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한화(韓華) 관구 홈페이지(한국, 대만 지역 관할)[1]

가톨릭의 여자 수도회로, 교육사업을 주로 한다. 전 세계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 41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회원(수녀)은 약 2,200여명이고 총 본원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수도회 명칭의 의미[편집 | 원본 편집]

성심(聖心)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을 지칭한다. ‘예수성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의 강생과 성체성사,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모성심’은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이바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일컫는다. 성모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톨릭대사전 참조) 라틴어로는 Cor Sanctissimum, 영어로는 Sacred Heart라고 하며, 일본어로는 ‘세이신’이라고 읽는다.

창설자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편집 | 원본 편집]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 끝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축일 5월 25일)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라 집안은 시골의 소시민이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 만 했고,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소피이 바라는 10살 무렵부터 11살 위의 오빠 루이 바라로부터 엄격하면서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역사, 수학, 물리학, 성경,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등을 두루 학습했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함과 동시에 첫 영성체도 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소피이 바라는, 하느님께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피이 바라가 10대 초반이던 1789~1793년, 프랑스에서는 큰 일이 일어났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교회의 재산을 몰수당했고, 사제들은 교황청에 순명하는 대신 새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당했다. 이에 반발하는 사제, 수도자, 신자들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2] 루이 바라도 이때 처형당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1795년, 루이 바라는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루이 바라 신부는 (새 정부의 눈을 피해) 조용히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으며, 여동생의 학업과 신앙을 지도하는 일도 계속했다. 소피이 바라는 지역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어려서부터 생각해 온 수도 성소(聖召)[3]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봉쇄 수도생활을 생각했지만, 소피이 바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도직에 투신하기로 마음먹는다. 교육, 특히 여성교육에 힘쓰는 수도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1800년 11월 21일, 소피이 바라는 3명의 동료와 함께 첫 서원[4]을 하였다. 이로써 성심수녀회가 창립되었다. 수녀들은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힘썼다. 1865년 5월 25일에 소피이 바라가 선종한 후로도 성심수녀회는 발전했고,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성심수녀회 분원(分院)들과 성심학교들이 세워졌다.

소피이 바라는 1905년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08년 5월 24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25년 5월 24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는 수도회 설립자 39명의 성상이 있는데, 소피이 바라의 성상도 1934년에 안치되었다.

사복 수도회[편집 | 원본 편집]

성심수녀회는 수도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는 수도회이다. 본래 성심수녀회도 수도복을 입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복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라고 한다. 수도복과 사복 모두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물론 비싸고 사치스러운 옷이나 노출 심한 옷은 안 되고, 검소한 차림새를 한다. 머리도 길게 기르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단정하게 커트머리를 한다. 그래도 일단 사복 차림이라서, 성심수녀회 수녀들은 얼핏 봐서는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제외하면) 일반 여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성심학교 학생이나 졸업생 등은 ‘무언가 일반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고 평한다.

성심학교[편집 | 원본 편집]

성심수녀회는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심학교도 수없이 많다. 학교 이름에 성심, 聖心, Sacred Heart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일 가능성이 높다.[5] 성심학교들 중에는 명문학교들이 많다.

전 세계의 성심학교 목록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한국[편집 | 원본 편집]

1955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0대 교구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주교는, 성심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한다. 성심수녀회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듬해인 1956년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신학교가 있던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본원과 성심학교들이 세워졌다. 성심국민학교(여학교),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성심여자대학교는 1964년 강원도 춘천시에 세워졌다.

설립 초기의 성심학교는 소수정예의 명문 사립학교였으며, 유복한 집안의 딸들이 많이 다녔다. 인성교육을 중요시했고, 영어교육도 우수했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에 성심여중고를 졸업한 기업인 조안 리의 회고록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에 의하면, 원어민인 외국인 수녀님이 직접 영어를 가르쳤는데, 철자나 문법보다 발음과 회화를 먼저 가르쳤고, 또한 외국인 수녀들과 영어로 대화할 기회도 많아, 영어 실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성심여대 또한 소규모의 학생들만을 선발해, 학생 전원을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교육받게 했다.

성심여대는 1974년 경기도 부천시에 분교 캠퍼스를 지었고, 1982년 춘천 캠퍼스를 매각하고 부천으로 완전히 옮긴다.[6] 그리고 1995년, 성심여대는 가톨릭대학교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학대학과 의과대학만을 둔 작은 학교였던 가톨릭대는 대규모의 종합대학으로 발전했고, 부천의 성심여대는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이 되었다. 성심여대가 가톨릭대와 통합되어 학교 운영권이 천주교 서울대교구로 넘어간 후로도, 성심수녀회 수녀들은 가톨릭대 성심교정에서 교수 및 교목으로 일하고 있다.

성심국민학교는 여학생만 한 학년당 60명씩 선발하여 교육하는 소규모의 사립학교였다. 당시 한 학급당 수십 명씩 수십 개의 학급으로도 모자라 2부제 수업까지 했던 공립학교에 비하면 놀랍도록 작은 규모였다. 또한 당시에도 사립국민학교(초등학교)는 몇 군데 있었지만, 여학교는 성심국민학교가 유일했다. 성심국민학교에서는 문교부에서 지정한 교과목 외에도 영어가톨릭 교리도 가르쳤고, 졸업생들은 대개 같은 재단의 성심여중고를 거쳐 성심여대로 진학했다. 하지만 1969년부터 서울에서 중학교 무시험 입학이 시행되면서 성심학원의 이러한 교육방침을 지키기 어려워졌고, 학교 운영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성심국민학교는 1977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고, 설립 20년 만인 1982년에 완전히 폐교되었다. 14번의 졸업식을 치르며 성심국민학교는 약 1천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이후 성심여중도 1975년 폐교되고 성심여고만 홀로 운영되다가, 2002년부터 성심여중이 재개교되어 다시 신입생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 성심수녀회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학교는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2개교이다.

일본[편집 | 원본 편집]

일본관구 홈페이지

일본에는 한국보다 훨씬 빠른 1908년에 성심수녀회가 진출해 왔다. 덕분에 한국관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한국인 수녀 지원자들이 일본에 가서 양성교육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성심수녀회는 세이신여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갖추고 있는 여학교로, 한번 입학하면 별도의 입시 없이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는 제도이며, ‘유복한 집안의 딸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미지라고. 자세한 이야기는 세이신여자대학 참조.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1983년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때 순직한 김재익의 누나 김재순과 김재숙이 성심수녀회의 수녀이다. 김재순 수녀는 성심여중고 교사 및 교장에 이어, 성심여대 화학과 교수 및 총장을 지냈다. 김재숙 수녀는 박근혜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다.
  •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한국 성심여대와 일본 세이신여학원이 등장한다. 피천득에게 성심여대 출강을 부탁했던 ‘주 수녀님’은 성심여중고 초창기 교장을 맡았던 중국인 주매분 수녀이고, ‘김 수녀님’은 위의 김재순 수녀이다.
  • 주매분 수녀는 기업인으로 유명한 조안 리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다. 주 수녀는 6년간 각별히 아꼈던 제자 조안 리에게 가톨릭계 대학인 서강대학교 진학을 권했고, 자신과 친분이 있던 서강대 초대 학장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에게 조안 리를 데려가 소개하며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 수녀의 권유대로 조안 리는 1964년 3월 서강대에 입학하지만, 주 수녀의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은 26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에 빠졌고, 4년 후 킬로렌 신부는 환속하여 조안 리와 결혼했다.

각주

  1. 2011년부터 한국관구와 대만관구가 통합되어, 한화관구가 되었다.
  2. 훗날 이들은 순교자로 인정되어 복자로 시복되었다.
  3. 하느님의 부르심. 넓은 의미에서의 성소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모든 직업, 직분, 삶의 방식을 말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성소는 ‘사제수도자의 길로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
  4.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서원함.
  5. 다만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전주성심여중고는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아니다. 전주성심여중고도 가톨릭 미션스쿨이긴 하지만, 성심수녀회가 아닌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6. 강원도 춘천시에 성심여대가 있던 자리에는 한림대학교가 개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