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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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昌濟. 호는 창산(蒼山), 이명은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郁)·여순지(呂順之)·강화조(姜華祖)·강홍주(姜弘周).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4월 7일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봉천리에서 강시홍(姜時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때 고향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1922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기자로 선발되어 여러 편의 논설을 집필했고, 1923년 3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7월 14일에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會計檢査院) 검사관(檢査官)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의열단원(義烈團員)으로도 활약했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25년 3월 13일에는 독립운동자금 공급 문제와 국제연맹에게 대한민국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한 문제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승만 초대 임시대통령의 탄핵안을 상정 가결하게 함으로서 이승만이 사직하게 했으며, 이후 이동녕, 박은식이 6개월간 제2대 임시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 겸 경무국장(警務局長) 서리에 취임하여 임정의 강화와 통일정부 유지에 진력했고 노병회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1926년에는 나창헌, 고준택(高俊澤) 등 동지와 협의하고 중화(中貨) 5,000원을 조달하여 임시정부의 강화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밀정 또는 일제의 부역배 등 숙청, 난동 분자 엄중 단속, 일제의 주요 시설 파괴, 요인 제거 등을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고 그 산하 단체로 정위단(正衛團)을 두어 그 총무 겸 심판원(審判員)을 맡았다. 또한 강창제는 병인의용대원 최병선, 김광산(金光山), 장진원 등과 함께 상해 홍구 해녕로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총영사관 내산판사처를 기습하여 내산(內山)과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공격해 최동윤을 부상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진원이 체포되자, 강창제는 김광산, 김창근(金昌根), 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작전을 펼쳤지만 발각되자 수류탄을 던져 일본 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귀환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동지 이덕삼(李德三)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를 기습하여 경찰 1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27년, 강창제는 김창근, 이성구와 함께 시한 폭탄을 들고 일본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했다. 1928년에는 장쑤성 전장시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그해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조소앙, 이시영 등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했고, 그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민족 유일당 운동을 훼방놓는 가로인(假露人: 가짜 러시아인. 한국 공산주의자를 가리킴)을 숙청, 박멸하자는 글을 발표했다.

1930년, 강창제는 상해에 있는 프랑스 정보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았고, 2년 뒤인 1932년에 상해 동남대학을 3년 중퇴한 뒤 강소성 정부 민정청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어 일을 맡았다. 1934년에는 병인의용대장에 선임되었고, 한국독립당 중앙 이사 겸 조사부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에는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혁명당, 대한독립당 등 5당 통합을 성사시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조사부장을 맡았다. 이 당시 중앙위원으로는 지청천, 최동오, 유동열, 이광제(李光濟), 박창세(朴昌世), 양기탁, 현익철, 김학규, 이운한이 선임되었고, 중앙상무위원으로는 지청천, 최동오, 박창세, 이광제, 강창제가 선임되었다. 이들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재만조선혁명당 등의 순 민족주의적 정수의 혁명자로서 조직된 단체임을 내외에 선전했다. 1935년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2년 뒤인 1937년에는 양기탁, 유동열, 지청천, 현익철, 최동오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는 진강을 따나 창사로 이주했다. 창사에서 임시판공처를 차린 임시정부 인사들은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3당의 통일 문제를 놓고 남목청(楠木廳)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때 조선혁명단원 이운한이 갑자기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했다. 첫 탄환은 김구를 맞춰 중상을 입혔고, 두번째 총탄은 현익철의 가슴을 꿰뚫었다. 또한 유동열은 중상을 입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총탄을 맞은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다. 김구 역시 거의 죽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강창세는 이운한을 사주한 인물로 지목되어 박창세, 이운한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강창제가 3당 통합 과정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이운한을 사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하지만 중국 경찰은 전시 상황이라서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이들을 모두 보석으로 석방시켰으며, 이운한은 탈옥했다.

강창제는 석방된 후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審査課長)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에는 홍진(洪震)·유동열·이연호(李然皓)·신영삼(申榮三)·신기언(申基彦) 등과 같이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전방 인원 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중국 군사위원회 시안 주재 한국 내 연락처장을 맡아 한인 의용군을 모집했다. 1945년 홍진, 유동열, 이연호(李然皓)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2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강창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일각에서는 일제의 사주에 의한 암살이라고 주장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