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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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연충호(延忠孝). 호는 미당(薇堂).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에서 연병환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연충효(延忠孝)로, 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창사로 이주한 뒤 자신을 ‘연미당(延薇堂)’으로 칭하면서 대외적으로 연미당으로 알려졌다. 부친 연병환은 관립외국어학교 영어학교에 재학했으며, 1897년 궁내부 주사로 임명된 후 얼마 후에 인천 해관방판으로 복무했고, 뒤이어 부산 해관방판으로도 복무했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돠자 해관방판을 사퇴했고 1908년 청주군수로 발령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으며, 1908년 7월에 중국 용정 해관에 취직했다. 그녀가 용정에서 태어난 것은 부친이 용정 해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연병환은 1907년 초에 고향인 충청북도 증평에 안동김씨 김은영(金恩永)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 귀화한 뒤 용정에서 김해김씨 김정숙(金貞淑)과 중혼했다. 연미당은 연병환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병환은 당시 일화 150엔의 월급을 받았다고 하며,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에도 중화민국의 세관 관리로 복무했다. 또한 연길현에서 여자중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종사했으며, 자신의 집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초빙해 독립운동을 논의하게 하고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일제는 연병환이 이 만세시위의 배후라고 판단했다. 용정 일본 영사관 경찰은 연병환의 가택을 급습하여 수색했다. 그러자 중국 당국은 그를 천진 세관으로 전근 명령을 내렸다. 이에 연병환은 6월 18일 저녁 송별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아편음용 상습범 혐의로 전격 체포되었다. 그는 2개월간 취조를 받았다가 석방되었고 다시 중국 세관직으로 복직했다.

1919년 10월, 연병환은 상해세관으로 전근되었다. 이에 따라 연미당은 가족과 함께 1920년 초 상하이로 이사했다. 일제는 중국 당국에 연병환이 배일운동가임을 주지시키고 그를 현직에서 퇴직시킬 것, 그렇지 못한다면 배일운동의 중심지인 상해에서 추출하여 배일운동과는 관계없는 곳으로 이임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중국 당국은 묵살했다. 하지만 일제는 계속 끈질기게 요구했고, 결국 중국 당국은 1921년 말 연병환을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고, 1923년엔 진강해관으로 전임시켰다.

이무렵, 연미당은 아버지를 따라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로 전학하여 이곳에서 초등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그후 부친을 따라 다시 진강으로 이주한 그녀는 진강여자중학교에서 수학했다. 한편 연병환은 1925년 하남성 군무독판공서에서 고문에 임명되어 복무하다가 1926년 5월 14일에 진강에서 사망했다. 연미당과 그녀의 가족은 연병환의 유해를 상하이로 모셔와 장례를 치르고 공동조계 외국인 공묘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녀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까이 왕래하며 상하이에 안착했다.

연미당은 1927년 3월 20일 엄항섭과 결혼했고, 2년 후인 1929년 1월 21일 딸 엄기선을 낳았다. 이후 그녀는 1928년 11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고, 1928년 9월 24일에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가 결성되었을 때 청년여자동맹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1930년 8월에 결성된 상해여자청년동맹에 가담하여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상해여자청년동맹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 거주 교민들의 단합을 위해 활동했다. 그들은 주로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배부하는 일과 임시정부와 교민단이 주관하는 3.1절 기념행사나 8.29 국치기념일 등 각종 기념일 회의를 진행하고 기념일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관하는 일을 맡았다.

1932년 22살의 나이로 한인여자청년동맹 5명의 임시위원중 한 사람으로 선임된 연미당은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1931년 7월 18일에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가 결성되어 상하이에 있는 여러 단체들이 가담했을 때, 그녀는 여자청년동맹의 대표로 참여했으며, 7월 21일에 열린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각 단체연합회 명의로 의연금을 모금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그녀의 남동생 연충렬 또한 남편 엄항섭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부분 단체인 상해한인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가 벌어진 후[1], 일제는 임시정부와 거류민단 사무소, 독립운동가들의 집을 급습해 한인들을 체포했다. 이에 엄항섭은 가족을 남겨두고 김구와 함께 상하이를 가까스로 탈출했다. 연미당의 가족도 의거 다음날인 4월 30일, 일본 영사관 경찰의 가택 수색이 있기 전에 민필호의 안내를 받아 이동녕을 모시고 상해 탈출에 성공하여 가흥으로 이주했다.

연미당은 이동녕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특히 그녀는 당시 폐결핵에 걸려 각혈하는 등 위중 상태에 있던 이동녕을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동생 연충렬이 일본 관헌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1933년 1월 난징 방면에서 의열단원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동생이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에게 처단된 이 사건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미당은 1936년 재건 한국독립당이 창건된 후 남편 엄항섭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임시정부가 창사로 이주하자 난징에서 차남 엄기남을 출산한 뒤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창사로 탈출했다. 그녀는 1938년 창사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조완구의 임시정부의 역사 보고, 그리고 조소앙의 기념사에 이어 연사로서 연설했다. 그러나 연설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938년 5월 6일, 창사 남목청에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민당 3당의 통합 문제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갑자기 난입해 권총을 난사하여 김구, 유동열에게 중상을 입히고 지청천에게 경상을 입혔으며, 현익철을 사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김구는 총상을 입은 뒤 창사의 상하의원으로 급히 이송되어 응급 치료를 받은 후 연미당의 집으로 모셔졌다. 그녀는 김구를 정성스럽게 치료해 김구가 소생할 수 있게 해줬다. 뒤이어 안창호 서거 소식이 창사에 전해지자, 그녀는 안창호 추도회에서 이복영, 김정숙 등과 함께 애도가를 불렀다. 당시 추도식장 안은 이 애도가를 듣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연미당은 1938년 10월 남편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고 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중국의 선전공작대와 함께 활동했으며 일본군내에 복무하는 한국인 병사에 대한 초모 공작과 함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문활동과 선전, 홍보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연극이나 무용 공연 등은 여성대원들에 의해 기획, 공연되었다. 한편 여성대원들은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 보고하는 일도 맡아했다. 연미당의 맏딸 엄기선도 어린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 공작대열에 참가했으며 후일 공작대열에 함께 참여했던 박영준 · 이재현 · 노복선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를 따라 광둥, 류저우, 기강을 거쳐 1940년 충칭에 도착한 연미당은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는 데 관여했지만 임원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43년 2월 23일 재건 한국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녀는 김순애를 주석으로, 방순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조직부 주임에 선임되어 실무 조직의 책임을 맡았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대일전선에서 부상당한 부상병과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한국광복군 위문 등 후방에서 광복군과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적극 수행했다.

연미당은 재건 한국독립당의 5개 구역 조직 중 부군이 소속된 제 1구(區)가 아닌 제 2구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녀는 남편 엄항섭이 김구 주석을 보좌하며 OSS와의 한미합동훈련 유치를 위해 노력할 때 후방 활동에 전력했다. 특히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를 통해 애국부인회 조직부 주임의 직임으로 중경 방송국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했다. 연미당을 비롯한 한국애국부인회 여성들은 한적 병사들에게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합류할 적극 권유하는 초모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또한 한국애국부인회 여성들과 임시정부 요인 자녀들은 위문금품을 마련하여 전선에서 활동하는 항일 군인들을 위문했으며, 중경 토교(土橋) 깊은 산 계곡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를 방문해 일본군 포로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했다. 당시 위문공연에서 ‘나의 살던 고향’, ‘푸른 하늘 은하수’, ‘3.1절노래’, ‘군가’들을 불러 한적 병사들의 민족 감성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애국심을 자극해 공연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국애국부인회 여성들은 식민지 한국과 국외 한인사회에서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인 ‘타향살이’ 노래를 배워 임정요인들한테 들려주기도 했다.

한편 1943년 5월 연합국이 한국을 국제 감시 아래 신탁통치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연맹, 한국청년회 등 6개 대표 정당 및 단체들이 1943년 5월 10일에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광복운동 진영의 단결을 내외에 크게 과시하고 한국민의 광복을 준비하는 모습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좌우익의 각 정파 세력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때 연미당은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했다. 자유한국인대회는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해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임시정부의 승인을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8.15 광복 후, 엄항섭은 가족을 중국에 남겨둔 채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으로 환국했다. 이후 1946년 5월, 연미당은 아이들과 함께 제2진 대원들과 함께 미군이 제공한 군함을 타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인천지역에 콜레라가 기승을 부려 상륙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항에서 1주일을 보낸 후에야 다시 인천항으로 와 6월 3일 상륙 수속을 끝내고 입국할 수 있었다. 연미당 가족은 김구가 거처하는 경교장에서 1주일을 보낸 후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곳으로 이사했다.

조국으로 돌아온 연미당은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부군 엄항섭의 활동을 내조하며 가족을 돌보는 일에 몰두했으나, 6.25 전쟁 발발 후 아이들과 함께 여주로 피신해야 했고, 남편 엄항섭은 서울에서 조완구,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김붕준, 윤기섭, 유동열, 명제세, 박건웅, 원세훈, 안재홍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이후 그녀는 월북자 가족으로 오해받아 사회의 지탄과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자녀교육에 매진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이겨나갔다. 그러나 말년에 중풍이 찾아와 고생하다가 1981년 1월 1일 병사했다. 향년 73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연미당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에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연미당의 맏딸 엄기선은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킬 때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를 연미당이 직접 재봉틀로 박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반면 윤봉길은 자신이 일본인 상점에서 구입했다고 진술했다. 만약 엄기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윤봉길이 연미당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했거나 훙커우 공원의 식장 안으로 입장할 때 의심받지 않기 위해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도시락 보자기를 새로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