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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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善嬅. 이명은 최소정(崔素貞).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 양우조의 부인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6월 20일 경기도 인천부 구읍면 학익동(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하여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제5기로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화여전 가사과 김합라 교수의 소개로 양우조와 선을 보았다. 당시 양우조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다가 서울에 잠시 들렀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로도 편지를 교환하며 교제를 지속했다. 그녀는 당초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했지만 양우조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설득한 뒤 함께 홍콩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양우조를 소개하고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상하이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다가 1936년 퇴학한 최선화는 1937년 27세의 나이로 41세의 양우조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준비와 예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족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결혼 준비는 엄항섭, 연미당 부부의 집에서 했다. 결혼식은 강소성 진강 임시정부청사에서 김구의 주례로 임시정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최선화와 양우조는 결혼식을 끝내고 자신들의 결혼을 알리는 결혼 청첩장을 만들어 친지들에게 돌렸다. 청첩장에는 한문과 영어를 병기했다.

결혼 후, 이들은 중국 광동성 광저우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다. 그러다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두 사람은 광저우를 떠나 후난성 창사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와 합류했다. 이후 최선화는 임정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며, 1938년 7월 4일 후난성 창사시 북문 밖 장춘항에 있던 이태리 천주교당 의원에서 첫 딸을 낳고 이름을 '제시'라 지었다. 이후 1941년에 둘째 딸 '제니'를 낳았다. 이들 부부는 딸이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활약하길 기대하며 영어식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최선화와 양우조 부부는 제시를 기르면서 육아일기를 썼다. 그녀는 아기가 처음으로 자신을 "엄마"라고 불렀을 때의 감회를 '제시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이가 내게 엄마라고 불렀을 때, 나는 '나눔과 희생', '사랑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겼다. 엄마의 역할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녀는 아이가 커가자 육아문제를 고민하기도 했다.

갈수록 제시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따라하며 배워가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취하는 행동들이 제시에겐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두려워진다. 혹 내가 위하는 행동에 모자람이 있지는 않은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못난 모습이 눈에 뜨이는 건 아닌지. 오늘은 불꽃이 땅에 떨어지자, 제가 침을 뱉고는 곧 발로 밟아 비벼버리는 새로운 습관을 또 보여준다. 이는 중국인들의 습관이다.

- 제시의 일기

또한 제시가 한국어나 영어로는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중국말 발음을 더 잘하자, 최선화 부부는 중국에서 계속 살게 되면 제시가 한국말보다 중국말에 더 익숙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아이가 집에서 중국 말을 하면 받아주지 않고 집에서는 꼭 우리말을 쓰도록 했다.

한편, 그녀는 중일전쟁을 피해 각지를 피신가는 과정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다. 1938년 12월 5일 일본군이 류저우를 폭격했을 때, 최선화 가족이 대피했던 동굴의 양옆을 비롯해 여러 동굴이 매몰되어 대피해있던 사람들이 생매장되었다. 그러나 동굴이 위험하다고 산 주위 숲속, 나무 밑에 은신하고 있던 피난민들도 대부분 일본군의 저비행 기관총 난사로 목숨을 잃었다. 최선화는 이 날의 처참한 광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일본군의 류저우 공습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대참사였다.

이후 그녀는 류저우에서 5개월 간 공습 대피 생활을 하다가 1939년 봄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류저우를 떠나 충칭으로 이동했다. 1940년에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하였으며, 동년 6월 임시정부가 광서성 유주(廣西省柳州)에서 사천성 기강(四川省 江)으로 이전한 뒤에는 교포 부인들을 단합시켜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는 주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2월에는 다시 임시정부를 쫓아 중경(重慶)으로 옮겨 가, 기미년 3·1독립운동 직후에 조직되었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의 재건운동에 착수하여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최선화는 서무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회장에는 김순애가 추대되었다.

애국부인회는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여성들에게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위문품을 거두어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한편 여성과 청소년들의 계몽과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그녀는 한국애국부인회 총무(서무부 주임)로 피선되어 회의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았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교포 사회에 편지를 보내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을 알리고, 해외동포의 성원과 단결을 촉구했다. 이 편지들은 <신한민보>와 <국민보>에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구의 어느 곳에 몸을 붙이고 있든지 나는 한국의 여성이다. 나는 조국광복의 책임을 지고 있다. 왜적은 나의 원수다. 한국의 1,500만 여성은 굳게 뭉쳐서 국가를 독립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자! 하는 구호로 용전(勇戰)합시다.

또한 최선화, 연미당 등 중경 한국애국부인회 간부들은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 여성들과 국내에 있는 부녀자들에게 광파방송을 했다. 최선화는 방송을 통해 한국애국부인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약사, 지금 우리 여성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피력했다. 또한 중경시내에 소재하고 있는 한국애국부인회에 대한 소개와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알리고 많은 협조를 부탁했다.

또한 한국애국부인회는 충칭 시내, 남안, 토교 세 곳에서 아동한글강습반을 운영했다. 임정에서는 매월 보조금을 지급해 이를 장려했다. 부인들은 가정과 교포학교에서 한글, 국사, 한국노래를 가르치며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교포들이 모두 모여 많이 먹고 유쾌하게 놀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부인들이 모여 떡을 만들고, 청년회와 함께 다과회와 여흥을 주최했다. 최선화는 교포사회의 이런 모임들이 망명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1945년 봄 중경임정은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있던 동포 위안부 10여 명을 인계받았다. 한국애국부인회는 이들에게 임시정부에 대해 설명해주고 민족혼을 다시 불어넣는 정신교육을 담당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녀는 1999년 국가보훈처에게 자신이 소장해온 독립신문(중경임정의 중문판 기관지, 1943년 6월 창간호부터 1945년 7월까지 7호 발행)과 양우조의 저작물 등 42건을 수록한 독립운동사료집을 전달했다. 이와 별도로 남편과 자신이 집필한 '제시의 일기'를 출간했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고, 2003년 4월 19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망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