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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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양화진.JPG
외국인 묘지공원에서 잠두봉 방항으로 바라본 양화진의 모습
건축물 정보
주소 서울 마포구 토정로 6 (합정동)
소유 외국인묘지공원 :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재단
천주교측 성지 :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지면적 35,548 m2
문화재 정보
종목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수상교통
지정일 1997년 11월 11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잠두봉(蠶頭峰)과 주변에 있었던 양화(楊花)나루터, 그리고 개신교측 선교사들이 주로 매장된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 일대를 의미한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잘라낸 곳이라고 하여서 절두산(絶頭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사적으로 지정된 부분은 한강변의 양화나루터부터 시작하여 천주교 성지를 지나 외국인 묘지공원에 이르는 생각보다 꽤 넓은 영역이 함게 묶여서 지정되어 있다.

절두산 성지[편집 | 원본 편집]

병인박해 당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소로 이쪽 양화진이 이용되었다. 원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은 서소문 밖이나 용산쪽의 새남터[1]에서 주로 집행되었지만, 유독 병인년의 처형은 죄다 이쪽에서 집행되었는데 이는 병인양요 때 양화진까지 침략해 들어온 프랑스 함대를 의식한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계속해서 이곳에서 처형을 집행한 것은 아닌데, 기록을 보면, 1867년 음력 8월 2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절두산에서 참수당한 신자들의 예를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아울러 1868년 윤 4월 7(음력)일부터는 다시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 함대가 올라온 곳에서 하는 조정 차원의 퍼포먼스였던 셈.

실제로 병인박해 당시 처형된 신자들이 모두 이쪽에서 처형당한 것은 아니며, 서울시내에서 순교한 466명의 신자 중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기록은 2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무명순교자의 숫자를 감안하여 보면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는 모두 2,800여명 정도로 추산되며,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명 신자들의 숫자를 모두 감안하였을 때 최대 180명 내외로 추산된다.

해방 이후에는 1966년 천주교에서 잠두봉을 중심으로 성당과 기념관을 세웠고 주변 지역을 공원으로 꾸몄다. 성당과 기념관 안에는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 천주교와 관련된 조선시대 후기 학자들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광장 안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남종삼의 동상과 사적비가 있다.

서울 외국인묘지공원[편집 | 원본 편집]

1860년에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조성된 곳으로 한국의 근현대사와 연관이 있는 외국인 인사들이 다수 매장되어 있다. 대략 38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 개신교 선교사의 묘지가 120기 정도, 미군 묘지가 60여기, 한국인 묘지가 23기가 있다. 선교사나 군인이 아닌 경우가 60여기, 직종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70여기쯤 되며, 개신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한국인이 여기 매장된 경우도 있다.(개중에는 뜬금없이 프리메이슨의 표식이 새겨진 비석도 보인다) 국적별로는 14개국(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프랑스·독일·이탈리아·벨기에·러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필리핀·일본·대한민국)의 묘지가 있다.

외국인 묘지에 묻힌 인물 가운데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한말 〈대한매일신보〉를 간행한 영국인 베델, 한국의 독립을 위해 크게 노력한 헐버트 등이 있고,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버슨, 베어드, 홀, 게일, 쇼, 테일러, 윔스 등은 가족 묘지를 이루고 있다. 한말 고문관 그레이트하우스와 르젠드르,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 성공회 주교 터너, 한국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 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가톨릭 신자로는 한말 군악대를 창설하고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에케르트, 에케르트의 장녀와 결혼한 한말 법어학교[2] 교사 마르텔 등이 묻혀 있다.

천주교 성지는 소유권이 명확하고 관리도 꽤 확실한 반면, 이쪽 개신교 구역은 여러 단체들의 소유권 분쟁을 겪기도 하였으며 2010년 이전까지는 관리도 대충대충 되던 구역이었다. (천주교는 교파가 없이 전세계적으로 단일교회이고 확실한 위계질서에 순명[3]해야 하는 반면, 개신교는 교파들이 무척 많고 위계질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법원 판결로 소유권이 어느 정도 명확해지고 관리도 많이 이루어져 이후로는 상당히 깔끔해진 편이다. 다만 정체불명의 외국인 무덤이나 한국인의 무덤은 가능한 이장을 권고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잘 안 되는 모양. 이는 애초에 이곳이 버려지다시피 한 기간동안 한국 개신교회가 그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이 크다. 또한 이 곳은 엄밀히 따지면 개신교 단독의 성지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에 와서 살던 외국인들의 흔적인 외국인묘지이다.

교통편[편집 | 원본 편집]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나와 양화진길을 따라 당산철교 방면으로 7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1. 새남터에서는 주로 사제들이 순교했다.
  2.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학교
  3. 교황, 교구장 주교, 각국 주교들의 모임인 주교회의, 수도회의 장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