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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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宇朝. 호는 소벽(少碧), 본명은 양명진(楊明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7년 3월 29일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아버지 양기빙(楊基氷)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덟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08년 평안남도 강서군으로 이주했다.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학교에 다녔고 기독교 장로회 신자가 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무렵에 강명화(姜明化)의 넷째 딸 강봉강(姜鳳姜)과 결혼했다.

양우조의 장인인 강명화는 1905년 가족과 함께 노동이민으로서 하와이에 이주한 뒤 그곳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궈내 사업가로 성장한 뒤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에 당선되고 1913년에 안창호흥사단을 설립할 때 평안도 대표 창립발기위원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강명화는 사위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권유했고, 양우조는 이를 받아들이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17년, 양우조는 미국으로 유학가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 무렵 일제는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한인들을 막기 위해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로 하여금 미국행 배편을 기다리는 한인들을 체포해 국내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대한인 국민회는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현금 200달러가 필요하다고 공지했기 때문에 이 돈이 마련될 때까지 상하이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우조는 여러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고 박달학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하는 동시에 여권을 마련하면서 출국할 때를 기다리다가 1917년 10월 중순 '콜롬비아' 선에 탑승해 상하이를 떠나 11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지만 미국이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한 후 '전시입국규정'을 반포해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했기 때문에, 그는 한동안 배에 묶여 있다가 상공부에 청원한 끝에 다른 6명의 학생들과 함께 12월 13일에 상륙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배에서 내린 양우조는 국민의무금 5원을 내고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 이후 그는 일자리를 구해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하는 동시에 학업에 몰두했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초등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했다. 항구에서 노동일을 하기도 했고, 겨울방학엔 알래스카 탄광에서 일했으며, 여름방학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해야 했다.

그가 집필한 <제시의 일기>에 따르면, 이렇듯 힘겨운 삶을 살던 어느 날 한국에 다녀온 미국 선교사의 강연에 참가한 그는 선교사로부터 한국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말을 듣고는 "내 손으로 동포들을 입혀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방직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친구 최희송에게 면방직을, 오정수에겐 공장을 가동시킬 전기학을, 오천석에겐 직원 자녀를 교육시킬 교육학을 공부하라고 권하고, 자신은 1924년 매사추세츠주의 뉴벳포드 직조학교에 입학했다.

양우조는 미국 유학생들의 모임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고무된 유학생들은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학생회를 규합해 유학생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통일기관을 결성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20년 4월 6일 학생총회 결성대회가 소집되었지만 아직 학생 다수가 연락되지 못해 총회를 결성하지 않고 총회결성 발기자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양우조는 시카고 지방 대표로서 발기회에 참여해 유학생 단체의 통일을 추진했다. 이후 1921년 4월 30일에 북미한인유학생총회가 성립되었다. 이후 북미한인유학생총회는 1923년 5월에 본부를 시카고로 이전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시카고에서 제1차 미주 유학생대회가 소집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양우조는 흥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5년 단우 199번으로 입단해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애국정신을 키웠다. 그러던 1927년 뉴벳포드 직조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11월 친구 오정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캐나다에서 떠나는 배를 이용해 귀국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양우조는 방직공장을 설립하여 헐벗은 동포들을 따뜻하게 입히겠다는 포부에 들떴다. 그는 미국에서 계획한 대로 방직공장의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에 인맥을 통해 공장부지를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러 왔다는 의심을 받은 그는 부산 지역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일거수일투족이 일제 밀정에게 감시당했으며, 그 와중에 장티푸스에 걸려 몇달 간 앓아누워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국이 먼저 독립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9년 말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0년 1월 1일, 양우조는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개최한 제16회 원동대회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원동위원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이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양우조는 한국독립당의 광동지부 간부로서 조직을 확대하는 활동을 했다. 광동지부는 1930년 봄 김구가 파견한 이석, 왕의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광동지부의 책임자는 김붕준이었고, 양우조는 이경산, 이두산, 김응, 채원개 등과 더불어 간사를 맡았다.

1930년 12월, 양우조는 제17회 원동대회 설비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그는 1931년 1월 모종의 사유로 필리핀으로 떠나다가 도중에 광동에 체재했고, 1931년 12월 말에 단우 박영호와 함께 홍콩에서 인삼행상을 시작해 생계를 이어가는 동시에 흥사단에게 재정지원을 해줬다.

한편, 그는 혁신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정력적인 저술활동을 벌였다. 그는 국내로부터 한글활자를 구해 <한성(韓聲)>이란 잡지를 발행해 광동지부의 기관지로 삼았고, <파시스트란 무엇인가>와 <민족주의와 기타주의>를 저술해 간행했다. 또한 쑨원의 사상을 논한 <삼민주의>를 193년에 번역 출판했고 1935년엔 <손문학설>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1935년 무렵, 한국독립당은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1932년 11월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대동단결체로 단일당조직을 추진하면서 임시정부의 해소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한국독립당은 1935년 2월 당론을 결정하기 위한 당대표대회를 항저우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임시정부 문제를 새로 결성될 단일당에 일임하자는 의견과 단일당을 조직한 후에도 임시정부를 유지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는데, 양우조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국독립당은 이 대회에서 단일당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35년 5월에 개최된 임시대표대회에서, 김두봉, 조소앙, 강창제 등의 주요 인사들은 단일당 참가를 감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등은 임시정부 사수를 주장했고 양우조 역시 임시정부 사수에 찬성했다. 그러나 김두봉, 조소앙, 강창제 등은 끝내 그해 7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난징에서 5개 정당과 단체가 연합한 민족혁명당에 가담했고, 한국독립당은 해체되었으며 국무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일방적으로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는 바람에 임시정부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양우조는 임시정부를 사수하고 있던 김구송병조, 차이석이 임시정부의 재정비를 도모하자 이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들은 한국독립당의 잔여 세력을 중심으로 1935년 10월 항저우에서 임시의정원 제28차 정기의회를 개최했다. 우선 국무위원 선거를 실시해 차이석 의원의 동의와 김붕준 의원의 재청, 양우조 의원의 3청으로 국무위원 5명을 새로 선출하고 정부와 의정원의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때 양우조는 조소앙[1], 김붕준 의원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인사들은 민족혁명당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갖추기로 하고 김구, 이동녕, 조완구, 송병조, 김붕준, 양우조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35년 11월 하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이사장에 김구가 선임되었고 이동녕, 송병조, 조완구, 차이석, 김붕준 등이 이사에, 양우조는 감사에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한국국민당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창사로 이전했다. 양우조 역시 창사로 옮겼고, 이후 그는 임시정부와 함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광저우, 유주, 기강 등지로 옮겨다녔다. 그는 임시정부가 당, 정, 군의 체제를 확립하는 동안 실무진으로 활약했고, 당, 정, 군의 주요 간부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충칭에 정착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기강에서 임시정부의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선전위원회는 독립운동의 실상을 세계 각국에 알려 협조를 얻기 위해 설치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함으로써 독립운동 역량을 통일 집중하는 목표를 세웠다. 양우조는 홍진․안훈․엄항섭 등과 함께 이러한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또한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충칭에서 통합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그는 즉각 가담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43년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외에서 조소앙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체제가 출범했을 때, 양우조는 중앙상무위원 겸 재무부장을 맡았다.

1942년 10월, 양우조는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해 예산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생계부 차장을 겸임했다. 생계부는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중경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동포들의 생활문제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당시 충칭에는 3백여 명에 가까운 한인 동포들이 생활하고 있었고 이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임시정부로서는 큰 문제였다. 양우조는 이 문제를 떠맡아 전력을 다했다.

양우조는 1940년 9월 창군된 한국광복군에서도 활동했다. 한국광복군은 창군 이래 오랫동안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 통솔을 받았지만. 1945년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되면서,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가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총사령부 간부들의 개편이 이뤄졌는데, 양우조는 정령(대령)으로 총사령부 정훈처 훈련과장을 맡아 활동했다.

1945년 8월 10일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양우조는 <제시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왜적 항복의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략)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슴이 너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잠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을 몰랐었다. 세상은 밤을 세워가며 미칠 듯이 좋아라고 야단을 한다. 그러나 왠일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와 같은 맘인지 다들 멍하여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환국 문제를 교섭했고 1945년 11월 김구 주석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이 1차로 귀국했다. 양우조는 나머지 임시정부 인사들과 그 가족들의 귀국 문제를 중국 측과 교섭했고, 1946년 4월 이들과 함께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양우조는 귀국 후에도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 인사들과 함께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국외에서 귀국하는 교포들을 구제하기 위해 1946년 9월 전재동포원호회를 조직해 중앙위원과 사업부장을 맡았다.

1947년, 양우조는 인천 제마 방직회사와 조선 방칙협회의 이사로 활동했다. 미국 유학 시절 조선에 방직 회사를 세워 헐벗은 동포들을 입히겠다는 포부가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이후 그는 1949년 애국동지원호회 이사를 역임했고, 1955년엔 한중협회 상임이사, 그리고 1960년 광복군전우회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64년 9월 24일, 양우조는 생을 마감했다. 향년 6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양우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제시의 일기[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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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신년 기념 사진. 사진 속의 아이는 양우조, 최선화 부부의 첫째 딸 제시다.

양우조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 강명화(姜明化)의 넷째 딸 강봉강(姜鳳姜)과 결혼했지만 몇년 후 이혼했다. 그 후 1937년 중국 진장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간호대학 출신이자 흥사단 단원으로서 활동하던 최선화와 결혼했고, 1938년에 첫째 딸 제시를 낳았고 1941년에 둘째 딸 제니를 낳았다. 양우조는 아이들의 이름을 영어식 이름으로 지은 것에 대해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양우조, 최선화 부부는 1938년 제시를 낳은 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8년간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제시를 키우면서 일기를 작성했다. 이 일기는 제시의 성장모습과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육아기록이지만, 1938년 7월부터 1946년 4월 29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공군기의 공습을 받으며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으로 이동한 과정과 당시의 실상을 낱낱이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제시의 일기>는 1999년 양우조의 외손녀 김현주가 출판했다. 그리고 2006년 3월 1일 KBS 삼일절 특집 다큐멘터리 <광야에서 들꽃을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제작, 방영되기도 했고, 2016년에는 박건웅 화백이 주 한국 총영사관의 지원을 받아 만화 <제시 이야기>를 출판했다.

각주

  1. 한때 민족혁명당에 가담했지만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당권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한국 독립당으로 다시 입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