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검의 밤

1934년 6월 30일에서 7월 2일에 걸쳐 독일 전역에서 행해진 돌격대에 대한 대규모 숙청 사건. 아돌프 히틀러 1인 독재의 기반이 더더욱 확고해졌으며, 나치당 사병집단인 돌격대가 해체되고 대신 전 국가가 나치당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한다.

1 배경[편집]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된 이래 약 1년여간 히틀러의 독재권력은 점점 확고해지고 있었다. 나치를 제외한 모든 정당은 사라졌으며 종교계와 노동계도 나치당이 빠르게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헌법상 상당한 권한을 가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건재하였으며[1] 군부는 아직 나치가 장악하지 못한 사실상의 독립 세력이었다. 동시에 당 내부로는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가 집권까지의 공훈을 내세우며 규모를 키우는 중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 돌격대였다. 룀과 돌격대는 히틀러 총리 취임 이후 물만난 고기처럼 제2의 혁명 운운하며 무분별한 폭력행위를 내세웠다. 이들의 폭력 행사 대상은 공산당, 유대인, 구 사회민주당 세력, 노조, 종교인, 외국인 등 다양하였으며 이러한 돌격대의 행동을 제어해보려는 히틀러의 시도는 실패하고 있었다. 비록 1당독재는 완성했지만 대통령, 군부가 건재하고 히틀러 개인의 절대권력이 확립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더군다나 룀은 자중하지 않고 그 활동범위를 더더욱 넓혔는데, 1933년 12월 정무장관으로 입각한 룀은 국방장관을 희망한다고 하여 군부를 아연실색케 했다. 룀은 돌격대를 제2의 군대로 전환, 사실상 군까지 장악하고자 했고 독일 군부는 일개 정치깡패 집단에게 군부가 예속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또, 돌격대에서 히틀러 개인숭배대신 룀 개인숭배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나치당과 히틀러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룀과 돌격대가 군사권까지 장악하면 히틀러는 룀에 의해 제거될 수도 있고, 이는 히틀러와 다른 나치당 공신들(루돌프 헤스, 헤르만 괴링, 그리고 친위대로 급부상하던 하인리히 힘러)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는 돌격대의 월권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 메시지를 계속 베를린의 총리관저로 보내고 있었으며, 대통령 힌덴부르크도 건강이 위독한 상태에서도 히틀러에게 제2의 혁명에 대한 우려와 이의 해결을 독촉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외교접촉을 통해 돌격대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비제한을 우회하는 편법적 군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돌격대에 의한 자국민 피습을 강력히 항의하고 있었다. 돌격대 문제는 그야말로 히틀러의 아킬레스 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킬레스 건을 노리고 독일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히틀러와 협력해 그를 총리로 만든 독일 보수파는 히틀러의 힘에 잠시 눌려 있었지만 돌격대 사태가 악화되자 이를 이용해 히틀러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거나 못해도 히틀러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고 정국 주도권을 자기들에게 되돌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1934년 6월 17일 프란츠 폰 파펜의 마르부르크 대학 연설로 실현된다.

...정부는 '약자만이 비판을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옛 속담을 상기해야 한다... 위대한 인물은 선전에 의해서 만들어낼 수는 없다...국민과의 밀접한 접촉과 결속을 바라는 자는 국민의 이해력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손에 잡은 고삐 끝에다 국민을 영원히 붙들어 매놓아서는 안 된다...긴안목으로 보면 아무리 그것이 뛰어난 것이라도 조직이나 선전만으로는 신뢰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무력한 국민을 선동하거나...협박하는 것만으로는 신뢰와 헌신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길은 국민과 터넣고 얘기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바보 취급을 받은 인간은 믿으려 해도 신뢰를 가질 수가 없다. 이제야 말로 우리 모두가 형제적 우정으로 손을 잡고 우리 국민 동포를 모두 존경하며 진실한 사람의 일을 방해하지 말고 광신자의 입을 막아야 할 때이다.
1934년 마르부르크대학에서의 어느 아이러니한 연설

이 연설 직후 히틀러는 파펜과 만나 파펜의 연설내용을 정책에 반영할 것이고 특히 돌격대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행한 파펜 연설의 언론보도 금지를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파펜에게 이렇게 양보해야 했을 정도로 히틀러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6월 21일, 노이데크 성[2]에서 육군 대장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며 최악의 경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 권한으로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가 일시적으로 정치전면에 등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힌덴부르크 역시 직접적으로 혁명분자를 언급하며 돌격대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군사력이 없는 히틀러로서는 힌덴부르크와 군부가 결탁해 계엄령을 선포한다면 도저히 이에 맞설 수단이 없었다.

6월 25일, 루돌프 헤스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공개적으로 제2의 혁명 운운거리는 세력(돌격대를 지칭)은 배신행위를 하는 것이라 규탄하였다. 힘러와 친위대는 그 작은 규모로 군부에 위협이 되지 않음을 어필하며 군부로부터 무기와 차량을 지원받아 돌격대를 들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래놓고 나중에 무장친위대를 만들어서 군부를 휘어잡으려 하지 같은 날 히틀러-블롬베르크 회동에서 히틀러는 돌격대 지도부를 일거에 체포할 계획을 밝혔고 블롬베르크로 대표되는 군부는 이를 지지했으며, 6월 27일 친위대의 제프 디트리히는 군부로부터 거사를 위한 무기와 탄약 지원을 약속받았다.

2 장검의 밤[편집]

6월 29일 오전, 룀에게 돌격대 지휘관들을 뮌헨의 비스제 온천으로 소집하여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룀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 명령을 따랐다. 6월 30일 오전, 제프 디트리히는 친위대 2개 중대를 인솔하고 뮌헨에 도착했고 뒤이어 히틀러 본인도 측근들과 합류했다. 직후 히틀러는 마중나온 뮌헨 돌격대 지휘관 2명을 6월 29일 가두시위[3]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뒤이어 직접 친위대 및 경찰 병력을 대동하고 비스제 온천 인근 돌격대가 투숙하고 있던 호텔을 급습, 아직 자고 있던 룀을 비롯한 돌격대 지도부를 전원 체포한다.

같은 날 정오경, 히틀러는 뮌헨 나치당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룀의 쿠데타 기도를 폭로하고 룀과 그 동조자들을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시점에서 돌격대 지휘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쿠데타 기도 선언과 함께 베를린에서 친위대와 경찰이 전격적으로 작전을 개시, 돌격대와 함께 일부 반나치 세력들을 급습했다. 헤르만 괴링이 주도한 이 습격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브레슬라우 등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시작되었다. 돌격대 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도전하던 보수파 인사들, 그리고 기존 히틀러의 정적들이 모두 제거 대상이었다. 이 정적들에게는 룀의 쿠데타 기도에 가세했다는 누명이 씌워졌다.

6월 30일 밤, 히틀러는 베를린으로 귀환해 괴링 등과 추후 계획 특히 룀의 처단 문제를 논의했다. 히틀러는 룀의 처분을 두고 고민했으나 결국 처형하기로 마음먹고 대신 명예롭게 자결하라 지시하였으나 룀은 자결을 거부하였고 결국 친위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3 주요 피해자[편집]

에른스트 룀(Ernst Röhm) : 나치당 창당 초기부터 뮌헨 맥주홀 쿠데타를 거쳐 집권때까지 히틀러와 협력하고 크게 공헌한 사실상의 2인자였다.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돌격대의 규모를 불렸고 급진적인 제2의 혁명 주장과, 군부까지 집어삼키려는 욕심이 결국 히틀러의 경계심과 주변의 반발을 샀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 : 군 출신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를 지냈다. 히틀러 집권 이후 주요 보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히틀러를 견제했고, 결국 6월 30일 자택에서 습격받고 아내와 함께 운명을 달리 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Gregor Strasser) : 나치당 초기 멤버이며 당 내 좌파를 대변했다. 당권과 노선을 놓고 히틀러와 대립하다 힘을 잃었고, 이때의 일로 잠재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히며 희생되었다.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Gustav Ritter von Kahr) : 뮌헨 맥주홀 쿠데타 당시 바이에른 주지사. 맥주홀 쿠데타의 일을 잊지 않고 있던 히틀러에 의해 희생자 명단에 올랐다.

에드가르 융(Edgar Jung) : 프란츠 폰 파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문제의 마르부르크 대학 연설의 원고를 쓴 사람이었다. 역시 돌격대와 아무 관계도 없음에도 히틀러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제거.

헤르베르트 폰 보세(Herbert von Bose) : 프란츠 폰 파펜의 공보비서. 사실 보세는 불행한 케이스인데, 파펜 대신 희생된 경우이다. 파펜은 슐라이허와 같은 전직 총리이자 히틀러 집권에 기여한 바 있고, 무엇보다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어서 히틀러가 섣불리 제거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마르부르크 연설로 서방 국가의 주목까지 받고 있어 섣부르게 파펜을 제거했다 외교문제까지 유발할 수 있어서 파펜은 살려두고 대신 경고 목적에서 공보비서였던 보세를 죽인 것. 프란츠 폰 파펜은 이후 가택연금당한다.

빌헬름 슈미트(Willi Schmid) : 그냥 평범한 음악 평론가. 이 사람은 보세보다 더 불행한 케이스인데, 원래 친위대들이 노렸던 것은 루드비히 슈미트다. 루드비히 슈미트는 당시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있던 오토 슈트라서[4]의 측근인데 해외망명한 오토 슈트라서 대신 그 측근을 제거하려 한 것. 그런데 이름을 혼동해서 엉뚱한 사람이 죽은 것이다.

4 결과[편집]

강철처럼 항구불변한 법만이 폭동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심판했어야 한다고 이 사람을 나무란다면 이런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 나는 독일 민족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독일 민족의 최고 재판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1934년 7월 13일,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중,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722p (2009)

장검의 밤은 명백한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었고 어떠한 법률적 권한도 없이 이루어진 불법행위였다. 실제로도 이에 대한 불만이 보수파 정치인들 사이에 있었고, 나치당 내부에서는 룀에 대한 동정적 시각도 있었다. 히틀러는 이를 7월 13일 의회 연설을 통해 정면으로 돌파했고, 괴벨스의 선전이 더해지며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보수파는 슐라이허 전 총리와 파펜의 측근들이 죽은 것을 보고 겁에 질렸으며 파펜 본인도 겁먹고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한채 조용히 있었다. 히틀러의 폭주에 제약을 걸 수 있던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문제많은 돌격대를 처단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고, 무력으로 히틀러를 위협했던 군부는 돌격대 제거로 군부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 사라지자 이에 만족하여 히틀러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그리고 친위대가 돌격대보다 더 커지게 되는데...

또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장검의 밤 사건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는데, 그동안 돌격대의 계속된 폭력활동과 빈대와 같은 행태에 겁먹고 지쳐있던 시민들은 그런 돌격대를 제어해준 총리의 결단력있는 행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돌격대의 숙청 과정에서 합법적인 수단이 전무했다는 것에 대해 문제삼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 극소수도 공포분위기에 짓눌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이후 히틀러 1인 독재에 대한 도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뒤이은 힌덴부르크의 사망과 함께 히틀러의 독재권력은 공고화되었다. 돌격대 숙청의 1등 공신이었던 친위대는 돌격대를 대신하여 히틀러와 나치당의 강력한 무장집단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5 각주

  1.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약간의 시각차가 있다. 종말을 가장 빠르게 보는 쪽은 히틀러가 총리가 된 1933년 1월 30일을, 일반적으로는 수권법이 통과된 3월 24일을, 가장 늦게 보는 시각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1934년 8월 17일을 그 시점으로 본다. 하지만 형식적이나마 바이마르 헌법은 힌덴부르크 생전에 유지되고 있었고, 힌덴부르크는 이 헌법에 기반하여 히틀러와 대립할 수 있었다.
  2. 힌덴부르크가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건강이 악화된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관저 대신 노이데크 성에서 요양 중이었다.
  3. 6월 29일 뮌헨에서 수천 명의 돌격대가 가두시위를 벌이며 히틀러가 돌격대를 버렸다고 공개비판한 일이 있었다.
  4. 장검의 밤 희생자 중 한 명인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동생이다. 역시 형과 함께 나치당 초기 히틀러와 대립했다. 전후까지 살아남았고, 민족우월주의를 배제하고 좌파적 이념을 강화한 신나치 활동을 벌이지만 당연히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