 반발로 탈퇴하면서 프로그레시브 록은 완전히 메인스트림에서 물러난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80년대, 주류 음악에서 벗어난 이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의 상당수는 해체했지만, 많은 밴드들이 살아남았다. 남은 밴드들은 장르를 , 뉴웨이브 등으로 바꾸면서 곡의 구조 등에 프로그레시브적 요소를 집어넣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올드팬들에게는 까였지만 밴드에게 기존에 이루지 못한 상업적 성공을 이루어 주었다. 이렇게 성향을 바꾼 밴드들로는 예스[7], 아시아,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등이 있다. 이 변화는 기존 팬덤에게는 고깝지 않게 여겨졌지만 팝 음악 안에 프로그레시브 성향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에 의의가 있으며, 이후 90년대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마릴리온, IQ로 대표되는 네오 프로그레시브(Neo-Progressive) 장르의 토대가 된다.

한편 70년대에 러쉬가 시도했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헤비메탈의 조화는 이후 계속해서 명맥이 이어져 오다가 80년대 후반 드림 시어터라는 걸출한 밴드의 등장으로 프로그레시브 메탈(Progressive Metal)로서 정립되게 된다. 전성기 이후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끈 몇 안 되는 프로그레시브 계통 음악. 그러나 70년대 유행한 프로그레시브 록과 현대의 프로그레시브 메탈과의 연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팬층도 있다. 이는 아래의 '정체성 논란'에서 후술. 여기서 시작한 밴드가 종종 커리어를 이어가며 점차 메탈 색이 빠져서 프로그레시브 록이 되버리는 경우도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탄탄한 마니아 층이 있으며 전 세계에서 꾸준히 새로운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있다. 음악적인 특징으로는 다른 장르와 크로스오버된 크로스오버 프록(Crossover Prog)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 유명한 현대 아티스트로는 포큐파인 트리=스티브 윌슨, 오페스[8], 빅 빅 트레인 정도가 있다.

정체성 논란[편집 | 원본 편집]

프로그레시브 록이란 장르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영원한 떡밥이다. 일단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애매하고 명확히 기준짓기 어려운 단어이다. 일단 "70년대에 유행한 복잡하고 클래식과 재즈에 영향받은 전위적인 록음악"을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하는 건 대체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의 프로그레시브 락이 무엇인지는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 그냥 "70년대 전성기에 유행한 형식의 노래"만을 프로그레시브 록이라 인정하는 부류, 이후의 뉴웨이브/팝에 가까운 밴드까지 포용하는 부류, 프록 메탈, 네오 프록 등의 프로그레시브 록에 영향받은 장르까지 인정하는 부류, "프로그레시브"에 걸맞게 시대에 비해 진보적인 음악이라면 몽땅 다 프로그레시브 록이라 부르는 부류, 프로그레시브 록 그딴 거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 그냥 자기가 프로그레시브 록이라 부르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부류(...)까지 다양하다. "진보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디에나 갖다붙이기 쉬운데다 워낙 장르 자체가 포괄적이라 생기는 논란. 결론적으로는 딱히 답은 없다. 일단 많이 들어보고 무엇이 "프로그레시브"인지 판단하자. 프록아카이브의 장르 구분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이게 다 쓸데없이 프로그레시브라는 단어를 붙인 평론가 놈들 때문이다.

각주

  1. 비단 프로그레시브 록 뿐만이 아니라 이 때의 음악적 실험들이 뒷날의 대중음악계 전체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봐도 좋다.
  2. 한국에서는 이 음반이 차트에서 비틀즈의 Abbey Road를 1위에서 끌어내렸다는 말이 돌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 음반의 최고 순위는 5위.
  3. 언급된 이 다섯 밴드들을 흔히 프로그레시브 록의 5대 밴드라고 한다.
  4. 별 뜻은 없고 그냥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뜻이다.
  5. 독일 채소절임 요리 자우어크라우트에서 유래된 독일인 비하명칭 "크라우트"에서 유래. 사실 좀 모욕적인 단어다. 한국 록더러 김치록이라 부르는 꼴
  6. 이후 제네시스는 드러머 필 콜린스를 주축으로 80년대를 평정하는 팝 밴드로 거듭난다.
  7. 앨범 "90125"의 타이틀곡 Owner of a Lonely Heart로 빌보드 TOP 1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8. 프로그레시브 메탈에서 메탈 색이 빠져 프로그레시브 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