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병합

1938년 3월 10일에서 4월 10일에 걸쳐 진행된 독일오스트리아의 국가통합. 사실상 독일에 의한 일방적인 흡수였으며 독일어로 통합을 뜻하는 안슐루스(Anschluss)라는 단어가 이 사건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마침내 대외 팽창에 나서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

기원 및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사실 오스트리아 병합은 히틀러의 침략 정신이 발휘된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가 통합은 19세기부터 내려온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열렬한 희망이었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 소독일주의가 승리하면서 한동안 잊혀졌다. 그러던 것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제국 내 소수민족이 떨어져나간 후 독일인만의 국가 오스트리아가 탄생하면서 다시 한 번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모두들 양국의 국가통합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내 좌파 세력들조차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합칠 수는 없지만 국가통합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히틀러 본인도 수감 시절에 쓴 나의 투쟁에서 경제적으로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양국의 국가통합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가통합을 반대하는 것은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였다.[1] 1934년 오스트리아 총리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암살당한 직후 즉각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여 오스트리아 독립을 수호했던 것이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을 거치면서 이탈리아는 독일과 밀착하고 있었고 독일은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병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한편, 독일의 경제개발 4개년 계획의 최고책임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목표달성이 어려워지자 오스트리아 은행의 금, 그리고 알프스의 지하 자원을 획득해서라도 목표치를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적극적으로 병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4개년 계획의 목표 달성은 괴링의 2인자 입지를 보다 공고히 하고, 경쟁자들(파울 요제프 괴벨스,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2.12 독-오 정상회담과 이의 파기[편집 | 원본 편집]

이 문제로 독오 양국은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 1938년 2월 12일 독일 남부 베르히테스가덴의 별장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양측이 모두 희망했던 것인데,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Kurt Schuschigg)는 히틀러와의 담판을 통해 어떻게든 오스트리아의 독립권을 보장받기를 희망했고, 독일은 주 오스트리아 대사 프란츠 폰 파펜 등이 중심이 되어서 슈슈니크 내각을 붕괴시키거나 최소 타격을 주고 이를 기반으로 양보를 받아내고자 하였다. 그밖에도 히틀러는 내부적으로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려 있어 이를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회담 초기부터 히틀러는 군사적 침공을 할 수 있다는 협박까지 들먹이며 슈슈니크를 강력하게 압박했고, 어떻게든 히틀러와 담판을 해보려던 슈슈니크는 금새 저항의지를 상실하고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단, 이때 히틀러가 바로 국가통합을 요구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나치당 지도자인 아르투어 자이스 잉크바르트(Arthur Seyss Inquart)를 내무장관에 기용할 것, 그리고 내무장관에게 경찰 지휘권을 넘길 것 단 2개만을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킨 것이다. 히틀러는 아직 오스트리아 완전 병합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며 점진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를 토대로 2월 20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가통합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12 회담과 2.20 제국의회 연설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이 마치 바로 국가통합이라도 된듯 오스트리아 전국에서 폭력행위를 일삼으며 통합 반대파와 유대인 등을 공격하고 오스트리아 국기를 내리고 하겐 크로이츠를 내거는 등 통제불가능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사실 히틀러도 이를 염려하여 슈슈니크와의 회담 합의, 그리고 잉크바르크의 건의에 따라 오스트리아 나치당 내부 초강경파를 숙청했지만 이미 상황은 잉크바르트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내몰렸다.

그리고 이는 잉크바르트뿐만 아니라 슈슈니크에게도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슈슈니크는 어떻게든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3월 9일 수요일, 2.12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는 전 국민 대상의 국민투표 계획을 발표한다. 투표는 3월 13일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국민투표는 독일과 나치도 주장하는 바였지만 문제는 문구였는데 슈슈니크가 준비한 투표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자유롭고 독일어를 쓰고 독립적이고 사회적이며 기독교를 믿고 통일된 오스트리아를 지지하는가?
평화와 노동을 지지하는가? 
자신은 국민과 조국의 편이라고 밝히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을 지지하는가?

도저히 반대표가 과반을 넘길 수 없는, 즉 오스트리아 독립 찬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투표 문구로, 고의적인 찬성 유도형 문구였다. 하지만 슈슈니크로서도 어쩔 수 없던 것이, 오스트리아 나치당 아니더라도 상당수 국민들이 합병에 찬성하고 있어서 이런 문구라도 내놓지 않는 이상 주권독립국가 오스트리아를 지켜낼 수 없었다. 동시에 슈슈니크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외교관과 접촉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또 슈슈니크는 상당히 날짜를 잘 고르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당시 독일의 지도부는 별 생각 없이 흩어져 있었다. 영국대사였다가 외무장관이 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는 영국으로 돌아가 이임인사를 하고 있었고, 괴링은 프리치 재판을 맡기로 되어 있어서 지방에 있었으며 공군의 2인자 에르하르트 밀히스위스에서 휴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사실상 군의 1인자로 급부상한 발터 폰 라이헤나우이집트를 방문 중이었다. 독일 지도부가 제대로 대응할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슈슈니크는 히틀러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전격 합병[편집 | 원본 편집]

슈슈니크의 국민투표 발표 당일인 3월 9일 오후, 이미 히틀러는 지방에 있던 고위지도자들을 모조리 베를린으로 소환한 상태였다. 이후 독일 지도부는 오스트리아 국민투표 보이콧 유도, 역으로 국민투표에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했지만 히틀러에 의해 묵살되었다. 히틀러는 다음날인 3월 10일 오전, 빌헬름 카이텔을 즉각 호출하여 오스트리아 침공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 날 오후, 히틀러는 투표가 시작되기 전인 3월 12일 토요일에 독일군을 진주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병합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무솔리니에게 양해를 구하는 외교전문이 발송되었다.

3월 11일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틀러는 슈슈니크에 최후통첩을 보내어, 국민투표의 2주 연기, 슈슈니크의 총리직 사임과 잉스바르크를 후임 총리로 지명할 것,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모든 활동 제약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며 거부시 침공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2주 연기는 받아들였지만 나머지 조항은 완강히 거부했고, 영국과의 외교채널을 열며 필사적으로 반격을 모색했다. 그러나 영국 외무장관 헬리팩스 경으로부터 부정적인 답변이 들려오자 절망한 슈슈니크는 오후 3시 30분 총리직을 사임했다.

오스트리아 대통령 빌헬름 미클라스는 잉스바르크를 후임 총리로 임명하는 서류에 결재하지 않으며 최후통첩을 거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슈니크는 오후 8시 라디오 연설로 자신의 사임을 밝혔고, 이에 기뻐하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이 전국의 관공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미클라스는 잉스바르크릐 총리 임명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를 기다리다 못한 히틀러가 마침내 독일군에 오스트리아 진주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인 오후 10시 30분, 로마로부터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겠다는 메시지가 나오자 베를린은 환호했고, 빈은 절망에 빠졌다. 마지막 구원줄이라 여긴 이탈리아마저 독일 편에 서자 미클라스 대통령은 결국 잉스바르크를 총리로 임명하는 것에 동의했다.

총리가 된 잉스바르크는 즉시 베를린에 독일군 진주를 중지해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히틀러는 거부했다. 결국 3월 12일 새벽 5시 30분을 기해 독일군 선발대가 국경을 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히틀러도 같은 날 오후 4시 자동차편으로 국경을 넘어 출생지 브라우나우에 도착했고, 오후 8시에는 실질적인 고향 린츠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연도로 나아 린츠가 배출해낸 자랑스러운 위인우엑의 금의환향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며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3월 13일에도 히틀러는 린츠에 머물면서 부모의 묘소에 조화를 올리는 개인적 행동과 함께 합병에 대한 구체적 지시를 내리고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 응하며 합병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다시 한 번 연락하며 이탈리아의 지지를 재확인했다.

내 입장은 같은 축을 이루는 두 나라의 선린 관계를 고려한 것입니다.
1938년 3월 13일,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를 죽어도 잊을 수가 없어서 아프리카에 병력도 파병해주고, 실각해주니 구출도 해줬다 카더라
1938년 3월 13일,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

같은 날 5시, 오스트리아 각료 회의에서 독일측이 내놓은 합병안에 대한 심의에서 각료 전원이 만장일치로 합병을 추인했다. 미클라스 대통령은 합병안에 서명을 거부하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으며, 대통령 공백으로 권력을 독차지한 잉스바르크에 의해 합병이 승인되었다. 3월 14일 월요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도착하여 열광적인 군중의 환호를 받았고 다음날인 3월 15일에 군중연설로 통합 당위성을 설파한 다음 오스트리아 군의 사열을 받았으며 인니처 추기경으로부터 오스트리아 카톨릭 교회의 지지를 약속받았다.

베를린으로 귀환한 히틀러는 3월 18일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4월 10일에 새로운 제국의회 선거와 함께 양국에서의 합병찬반 투표 및 지도자 신임 투표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이때 찬반투표의 문구는 아래와 같다.

당신은 1938년 3월 13일에 실시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재통일에 동의하고 우리 총통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하는가?[2]

4월 10일 선거 결과 독일에서는 99.08%, 오스트리아에서는 99.75%의 압도적 찬성표 속에 양국의 통합이 승인되었다. 투표 과정에서 상당한 부정과 압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투표 결과를 뒤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오스트리아인 대부분이 통합에 적극 찬성하는 상황이었다.

통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말로는 국가간의 대등한 통합이었지만 애당초 인구, 경제력, 면적 등 모든 면에서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기에 대등한 통합이 될 수 없었다. 독일 인구는 6천만 명을 넘긴 반면,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천만 명이 채 되지 못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오스트마르크 주로 재편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 직후 연합국 점령시기를 지내다가 1955년 연합국 철수와 함께 재독립했고, 독일과의 재통합을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독일과의 통합에 반대한 미클라스 대통령, 슈슈니크 총리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미클라스는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연금되었고, 슈슈니크는 감옥에 갇혔다가 독일 항복 후 오스트리아의 독립까지 지켜보았다. 슈슈니크는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 외에도 나치가 탄압하는 좌파와 유대인들은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는데, 독일의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오스트리아에도 즉시 적용되면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은 망명을 떠나기 시작한다.

외교적으로는 무솔리니의 병합 묵인에 고마워한 히틀러가, 독일계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 티롤[3]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독일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국외지역 영토 중 히틀러가 유일하게 영유권 포기를 선언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경우이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FIFA 월드컵 본선 역사상 기권승이 딱 1번 존재한다.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1라운드 8경기 스웨덴과 오스트리아의 경기인데, 월드컵이 열리기 3달 전 오스트리아가 이 사건으로 사라지면서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스웨덴은 8강에서 쿠바를 8:0으로 대파하고 4강까지 나아갔으나 헝가리에 1:5 패, 3/4위전에서 브라질에 2:4 패배를 당하며 4위에 그친다.

같은 대회의 독일은 오스트리아 출신 선수들을 흡수하여 전력을 극대화시켰으나 1라운드 스위스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후 재경기에서 2:4로 패배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며 1라운드 광탈한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출전 역사상 불참한 1930년 1회 대회와 참가를 금지당한 1950년 4회 대회를 제외하면, 1라운드에서 광탈한 것은 2015년 현재 이 대회가 유일하다.꼴 좋다

참고로 월드컵 직전 양국 통합 기념으로 열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기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을 2:0으로 이겼다.

각주

  1. 의외로 영국프랑스는 오스트리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이는 알프스의 내륙국인 오스트리아를 도와줄 현실적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데다가 명분적으로도 개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찬성을 뜻하는 Ja의 기표칸이 반대 기표칸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 투표지 자체도 불공정하게 제작된 것.
  3.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승전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