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지연작전

국군의 재편성과 초기 지연작전

한강방어선이 붕괴한 이후 한국정부는 국군을 전면 재편하였다. 먼저 이승만은 6월 30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을 해임하고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에 육군총참모장이 육군과 동시에 해군과 공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7월 8일 대전에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제외한설마 여기까지 밀리겠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정일권은 계엄사령관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후 정일권은 전선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먼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1군단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기존의 8개 사단을 편제를 5개 사단으로 재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편제가 건재한 제6사단과 8사단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했고 나머지 혼성사단을 전면 재편하였다. 이를 통해 국군은 전쟁 직전 8개 사단 2개 직할연대에서 1개 군단 5개 사단 3개 독립연대로 편성되었다.

부대 지휘관 편성부대
제1군단 김홍일 소장 수도 • 제1 • 제2 사단
수도사단 이준식 준장->김석원 준장(7.7) 제1 • 제8 • 제18연대
제1사단 백선엽 대령 제 11 • 제12 • 제13연대
제2사단 이한림 대령 제5 • 제16 • 제19 연대
제6사단 김종오 대령 제2 • 제7 • 제19연대
제8사단 이성가 대령 제10 • 제 21연대
기갑연대 유흥수 대령 제1 • 제2 • 제3대대
제23연대 김종원 중령 제1 • 제2 • 제3대대
제17연대 김희준 중령 제1 • 제2 • 제3대대

[1]

이와 같은 육군본부의 사단재편성 명령은 7월 5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떨어졌다. 이에 시흥사는 평택으로 철수 및 방어진지 편성과 동시에 사단 재편을 이루었다. 사단을 재편하는 동안 김홍일 군단장은 작전참모에게 오산 북쪽 스미스부대가 있는 곳으로 파견 미군들이 2.36‘’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군의 2.36‘’인치 로켓포로도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2]

한국이 지연작전을 펼치는 동안 유엔은 유엔군 창설을 결의한다.(7월 7일) 이에 최초의 유엔군이 창설된 것이다. 유엔군은 먼저 미국 대통령에게 유엔군사령관 임명에 대한 권한과 통제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미국은 당시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선임한다. 이러한 조치 속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직접 취했다. 이승만은 7월 15일 맥아더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에게 한국의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이양한다고 밝혔다.’‘’[3]

이로써 육군은 초기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조직을 확보했고, 미국 및 유엔군의 지원이 확실화 되면서 국군의 목표도 명확히 설립되었다. 이후 국군은 미군과 협조하면서 최대한 북한군의 진군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국군의 초기 지연작전은 경의적이었다고만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서울이 함락된 이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 것도 기적이며, 동시에 철수와 계속되는 전투, 부족한 식량 속, 수면 부족 등 전투 피로도가 누적된 상황에 심지어 화기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도 북한군을 4일 이상 저지하는데 성공했다.[4] 특히 시흥사 전면은 한강이라는 천혜의 장애물이 있었으나 김포사는 평지에서 북한군 6사단과 맞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전투를 벌어야 했으며, 그 전투에서 적의 진출을 최대한 저지하여 한강선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물론 국군의 이러한 방어전은 미군의 공군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미 공군은 국군의 부족한 화력을 메워주었다. 미 공군은 화포와 중장비를 서울에서 상실한 국군에게 단비나 마찬가지였다.[5]

낙동강 전선

한국군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쥐어짜내며 닥치는 대로 전선으로 보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군의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후방에서 학도의용병들까지 모집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몇 시간동안 기초훈련만 시키고 최소한의 무장만 준 채 전선에 투입했다.[6] 미국도 일본에서 병력을 긁어내어 바로바로 투입했고, 본토의 예비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하면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다.

낙동강 전선에 있어 위기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다부동 전투로 1사단과 미군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왜관 일대에 대한 B-29의 융단폭격이 가해지면서 막아내었다. 두번째는 9월 초의 영천 전투유재흥 장군이 격전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또다른 위기로 통영 함락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에 의한 통영 상륙작전으로 통영을 탈환하고 거제도로 가해지는 북한군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북한군도 한미연합군을 바다 속으로 밀어버리기만 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더 이상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지형도 없었다. 때문에 북한군도 후방의 모든 병력에 남한에서 징집한 병력까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투입하여 공세를 강화했으나 결국 돌파구 형성에 실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반면 미군은 병력과 물자가 빠르게 증강되어 갔다. 아울러 후방의 거점도시들과 보급거점이 맹폭격을 받으면서 전선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공세한계점에 도달했고, 전선 부대도 맹공습으로 대부분의 중장비를 상실했다.[7]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57
  2. 먼저 한국에 도착한 스미스특무부대는 북한군의 전력을 얕보았다. 자신들이 보유한 로켓포로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T-34전차에 대한 악명이 높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투입된 T-34는 개량형이었고,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찍어내던 질 나쁜 탱크가 아니었다. 그러니 로켓포가 안 먹히는 건 당연했다. 무슨 일본군 치하땅인 줄 아나 결국 스미스특무부대는 경부국도방면으로 퇴각하여 국군과 함께 미24사단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버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84
  4. 7일이나 북한군이 서울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3일을 제외한 수치이다.
  5. 물론 오인 폭격으로 인해서 국군의 군수물자를 날려버린다든가, 국군 지휘소를 폭격한다든지 등의 일이 있었지만 이 일로 미 공군의 역할과 공헌을 깎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초기 한국전에서 미 공군의 역할은 컸다.
  6.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학도병 등의 모집에 있어 강압적 징병은 없고 모두 자원 입대이다. 공식 입장일 뿐이지만.
  7. 대표적인 것이 T-34 전차다. T-34를 상대하기 위해 미군은 본토에서 重전차 M26 퍼싱을 급히 공수해왔으나 정작 전차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습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추가적인 전차 지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