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사당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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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27일 독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의문의 방화 사건이다. 향후 독일 정국을 철저하게 뒤흔든 사건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2월 27일 오후 9시경, 제국의사당(Reichstag) 건물에서 화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즉시 소방서와 경찰이 출동해서 화재를 진압하려 했으나 화재 규모가 워낙 커서 진압에는 실패했다. 이후 범인으로 네덜란드 국적의 마리누스 반 데르 뤼베(Marinus van der Lubbe)가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사건 자체는 이처럼 간단하게 설명이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의 후폭풍은 정말 엄청났다.

사건 당시의 정치적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 총리(나치당),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경제장관(독일 국가인민당),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카톨릭 중앙당이지만 사실상 무소속[1]) 3인의 연립내각이 출범한 지 채 1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히틀러 내각은 3월 5일 총선거를 예고한 상태였고, 각 정당들은 코앞의 선거를 앞두고 총력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보수 우파 정당들, 특히 나치당은 공산/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맹비난을 펼치는 중이었다.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내각, 뒤를 이은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이 붕괴한 이유 중 하나는 이들 사회주의 세력의 총궐기와 이로 인한 공산혁명 및 내전의 우려였는데 나치는 이에 대한 시민들의 공포심을 최대한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범인으로 체포된 마리누스 반 데르 뤼베는 과거 네덜란드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나치에겐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던 것.

범행동기[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독일 내 좌파 정치세력들은 히틀러 내각에 대해 분열된 우파 세력이 총결집한 것으로 보고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좌파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할 것이라 보았다. 때문에 강경파들은 노동자와 좌파 정치세력이 우파 세력의 탄압에 맞서 총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만 독일 공산당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모두 당장 3월 5일의 총선거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뤼베 역시 강경파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뤼베는 독일 보수 우파 세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서 제국의사당을 표적으로 삼아 방화한 것이고, 대성공을 거두었다.아니 왜 자기네 나라 냅두고 남의 나라에 그렇게 신경을 써?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뤼베의 의도와 정반대로 돌아갔다.

최대 규모의 좌파 탄압[편집 | 원본 편집]

방화 직후 현장에 도착한 히틀러는 범인 검거 보고도 듣지 않고 이것은 공산당이 한 짓이다!라며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조사를 지시했다. 뒤이어 도착한 부총리 파펜도 이에 동의했다. 헤르만 괴링은 공산당의 총궐기가 시작된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면적인 총공격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사회민주당까지 추가로 타겟에 넣었으며 방화 다음날인 2월 28일,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국민과 국가를 수호하는 긴급 포고령을 전국 대상으로 발동했는데,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보장된 결사, 집회, 언론의 자유를 대대적으로 침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고령이 떨어지기도 전인 2월 27일 밤부터 좌파에 대한 무분별한 체포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공산당 및 사회민주당 주요 지도부와 의원들, 노동조합 간부들,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좌파 지식인 등이 아무런 법적근거 없이 경찰, 돌격대, 친위대 등의 공격을 받고 끌려가 고문, 구금받고 심할 경우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3월 5일 총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는 역대 선거 이래 최대 43.9%의 득표율로 288석의 의석을 차지하긴 했지만 목표로 했던 2/3 의석(?!) 획득에는 실패한다. 연립내각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을 더해도 마찬가지. 오히려 탄압 대상이었던 사회민주당은 18.3%, 공산당은 12.3%를 득표하며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독일 국민들이 공산당 등 좌파에 대한 위협을 보다 심각하게 느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히틀러에게 강력한 힘이 실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히틀러는 이를 바탕으로 거리낌없이 수권법 제정으로 나아간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뤼베 일개 개인이 저지른 범행이라기엔 너무 규모가 커서 오래 전부터 나치의 자작극 아니냐는 의심을 강력히 받아왔다. 그러나 자작극이라 단정할 증거가 없는 반면, 적어도 뤼베의 경우 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것은 명백히 확인된다. 아직도 논의 중인 주제이지만, 적어도 뤼베 범인설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인물 중 불가리아의 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있는데, 아직 정상적으로 유지되던 독일 사법부는 디미트로프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히틀러는 이 판결에 격분해 추후 민족/국가반역죄에 대해 신설하는 재판소(민족재판소)에서만 담당하라고 지시했으며, 이후 독일 사법부는 유명무실화된다. 무죄판결된 디미트로프는 이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 국적을 취득한 후 스탈린을 지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고국 불가리아로 돌아간다.

각주

  1. 파펜은 1년여 전 당의 동의 없이 대통령 지명하에 총리직을 수락하여서 당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