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Bundesarchiv Bild 183-H1216-0500-002, Adolf Hitler.jpg
인물 정보
출생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 암 인
사망 1945년 4월 30일 (56세)
독일 베를린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
정당 1920~1921: 독일 노동자당
1921~1945: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개명)
배우자 에바 브라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의 총리, 그리고 나치 독일의 총통을 지낸 독재자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의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타 민족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너무나 당연시한 극단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이고 아리아인 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진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특정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겠다는 망상을 실행에 옮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상 최악의 대량학살자.

역사의 전개에 있어 특정 개인 한 명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A라는 인물이 큰 업적을 이뤘어도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를 대신할 다른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요소로 자리잡는 매우 드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대체불가능적 요소가 매우 극단적으로, 그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인류 전체의 흑역사

그가 없었으면 제2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일어났더라 하더라도 세계 대전 규모가 아닌 비교적 흔한 지역 전쟁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관측이다. 좋든 싫든 현대 사회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1인. 위에서 언급한, 인류 역사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대체불가능한 인물. 그의 악행을 모두 적기에는 위키 페이지의 여분이 부족할 지경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생애 초기[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에서 태어났으나 곧 이사하여 사실상 린츠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제국의 중하위직 세무공무원으로 아들이 자신처럼 공무원의 길을 밟기를 희망하였으나 소년 히틀러는 화가를 지망하였고, 안그래도 전통적인 가부장의 표본이었던 알로이스 히틀러와 마찰이 심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음에도 학력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승진했기에, 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자신과 같은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길 희망했다.아버님 소원대로 공무원이 되긴 했는데……

반면 소년 히틀러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도 못했을뿐더러 본인 스스로도 공부보다는 예술가, 특히 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에 대한 전통적인 아버지들의 인식은 좋지 않아서 자연스레 부자는 장래를 놓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부친 생전에 히틀러는 일부 폭력을 동반한 부친의 강요와 억압에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히틀러는 부친의 강권으로 린츠 레알슐레(공무원과 사무직을 위한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였으나[1] 성적은 더더욱 좋지 못했고 이런 히틀러의 학교 생활은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의 사망(1903년 1월)을 계기로 얼마 못가 끝나게 된다.

부친 사망 이후 자유로워진 히틀러는 얼마 안 가 학교를 완전히 포기하고 수도 빈으로 유학하여 꿈에도 그리던 미술학교 응시에 나섰으나 결과는 광탈. 히틀러는 분명 그림을 좋아했고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곤 나쁘진 않은 수준이었지만 딱 그정도 수준에서 그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그는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채 스스로 풍경을 스케치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07년 모친까지 사망하고 사실상 혼자가 된 히틀러는 이후 빈에 완전히 머물면서 여러 하숙방들을 전전하는 백수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 히틀러가 가난에 허덕이고 이로 인해 자본가, 특히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사실 히틀러는 적으나마 연금과 생활보조금을 받고 있었고, 친척으로부터의 지원도 받아서 혼자서 먹고 살기엔 부족하진 않았다고 한다. 풍족하게 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을 하던 처지는 아니었다는 것. 영 돈이 궁해지면 본인이 직접 거리로 나가 그림을 그려 파는 것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히틀러가 경제적으로 궁핍하진 않았더라도 반유대주의, 최소한 게르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였던 룸메이트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갖고 있는 돈을 대부분 박물관 및 오페라 등에 투자했다고 하며, 특히 독일 민족신화를 오페라 작품화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몇 번이고 감상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가 국경을 넘어 쫓아온 오스트리아 수사관들에게 무릎끓고 싹싹 빌며 몸이 허약해서 군대에 못간다고 사정하여 끝내 면제 판정을 받아냈다. 본인은 훗날 《나의 투쟁》에서 다민족 잡탕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대에 몸을 담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냥 1913년 당시 군대에 가기 싫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1년 뒤 독일군에 자원입대한 것을 근거로 히틀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추론도 있지만 평시였던 1913년과 전시로 애국심의 광기에 다들 미쳐있던 1914년 8월을 똑같이 보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같은 부대 소속 병사들의 평가로는 용감히 싸웠고 맡은 임무는 성실히 해내는 훌륭한 병사지만 전우들과 마음을 터놓는 교우관계는 쌓지 못했다고 한다. 주로 연락병으로 종군하였으며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으며 공훈을 인정받았다. 철십자 훈장은 독일군의 훈장 체계에서 최하급의 훈장이지만 그래도 일개 병사가 받기엔 상당히 힘든 것은 다른 훈장들과 다를 바 없다. 최소한 병사로서는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참호전의 와중에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은 서부전선의 참극 속에서도 히틀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말 안타깝게도 살아남았고[2]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후 후방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다가 독일의 항복과 종전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높이 산 상관들덕에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든 독일군에 잔류할 수 있었다. 그는 뮌헨에서 군 정보부 및 방첩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그의 상관은 뮌헨의 수많은 정치조직들에 대한 감시 및 동향파악 업무의 일환으로 히틀러를 독일 노동자당 정기모임에 파견시키는 지시를 내리고 말았다.안돼!!

독일 노동자당 모임에 참석한 히틀러는 불평분자들 몇이 모여 떠드는 것을 지켜보다 참지 못해 스스로 회의에 참석, 화려한 언변으로 참석자들을 죄 버로우시킨 후 당의 권유를 받아 군을 전역하고 정식으로 입당한다. 이후 히틀러는 단번에 작은 정당에 불과하던 노동자당을 접수하여 당수가 되었고, 1920년 2월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바꾸며 당내에서 일인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정치 경력[편집 | 원본 편집]

히틀러는 특유의 연설력과 카리스마로 당세를 빠르게 확장시키며 당내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확고부동한 1인자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차지한 것을 보고 이를 모방하여 1922년 뮌헨 맥주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같은 연대세력과의 동상이몽과 어설픈 준비로 쿠데타는 즉시 진압되었고,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루 형기가 감형되어 9개월의 복역 끝에 출소했지만 당세는 많이 약해졌고 당내 반대파가 강성해지는 등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수감생활동안 히틀러는 두 가지의 성과를 얻는데 하나는 나의 투쟁을 저술하여 지명도를 전국적으로 넓혔고 다른 하나는 불법적 쿠데타로 정권을 쓰러뜨릴 수 없으니 합법적 수단(선거)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전략적 방침 변화였다.

이후 여라 차례 선거에서 나치는 쓴맛을 보았으나 꾸준희 의회에 의석을 내는 원내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1930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뒤를 이어 원내 제2당까지 치고 올라왔고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과에는 당 바깥으로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최악의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기성정당에의 불신, 카톨릭중앙당이나 국가인민당 등 보수정당의 분열과 나치와의 연대 모색,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공산당의 성장과 이에 따른 공산혁명에의 공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당 내부로는 헤르만 괴링파울 요제프 괴벨스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성과를 내주었는데 특히 괴벨스의 천재적 선동술은 나치의 급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결국 1932년 1차 총선에서 나치는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는 아직 기존 정당의 경계심, 그리고 히틀러의 고집스러운 협상태도로 집권하지 못했지만 슐라이허 내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고, 같은 해 11월 2차 총선에선 의석수가 약간 줄었지만 여전히 원내 1당을 유지, 리페 주의회 선거 승리와 보수계 정치인이며 전 총리이기도 한 프란츠 폰 파펜의 협력으로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정을 통해 총리에 취임했다.

말이 좋아 아돌프 히틀러 내각이지 사실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4] 내각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말만 하고 행동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한다. 이 정부의 인선으로 흑막이 까발려졌다. 진작부터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국가사회주의는 실은 우익 대자본 민족주의 정당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사실은 국가자본주의였던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 쿠르트 슈마허[3]
그 사람은 우리가 고용했다.
1933년 1월 말, 프란츠 폰 파펜[5]
히틀러는 우리에게 포위당했다.
1933년 1월 말, 알프레트 후겐베르크[6]

이처럼 당시 독일 정계는 좌우 막론하고 히틀러를 과소평가하고, 히틀러 내각을 기존 보수파에 의해 좌우되는 허수아비 내각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커다란 오판이었다!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7]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1938년 3월엔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간 국가를 통합(사실상 흡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협박, 주테텐란드를 빼앗았다.(뮌헨 협정) 그리고 1939년 3월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멸망시키며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으며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 지방을 할양받았다.

히틀러는 일련의 거듭된 침략 행위에도 서방국가(영국프랑스)가 침묵하고 개입하지 않는 것에 자신감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폴란드에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 단치히 회랑의 양도를 요구했으나 폴란드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이에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을거라 판단, 1939년 9월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편집 | 원본 편집]

1918년 11월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8]
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중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든 히틀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만큼 영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오판했던 것. 그런 오판 속에서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틈을 타 1달만에 전광석화처럼 폴란드를 정복하였다. 뒤이어 1940년 4월 덴마크를 협박, 군대 주둔권을 얻어낸 후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으며, 5월에는 황색 작전을 발동, 베네룩스 3국에 의해 서부전선의 대국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뒤이은 영국 침공 계획이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고, 1941년 6월, 자신의 독단으로 소련을 기습 침공하여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한때는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끝내 함락에는 실패했고, 히틀러 본인의 아집으로 계속된 전략적 오판을 통한 패배를 자초하였다. 뒤이어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자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등 전쟁의 규모를 계속해서 벌려 나갔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히틀러의 불안감과 신경쇠약, 편집증은 심해져만 갔으며 194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점점 비현실적인 신무기에 집착하고 과대망상에 빠졌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퇴와 항복이란 단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은 지휘관들을 같은 이유로 기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미수 사건으로 더욱 심해졌다. 파리 주둔군 사령관 콜티츠에게 도시를 초토화시켜라!는 명령을 내리다 역설적으로 콜티츠의 항복을 불러일으켰고,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라는 무리수로 패배를 앞당겼다. 베를린 전투에서도 존재하지도 않는 슈타이너 집단군이 소련군을 물리쳐 줄 것이라 믿다가 그런 거 없다는 측근들의 말에 엄청나게 격분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베를린의 지하벙커 늑대굴에 남았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며 다시는 독일 역사에 항복이라는 치욕스러운 단어가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충실히 따라준 에바 브라운과 간략하게 결혼식을 치른 후 유언장에 카를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로 지명한 후 끝까지 싸우라는 지시를 내린 후 권총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독일군이 즉시 화장하려 했으나 베를린 전투의 급박한 상황에 화장을 위한 충분한 연료가 없어 실패했고, 결국 늑대굴을 점령한 소련군이 그의 시신을 접수하여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 지명한 되니츠는 철저항전이라는 히틀러의 유언을 무시하고 항복하여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끝낸다.

사상[편집 | 원본 편집]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끝이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것들 중에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하고 가장 1순위였던 사상은 <지배자 민족(Herrenvolk)>사상이었다. 매우 극심한 정도의 국가주의로서 애국심이든 뭐든지 너무 심하면 안 좋은 거다 자기네 아리아(Aryan, 독일어로는 Arier)인, 즉 백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주장이다. 근데 사실 이 인종은 일부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말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인종인데 이에 대해서 히틀러는 백인이며, 키가 크고, 노란색 머리에 파란 눈인 인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짜 웃긴건 이중에서 백인이라는 거 뺴면 히틀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추정 키가 170~175cm로 작은 편이고, 머리색도 검정/갈색에다가 눈도 갈색. (여기서 키는 히틀러가 체격 검사시 복장 벗는 것을 거부해서 추정된 키이다.) 근데 170이 작은 건가? 180 미만이면 다 키 작은 거 아닌가요? 다만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서 난쟁이로 묘사하였으나 당시 시대에는 작지 않았다. 더구나 근육질에 군대에서 참호격투 등을 배워서 실제로 히틀러를 만난 사람들도 위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을 광신적으로 믿어서 독일인도 T4 작전 등으로 그냥 학살했고 짐승들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처럼 인간을 개량하려고 했었다. 완벽한 독일인을 탄생시키려는 노력은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내지 않았으나 연습으로 여기고 계속 진행했다. 특히 유대인은 이에 대한 실험을 많이 당했다.

성격[편집 | 원본 편집]

세계 최악의 악당이라는 점 때문에 성격도 개차반인것 같지만, 의외로 성격만큼은 인격자 No.1이었다. 다만 나의 투쟁[9] 등을 읽어보면 연기와 기만[10]일 수도 있다.

일례로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이 제정된 곳은 다름 아닌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가 동물을 아끼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으로 실제로 히틀러는 애완견 셰퍼드 '블론디'를 무척이나 아끼는 좋은 주인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이 블론디를 잡아먹을까봐 자살할 때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 성격답게 고양이는 충성심이 없다하여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관처럼 보호해야할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자신의 취향과 소신대로 나누었다.

이 외에도 주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었으며 예술문학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도 조예가 있는 등 여러모로 지적인 신사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의외로 스캔들도 하나 없었고 실제로 죽을 때까지 동정(...)이었다. 히틀러에게 부인 에바 브라운이 있다는 사실도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 단 애바는 공식적으로 정부이고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괴벨스의 처인 마그다가 맡았었다. 에바와는 자살 직전에 결혼했다.

물론 까고 보면 예술문학 작품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 듣고 나머진 폄하하는 등 그다지 깊다고 볼 수는 없는 수준이었으며, 제작이라는 것도 딱 몇번 해본 일반인이 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재도 히틀러가 생전에 그렸던 그림들이 몇점 실존하는데 사람 같이 복잡한 개체는 거의 그리지 못하고 건물 같은 단순한 개체만 많이 그리는 등 미술품 보다는 설계도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래서 실제로 미술학교 입시에서 낙방하자 감독관중 한명이 건축학과 진학을 권했다고 한다.

동정이라는 점도 히틀러가 지나친 인종론의 신봉자라서 생긴 해프닝으로 그는 생전에 '남자다움'에 집착하였고 이로 인해 동정을 잃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여성이란 남자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꼴마초성 성격도 있었고 여하튼 이런 이유들이 겹쳐 여성과 관계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여성 유권자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바이마르 시절에는 결혼을 미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이 외에도 지독한 채식주의자로 고기는 일절 먹지 않았으며 혐연가에 혐주가라 담배는 멀리했고 술도 식사때 딱 한두잔 반주로 먹는거 빼고는 안먹었으며 그나마도 억지로 먹었다 한다. 이는 지나친 건강 염려증에서 비롯된 행위로 실제로 이렇게 메인 식사에서 '먹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반동인지 달콤하고 맛난 후식인 케이크에 무지막지하게 집착했다고 한다. 채식은 조카이자 연애 감정을 품었다는 겔리 라우발 자살을 겪고 나서 육식을 끊으면서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혐주성향은 중국 무관이랑 술내기 하다가 진 이후로 끊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틀러의 종교관[편집 | 원본 편집]

히틀러의 종교관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개신교인들은 히틀러가 가톨릭 혹은 무신론자였다고 주장하며 반기독교인들은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히틀러의 종교관이 어떻건 그게 개신교/가톨릭/무신론이 틀렸다는 근거는 될 수 없지만 상대편을 공격하기에는 좋은 소재라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히틀러가 생전에 친기독교적 성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쓴 적도 있으며,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히틀러를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것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공산주의자로 낙인 찍던 시대였기에, 무교 혹은 무신론자라고 밝힐 경우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저런 발언을 쓴건 당시 20세기 초반 기독교 문화권에선 굳이 믿는 신앙이 없더라도 자신의 사상을 맹신의 단계에 이르게 하고자 할 때 신의 뜻과 자신의 뜻이 합치한다고 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걸 고려해고 봐야 한다.

히틀러가 반가톨릭적 모습을 보인 경우도 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말엽에 교황 비오 12세를 납치하여 총살시키고 바티칸을 불태우려 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로 가톨릭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11] 히틀러는 또 수많은 신부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은 틀려먹은 종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12] 그리고 일본의 신토에 대해서 우호적인 발언을 보이기도 했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하드라고 무슬림에 우호적인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개신교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협조하면 자신도 협조적으로 나갔지만 자신에게 반발하면 탄압하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일관성이 없으며 철저하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능력[편집 | 원본 편집]

정치[편집 | 원본 편집]

대전 종결 직후 주류학설은 히틀러가 집권 이후 매우 치밀하게 세계정복을 준비했으며 서방국가를 농락하며 군비확충을 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A.J.P 테일러는 이 주류학설에 반박하며, 히틀러의 좌충우돌형 외교정책이 구 연합국의 내부사정과 연합국 상호간 불신 속에 우연히 성과를 거둔 것이 1935부터 1938년 까지이며 그의 이런 외교적 성과는 1938년 뮌헨 협정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고 지목한다.

정치가로서 히틀러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비타협에 있었다. 히틀러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요구했고 그 모든 것을 협상 파트너가 받아들이길 원했다. 이러한 정치적 비타협은 나치당 당수 시절이나 총통 시절 모두 목격되는 것이다. 당수 시절 히틀러는 자신이 총리가 되지 않으면 어떠한 연정 협의도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 그 말을 지켰으며, 총통 시절에는 주변국을 상대로 전쟁 위협을 하며 영토를 강탈했으며 서방 국가에게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비타협은 한두 번정도에 그친다면 뚝심있고 강인한 지도자로 평가받겠지만 히틀러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그의 폭주에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비타협의 이면에는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리만큼 물어뜯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히틀러는 집권 과정에서 프란츠 폰 파펜의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팽창 과정에서는 새로운 전쟁을 두려워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민심, 민족자결주의에 어긋나는 중유럽의 국경을 최대한 이용했다.

그밖에 선전능력에서도 탁월했는데, 그의 연설은 글로 보기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직접 들으면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에 압도되고, 손과 발을 최대한 이용하는 그의 몸짓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연설에서는 특히 과장법을 매우 잘 활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이러한 능력은 괴벨스에 의해 그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군사[편집 | 원본 편집]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히틀러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고 당연히 직업군인에 비해서는 그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으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지간한 나라는 패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만드는 등 정치인들의 군사적 식견은 딱히 좋은 편이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는 예외적인 경우고 드 골의 경우 군인이 정치인을 겸한 경우니 논외로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망친 군사적 사례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장성들의 제안 중 하나를 골랐다가 망하거나 독단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전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기에[13] 그렇게 여겨질 뿐이며 이후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현 시점에는 이러한 신화들도 벗겨지고 있다.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의 경우 다른 지휘부가 말도 안된다고 무시했던 에리히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과감하게 채택하고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이때 연합군의 역습을 우려한 룬트슈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영국이 도망쳤다는게 옥의 티로 남았다. 이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공군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독일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 지휘부의 역량 부족과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으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의 탓을 하는 것이 런던 공습인데 애초에 주간공습을 담당하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시작부터 런던공습을 요구하고 있었고 휴고 슈페를레 장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14] 런던공습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를 헤르만 괴링 원수가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것이 작전은 안풀리고 그 와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면서 괴링도 런던 공습을 받아들여서 런던 공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다 런던공습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어었다는 주장도 현재 들어서는 반박되는 추세다. 결국 히틀러가 패배에 기여한것은 딱히 없다.

또 거론되는 것은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다는 것인데 이 또한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키예프에 주둔한 소련군의 규모는 60만명이 넘었고 이정도 전력을 등 뒤에 두고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했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결말만이 나올 뿐이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 주공을 맡는 중부집단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할 남부집단군이 혼자서 키예프를 공략할 수 없었기에 기갑부대를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 전투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게 아니라 키예프의 대승 덕분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이 정확한 결론이다.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지만 공중보급도 실패하고 30만명에 달하는 6군이 그대로 사라졌다. 문제는 6군이 그렇게 버텨준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던 A집단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을 바로 뺐다면 A집단군이 포위섬멸에 당하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공중보급 자체는 에쇼넥 공군참모총장과 헤르만 괴링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에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긴것도 아니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세가 지연된것은 라스푸티챠로 인해서 공세에 나설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당장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게 현재의 일반적인 평가다.

결론을 내리자면 히틀러의 군사적 식견은 정치인으로는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 떠넘기가로 히틀러 때문에 모든게 망했다는 편견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낫질 작전을 생각하면 히틀러 덕분에 독일이 그정도라도 해봤다고 봐야할 것이다.

각종 음모론 및 낭설[편집 | 원본 편집]

히틀러 생존설
죽은 유명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히틀러도 사후 생존설이 제기되었는데, 그의 시신을 접수한 것이 정보공개를 거의 하지 않는 소련군이기도 해서 시신의 본인 여부가 불확실했던 것이 가장 컸다. 이후 소련이 히틀러의 두개골을 공개함으로서 잠잠해졌지만 이후로도 음모론자들 및 네오나치주의자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히틀러는 일종의 카게무샤이며 진짜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 남아메리카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는 음모론적 주장이다.
히틀러 여성설
생존설과 달리 이쪽은 어느 정도 의심을 할 이유가 있는 것이, 히틀러의 두개골을 조사한 결과 두개골의 주인은 여성이라는 것이다.[15]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론이 이미 제기된 상태인데 히틀러의 두개골이라 알려진 것은 사실 에바 브라운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 통설과 반대되는 것으로, 기존에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 에바 브라운이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16]
히틀러 혈육설
히틀러가 생전에 에바 브라운과의 사이에서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자식이 있고, 1945년 당시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히틀러의 아이는 나치 잔당의 보호 속에 해외로 망명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에바 브라운이 임신했거나 임신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징후나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에바 브라운 외에 히틀러가 제3의 여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근거는 없다.
히틀러 유대인설
히틀러의 가계에 대한 추적 중에 나온 주장이지만 이후 추가적인 자료가 발굴되면서 부정되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아돌프에게 고함은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친척들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 결과 그에게 유대인과 북아프리카인들이 갖고 있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오른쪽 고환이 없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잠복고환.[17]
  • 필수요소로 등극했다 카더라. 몰락 참조.

각주

  1. 그런데 이 린츠 레알슐레는 언어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B%A3%A8%ED%8A%B8%EB%B9%84%ED%9E%88_%EB%B9%84%ED%8A%B8%EA%B2%90%EC%8A%88%ED%83%80%EC%9D%B8
  2. 이 당시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헨리 텐디의 이야기. 제1차세계대전의 영국군 전쟁영웅이던 헨리는 치열한 격전중 부상을 입은 독일군 병사를 살려주기로 하는데 그 병사가 히틀러라서 망했어요(...).
  3.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08p
  4. 나치와 연정한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 히틀러 내각에는 경제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본인의 무능과 실수에 히틀러를 과소평가한 대가로 얼마 안 가 실권을 잃고 당은 나치에 흡수되었다.
  5.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
  6.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
  7. 주요 정당들의 해산 경과를 요약하자면,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무너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조 조직이 나치의 탄압으로 와해, 어용단일노동단체에 흡수된 후 세를 잃고 지도부가 프라하로 망명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대한 독일 민주당도 동시에 해산되었고, 나치의 연정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당수 후겐베르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나치에 흡수되었다. 카톨릭계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카톨릭 중앙당은 나치로부터 종교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했다. -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64p~669p
  8. 1918년 11월이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항복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패전, 항복하는 굴욕의 역사가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결국 망상임이 드러난다.
  9. 민중과 열등 종자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분명히 드러나는 책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책을 읽고 히틀러 암살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0.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때도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와 친하게 지낸 유대인들 역시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1.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의 증언
  12. 이때 카톨릭을 틀려먹은 종교라고 비방한 이유 중 하나가 신부들은 남색집단이며 동성애적 성향으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카톨릭이 교리상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긴다는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
  13. 전후 국방군 장성들이 주도하여 전사를 기록하거나 이들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잘한것은 자신들의 공으로 잘못된 것은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고 히틀러는 이미 죽었기에 반론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14. 가령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격하면 영국 공군을 런던으로 끌어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런던공습을 주장했었다.
  15. "히틀러 두개골 조각은 타인 것"<美연구진>, 2009년 9월 28일 연합뉴스
  16. "히틀러, 권총 아닌 음독자살" 2010년 5월 8일, 연합뉴스
  17. 빌트지 보도(독일어) 번역, 연합뉴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