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램 록

글램 록(Glam Rock)은 1970년대 초~중반에 영국에서 유행한 록 음악의 장르이다. 전위 음악부터 1950년대 팝까지 융합된 절충적인 음악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큰 인기를 끌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 쇠퇴하였다. 후대의 전반적인 대중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글램 록은 1970년대 들어 록 음악의 장르 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무렵에 탄생되었다. 시작은 티렉스(T.Rex)였다. 티렉스는 결성 당시에는 티라노사우르스 렉스(Tyrannosaurus Rex)라는 이름의 평범한 무명 사이키델릭 록/포크 록 밴드였지만 1970년 개명 이후 화려한 일렉트릭 기타 리프와 부드러운 가성의 코러스, 중독적인 팝 멜로디를 엮은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여 단숨에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71년 3월 티렉스는 BBC의 유명 음악 프로그램 '탑 오브 더 팝스(Top of the Pops)'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밴드의 리더 마크 볼란(Marc Bolan)은 짙은 화장에 번쩍이는 무대의상을 입고 등장해 밴드의 히트곡 『Hot Love』를 불렀다. 이를 본 언론들이 앞다투어 그의 외견과 음악을 두고 "매혹적이다(Glamorous)"라고 평하면서 글램 록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볼란의 이 같은 시도는 기성세대들의 멸시를 받았으나 젊은 층에게는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밴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티렉스 신드롬이 전 유럽을 강타하게 된다. 같은 해 발매된 티렉스의 앨범 《Electric Warrior》는 글램 록의 선구자격 음반이 되었다.

티렉스의 대성공 이후, 글램 록을 표방하는 아티스트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그 중 데이비드 보위는 글램 록을 단순히 '티렉스 풍의 록 음악'이 아닌 당대 대중음악에서 가장 혁신적인 장르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마크 볼란과 동료 관계였던 보위는 이미 음악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1969년 《Space Oddity》를 히트시키기도 했던 뮤지션이었다. 그는 단순한 화장과 무대의상을 넘어서 티렉스를 비롯한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기 팝샹송 등의 음악적 모티브, 앤디 워홀마를렌 디트리히 등의 문화계 아이콘들과 조현병을 앓던 자신의 이복형에 대한 기억, SF적 상상력을 결합해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라는 음악적 페르소나를 만들어냈다. 지기 스타더스트의 탄생과 몰락을 그린 데이비드 보위의 1972년작 컨셉트 앨범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은 글램 록의 상징적인 음반임과 동시에 대중음악 역사에 남을 걸작으로 회자된다. 이 앨범의 발표 이후 보위는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이 뒤 글램 록의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첫째는 이전의 글램 슈퍼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기조를 따르는 것으로, 보다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들은 각종 분장과 파격적인 의상, 화려한 무대 장치 등을 통해 단순히 '듣는' 음악이 아닌 혁신적인 종합 예술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경향의 아티스트들은 종종 아트 록과 결합되었으며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면모도 보여주기도 했다.

둘째는 기존의 록 음악의 기조를 따르되 글램 록의 시각적 요소만을 차용해오는 것이다. 이 밴드들은 외양상으로는 전자와 닮았지만 실제로 지향하는 음악은 완전히 달랐다. 이들은 대체로 당시 유행하던 하드 록에 기반한 단순하고 직선적인 록 음악을 선보였다. 글램 록적인 외양이나 무대 효과를 사용했지만 어떤 예술적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눈요기 식의 쇼에 가까웠다. 이렇듯 두 부류의 흐름이 나뉘었지만, 양측 모두 "글램 록"으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1973~1975년 무렵 글램 록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많은 글램 록 아티스트가 차트 위를 종횡무진했고,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음악에 글램 요소를 집어넣거나 아예 글램 록커로 변신했다. 글램 록은 단순히 음악 장르가 아니라 영국 문화계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글램 록의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1976년 이후 글램 록의 인기는 뚜렷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글램 록을 추구하는 밴드들이 너무 많아졌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형편없는 음악성을 글램 록의 화려한 비주얼로 가리려는 재능없는 밴드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과잉된 퍼포먼스 경쟁은 대중들이 글램 장르 자체를 싫증내게 만들었다. 잇따른 미국 진출 실패도 인기 하락의 원인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많은 글램 록 밴드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대부분이 처참한 성적표로 귀환했다. 보수적인 미국 대중에게 글램 록은 "복장 도착자들의 변태적인 저질 음악" 정도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데이비드 보위를 비롯한 많은 뮤지션들이 글램 록의 한계를 느끼고 장르를 갈아타게 되고, 글램 록의 하락세는 더욱 가속된다. 1977년 9월 16일, 티렉스의 마크 볼란이 교통사고로 인해 향년 29세로 요절한다. 같은 해 섹스 피스톨즈를 중심으로 런던펑크 록 혁명이 불어닥치며 글램 록의 시대는 끝을 맞이하게 된다.

1970년대 이후 글램 록은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났지만 그 영향력은 후대의 대중음악에서 꾸준히 나타난다. 직접적으로는 고딕 록의 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에는 메탈과 글램 록이 결합된 글램 메탈이 뒤늦게 미국 시장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등장 이후에도 글램 성향을 가진 밴드들이 드물게나마 등장하고 있다.

특징[편집 | 원본 편집]

음악적으로, 글램 록은 뚜렷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은 없다.[1] 글램 록으로 분류되는 밴드의 성향 역시 자세히 들어보면 각각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글램 록을 굳이 음악적으로 정의내리자면 기타 사운드가 주도하는 유려한 멜로디의 팝 록이라 부를 수 있다. 당시에 유행하던 하드 록의 리프와 사운드를 받아들였지만 하드 록처럼 강하고 빠른 연주가 아니라 간결하고 귀에 잘 들어오는 기타 리프 중심의 곡을 썼다. 멜로디 파트가 중시되었는데 1960년대의 버블검 팝[2]과 1950년대 유행하던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와 같은 스탠다드 팝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유려한 팝 멜로디를 구사했다. 이러한 특징은 최초의 글램 록 밴드인 티렉스부터 이후의 많은 밴드들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기본적인 공통점을 제외하면 글램 록 밴드들의 음악은 한 데 묶기가 힘들다. 티렉스와 데이비드 보위 이후 글램 록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뉘는데, 크게 록시 뮤직, , 스팍스 등 글램 록을 기반으로 예술적 접근을 시도한 계열과 슬레이드, 게리 글리터[3], 베이 시티 롤러즈 등 좀 더 단순하고 대중적인 글램 록을 하던 계열로 구분된다.[4] 전자에 속하는 음악가들은 장르 파괴적이고 실험적인 성향을 띠며 자신들의 예술적 페르소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다양한 소재를 음악에 녹여내었다. 후자에 속하는 음악가들은 대체로 글램 록의 기본에 충실한 음악을 했으며 종종 하드 록이나 펑크 록에 가까운 거친 음악을 보이는 밴드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기존 로큰롤처럼 , 마약, 섹스를 음악의 소재로 썼으며 몇몇 곡은 지나치게 저속한 가사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평단의 평가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은 대체로 전자를 높게 치지만 후자도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1980년대 글램 메탈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 일단은 음악적 성향을 따지자면 이렇게 나눌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예술적 성향이라 불리는 글램 록 밴드도 단순하고 거친 곡들을 많이 냈으며 대중적이라 불리는 밴드 중에서도 슬레이드처럼 높은 음악적 성취를 올리는 뮤지션이 있는 등 글램 록 내부의 성향은 딱딱 정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글램 록을 상징하고, 다른 록 음악과 차별화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비주얼이었다. 글램 록은 팝 아트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글램 로커들은 오페라 등의 공연 예술과 오컬트, 포르노그래피, 고전 SF낭만주의 사조, 1930~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여배우들을 조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글램 록은 화려하고 번쩍이는 의상, 진한 화장과 염색, 거대한 무대 장치 등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모습으로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들의 양성적인 이미지는 기존의 성역할을 뒤흔들었고 대중에게 성소수자의 존재를 각인시켰다.[5] 글램 록의 '페르소나'라는 형태로 음악가 개인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분리시키고, 음악만이 아닌 다양한 시각적 요소로 표현 방식을 확대하는 시도는 이후의 대중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글램 록은 당시 미국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영국의 글램 열풍에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도 조브리아스, 뉴욕 돌스[6] 등의 글램 록 아티스트들이 등장했지만 약간의 관심만 끌었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에서 건너온 뮤지션들 역시 실패를 맛봤다. 글램 문화를 보수적이었던 70년대 미국 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미국은 글램 록의 양성적이고 탐미적인 면모를 제거하고 호러 문화를 결합한 앨리스 쿠퍼, 키스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글램 록은 1980년대 초반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글램 메탈로서 부흥하게 된다.

각주

  1. 존 레논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에 대해 간단하게 "립스틱을 좀 더 바른 로큰롤"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2. 주로 10대들을 겨냥해 제작되는 밝은 분위기의 단순한 팝 음악
  3. 1970~1980년대에 걸쳐 큰 인기를 끈 뮤지션, 글램 록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인 글리터 록(Glitter Rock)은 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97년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음악계에서 매장되었다.
  4. 이들을 구분할 때는 하이 글램(High Glam)과 로우 글램(Low Glam)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잘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5. 일부 보수적 언론에서는 이들을 아예 "게이 록"이라 칭하며 멸시했다.
  6. 이들은 펑크 록에 가까운 거친 음악을 했으며 이들의 매니저였던 영국인 말콤 맥라렌은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섹스 피스톨즈를 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