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 베어(Teddy bear)는 곰 모양의 봉제인형을 말한다.
20세기 초 미국의 모리스 미첨(Morris Michtom)과 독일의 리하르트 슈타이프(Richard Steiff)가 각각 만들었다. 동시대에 만든 것이지 테디 베어 발명에 서로 협력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별명인 "테디"에서 이름이 유래했다.[1]
그래서 '테디베어의 날'인 10월 27일은 루스벨트의 생일과 동일하다. 큰 인기를 끌던 이 봉제인형은 여러 문화적 콘텐츠로도 활용되어 장난감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정도이다.
초기의 테디 베어는 새끼 곰의 모양새를 그대로 모방한 형태였으나, 이후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으며 플라스틱과 같은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테디 베어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랜시간 폭넓게 인기를 끌다 보니 역사성 있고 희귀한 테디 베어는 수집품목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테디 베어는 현재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는 장난감계의 아이돌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발명[편집 | 원본 편집]
앞서 말했듯 '테디 베어'란 이름은 미국의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서 나왔다.
1902년 11월, 루스벨트는 미시시피 주지사 앤드루 H.롱기노에게 초대받아 미시시피주로 떠났다. 그 당시 미시시피 주는 루이지애나주와 경계선을 두고 다투고 있었기에 이를 중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는 공식일정과 별도로 짬을 내어 곰 사냥을 하러 갔는데, 이는 평소 사냥을 즐기던 루스벨트의 취향 때문이었다.
다만 사냥터엔 사냥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사냥꾼 대부분은 이미 몇몇 동물들을 사살한 상태다.
루스벨트의 사냥이 죽을 쑤는 가운데 마침내 홀트 콜리어를 위시한 수행원들이 한 새끼 미국흑곰을 몰아 실컷 두들겨 팬 뒤 나무에 묶어놨다. 그리고는 루스벨트에게 막타를 날리라고 제안했는데 루스벨트는 사냥꾼 답지 않은 일이라고 거절했다.
다만 곰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일화는 당시 동행중이던 클리퍼트 베리먼이 1902년 11월 16일에 워싱턴 포스트지에 올린 시사만평으로 알려졌다.
이름하야 '미시시피 강가의 그림'이다. 더불어 '루스벨트가 선을 긋다.'라는 설명도 함께 덧붙여졌다.
물론 이건 사냥터에서의 일화와 미시시피 주의 경계선분쟁을 비유한 말장난이다. 어찌됐든 루스벨트의 이 일화는 만평이 게재된 뒤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널리널리 퍼졌다.
그리고 곰 이미지는 루스벨트의 개인적 성향과 맞물려 이후에도 그와 함께했다.
이 삽화를 본 모리스 미첨이 '테디 베어'를 만들었다.[1] 미첨은 뉴욕 브루클린, 베드퍼드스타이베선트에서 아내와 함께 잡화점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일화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이 만든 새끼곰 인형에 '테디의 곰'이라 이름붙여 팔았다. 모리스는 편지를 보내 루스벨트로부터 이름을 써도된다는 허가도 받았다.
루스벨트의 인기와 맞물려 이게 대박났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후 Ideal Novelty Toy Company라는 회사를 세웠다. 1907년에 설립했다. 모리스 사후 'Ideal Toy Company'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 붐 시대에 말그대로 폭풍성장을 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성장, 현재는 미국에서 가장 큰 장난감인형 회사가 됐다. 미첨 혼자 세운 회사는 아니다. 테디베어가 인기를 얻자 상사회사를 운영하던 버틀러 형제의 눈에 들어 가게의 모든 곰인형들이 인수됐고, 이후 버틀러 형제와 모리스가 합심해 Ideal Novelty Toy Company를 만들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완구기업인 슈타이프(Steiff)사가 존재했다. 마르가르테 슈타이프가 만든 이 회사는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각종 동물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그녀의 조카인 리하르트 슈타이프 또한 1897년에 입사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취미삼아 새끼곰을 그리던 경험을 살렸다.
리하르트는 전 예술 학도였는데, 종종 동물원을 방문해 동물들을 그렸다. 가장 많이 그리던 게 새끼곰이다.
아무튼 속에 무언가를 채운 곰인형을 디자인했다. 이 디자인으로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진게 1902년. 슈타이프사는 1903년 라이프치히 장난감 박람회에 완성품을 처음 공개했다. Bar(=Bear) 55PB라는 이름이다. String-Joint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게 지나가던 미국 바이어의 눈에 띄어 곰인형 3000개를 계약체결했다. 다만 유럽 사업가들에게는 별 반응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한창 '테디 베어'열풍이 높아지던 때라 시기가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 슈타이프사의 곰인형이 미국에 대량으로 들어와 '테디 베어'란 이름이 더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슈타이프사의 기록으로는 55PB가 생산된 건 맞지만 이게 미국에 도착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55PB같은 타입도 현재까지 보인적이 없다.
다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53년 군터 파이퍼의 기록에서는 55PB가 현재까지 유지될 만한 내구성이 없었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 있다.
신기하게도 이 두개의 곰인형이 만들어진 시기가 1902년으로 동일하다.
다만 디자인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미첨의 곰인형이 베리먼의 삽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사랑스럽고 넓은 눈을 가진 모양새라면 슈타이프사의 곰인형은 구부려진 등과 긴 주둥이를 가진 모습이다.
모리스의 곰인형에 비해 좀 더 '진짜 곰'에 가까운 모양. 슈타이프 곰인형의 눈은 동그랗고 검은 단추눈인데, 이건 회사에서 만들었었던 코끼리 인형의 눈을 차용한거라 한다. 이후 많은 곰인형 제조사들이 이를 따라했으며 곰인형 눈의 표준이 되었다.
더불어 이때는 대서양 횡단 통신이 그리 완전하지 않은 시기였다. 즉 미첨이든 슈타이프사든 서로의 발명품에 대해 전혀 모르던 상황에서 이런일이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리하르트 슈타이프는 미국에서의 테디 베어 열풍을 미국인 사업가와의 계약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열풍[편집 | 원본 편집]
1906년 테디 베어 열풍이 미국을 강타한다. 모리스 미첨과 슈타이프사의 곰인형 외에 다른 제조업체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 다들 이 빅 웨이브에 가세한 상태다.
숙녀들은 이 곰인형을 가지고 오만곳을 돌아다니고 아이들은 이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곰돌이와 사진찍느라 여념없었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이 곰인형을 마스코트로 내세웠다. 그리고 재선 성공했다. 이 테디 베어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으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됐다.루스벨트 베어란 이름도 쓰였다. '루스벨트 베어 시리즈'라던가 '테디 베어의 피크닉'이라던가.
곰인형의 모양새도 점점 다양해졌는데 색도 갈색 일색에서 다채롭게 바뀌고 포즈나 소품들도 조금씩 추가됐다.
인기가 워낙 많다보니 미국내에 잔뜩 생긴 테디베어 제조사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독일에서 수입되는 엄청난 양의 테디 베어들과는 말그대로 각축전이 벌어졌다.
독일이 워낙 장난감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데다, 슈타이프사를 필두로 한 독일의 빙(Bing), 슈코(Schuco), 헤르만(Hermann)같은 회사들이 고퀄리티의 테디 베어들을 마구 뿜어냈기 때문이다. 독일의 강력한 기술력을 맛본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그저 스러져갔다.
미국에서의 광풍은 유럽으로 번졌는데 영국에서는 J.K. 파넬의 회사가 첫 스타트를 끊었다. 여기서 파생된게 그 유명한 위니 더 푸. 사실 원래의 푸는 크리스토퍼 로빈 밀른이 1921년 그의 첫 생일 선물로 어머니에게서 받은 파넬 곰인형이였다. 에드워드 테디, 플레인 테디라고 불리는 'Alpha Farnell'이다.
그래서 그는 5년 후 그의 아버지에게 '위니 더 푸' 책을 받게 되었는데, '위니 더 푸'라는 이름은 아들의 곰인형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던 A.A.밀른에 밀른이 동물원에서 '위니'라고 부르는 곰의 이름과 아룬델에서 키우던 애완백조 '푸'의 이름을 합쳐 만든 것이다.
3권으로 이루어진 푸 시리즈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밀른이 가진 장난감에서 기초했지만 푸만은 파넬 곰이 아닌 슈타이프사의 곰인형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이후 디즈니가 판권을 사들여 재창조했으며, 현재는 온갖 곳에서 이 둥글둥글하고 노란 곰을 볼 수 있다.
1920년대 ~ 40년대[편집 | 원본 편집]
유럽에서 벌어진 4년간의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를 제외하고 테디 베어는 여전한 인기를 끌었다. 초기의 테디 베어는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꿰메만든 수작업품이라 지금처럼 어디에서나 굴러다니는 곰인형이 아니었다.
더불어 사람들의 취향도 고퀄리티의 수공예품 테디 베어에 맞춰있었다. 독일은 테디 베어의 주요 생산지였으나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침체기를 겪었고, 대신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테디 베어 산업이 성장했다.
이때문에 곰인형의 모습도 전과 달라졌다. 검은 단추 눈도 유리 눈으로 바뀌고, 곰인형 안에 대팻밥을 채워넣던 기존 방식은 자바솜이나 인조실크같은 걸 넣은 좀더 부드러운 스타일로 탈바꿈했다. 독일 슈타이프 사의 곰인형이 그랬다.
유럽과는 달리 전쟁의 여파가 크게 미치지않은 미국에서는 테디 베어 산업이 계속해서 성장했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 테디 베어를 생산하고 있는 니커보커 장난감 회사가 1920년에 세워졌다.
그리고 9년뒤인 1929년 대공황에 직격탄을 맞았다. 금융공황에 휘청이던 많은 회사들은 문을 닫거나, 고퀄리티를 포기하고 싼 가격에 생산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20년대와 30년대에는 음악이 흘러나오거나 기계장치를 장착한 곰인형들이 성행했다. 전세계 곰인형 제조사들이 이런 테디 베어를 생산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선두에 선 기업이 바로 독일의 슈코(Schuco)와 빙(Bing). 여기서 만들어진 곰인형은 걷기도 하고 춤도 추고 공놀이도 하고. 심지어 재주도 넘었다.
다만 이런 쿵짝이는 곰인형 열풍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노동자든 공장이든 전쟁에 주력하느라 테디 베어를 만들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몇몇 기업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1950년대 ~ 70년대[편집 | 원본 편집]
전통적인 테디 베어 회사들은 그들이 만든 테디 베어가 천연섬유로 만들어진 고퀄의 수예품임을 자부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죄다 바뀌게 되었다. 전후 시기 빨 수 있는 장난감을 선호하는 풍조에 따라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이어들도 테디 베어 제조업체에 이런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이로 인해 곰인형들은 나일론이나 아크릭 플러시 천으로 만들어지고 고무로 채워졌으며,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눈을 달게 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회사들이 이런 재료 변화에 힘겹게 적응하는 동안 그들에게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곰인형 폭풍이 있었다. 바로 동아시아에서 저가 대량공세로 꾸역꾸역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테디 베어였다.
아무리 오래되고 튼튼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극동의 막강한 힘에 짓밟혀 적지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저가 테디 베어들의 습격이었다.
현재[편집 | 원본 편집]
그럼 단순히 장난감으로 치부되던 테디 베어가 어떻게 지금같은 위치에 올랐을까?
저가 곰인형의 맹공격 이후, 테디 베어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제조사가 아닌 배우에 의해서였다. TV에서 영국 배우 피터 불(Peter Bull)은 공공연히 테디 베어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이 곰인형이 성인에게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설파했다.
그의 베밍아웃 이후 2000개에 달하는 편지가 도착했고, 피터는 테디 베어 덕질에 혼자가 아니라는 훈훈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1969년에는 그의 테디 베어 사랑에 관한 책까지 냈다.[2] 'Bear with Me'라는 제목의 이 책은 테디 베어를 부둥부둥하던 수천명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피터의 테디 베어 사랑은 전에 비해 인기가 시들시들했던 테디 베어가 다시 재기하는데 이상적인 풍토를 만들었다.
테디 베어가 더이상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성인의 수집품으로 컴백한 것이다.
그리고 테디 베어가 공산품 일색에서 탈피하는데 시초가 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비버리 포트였다.
1974년 미국, 테디 베어 만드는걸 좋아하던 인형제작자 비버리 포트가 인형 쇼에 자신이 만든 테디 베어로 도전한다. 쇼에서 비버리는 그녀가 만든 인형 중 하나인 테어도어 B.베어를 손에 든 채 발표했다. 그녀는 다음 해에도 인형 클럽 연맹에서 테디 베어에 대한 슬라이드 쇼를 선보였다. 그녀의 테디 베어에 대한 열정이 미국에서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테디 베어 제작 열풍을 불러왔다.
'테디 베어 아티스트'라는 용어가 바로 이 열풍에서 생겨난 것. 비버리는 '테디 베어 예술의 어머니'로 종종 인용되기도 한다.[3]
현재 테디 베어 아티스트는 수천에 달하고, 열성적인 수집가들을 위해 다양한 테디 베어들을 만든다. 또한 대량의 공산품에 집중하던 회사들도 이런 고퀄리티의 테디 베어를 제작하는데 뛰어들고 있으니 테디 베어 수집가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이런 수집 열풍으로 20세기 초에 생산된 고퀄리티의 수공예 테디 베어는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생산된 테디 베어도 경매에 종종 등장해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수공예 테디 베어는 이미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잡아 시중의 값싼 곰인형과 별도로 활발하게 제작되며, 수제 곰인형에 관한 여러 동호회가 전세계적으로 교류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테디 베어에게 제2의 전성기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태와 제작[편집 | 원본 편집]
초기의 테디 베어는 길쭉한 주둥이와 검은 구슬 눈을 가진 모습으로, 진짜 곰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다만 현대에 와선 큰 눈과 이마, 작은 코를 가지는 경향이 있으며 좀더 아이들 취향에 맞게 귀여운 모양새로 만들어진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북극곰이나 그리즐리, 판다 곰의 생김새를 가진 테디 베어도 있다.
본래 테디 베어는 황갈색 모헤어로 만들어졌다. 현대에는 매우 다양한 재질의 곰인형이 있는데, 흔히 패브릭같은 인조모피로 제작되며 벨벳이나 데님, 면이나 심지어는 금과 은 같은 금속으로도 만들어진다.
일반적인 테디 베어란 역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대량 생산하는 장난감을 말한다. 이 곰인형들은 안전 관절을 이용해서 머리와 팔다리가 각각 조립되어 있다.
사용자가 아이들인 만큼 질식의 위험이 없도록 곰의 눈도 단단하게 고정시켜놨다. 이 플러시 천으로 만들어진 곰인형은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매우 엄격한 기준 하에 제작된다고 한다. 이런 테디 베어가 아닌 슈타이프사 같은 회사에서 만든 수제 소장용 테디 베어는 가게나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테디 베어의 대부분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같은 나라에서 제작되며, 미국에서는 개인이나 소규모 제작자들이 만든 독특한 테디 베어를 만나볼 수 있다.
테디 베어는 아마추어 장난감 제작자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소재다. 이들이 만든 다양한 유형의 곰인형들은 보통 인터넷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흔히 '홈메이드 테디 베어'라고 불리는 이 곰인형들은 선물용으로, 그리고 때때로 자선 단체 기부용으로 팔기도 한다. 또한 테디 베어 아티스트들도 소량 제작한 자신들의 테디 베어를 종종 판매한다.
이렇게 집에서 만들어져 팔리는 곰인형들은 펠트나 천, 벨루어 등 매우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며, 작은 금속이나 구슬이나 리본으로 장식한 경우가 많다.[1]
테디 베어 박물관[편집 | 원본 편집]
세계 첫 테디 베어 박물관은 1984년 영국 햄프셔에 주디 스패로우가 설립했다. 박물관에는 오래된 테디 베어와 관련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2006년에 문을 닫았다. 1990년에는 미국 플로리다주의 네이플스에 새롭게 테디 베어 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나, 여기도 2005년에 문을 닫았다.
이 두 박물관에 있던 테디 베어들은 각각 경매에 팔려 넘어갔다고 한다. 물론 문닫은 박물관이 끝이 아니고, 런던 윔블던이나 베스널그린에 있는 박물관도 있고 일본 나가노에 있는 박물관도 있고 세계 곳곳에 테디 베어 박물관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제주도의 테디 베어 박물관. 여기를 운영하는 제이에스앤에프(JS&F)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식 '테디 베어 뮤지엄' 상표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4] 이 회사는 제주뿐만 아니라 국내 경주나 설악같은 지역이나 해외 몇몇 지점에서 박물관을 운영중이다. 더불어 남산N타워에도 테디 베어 박물관이 있다.
대중매체[편집 | 원본 편집]
-
- 수도 황무지 곳곳에 일반 테디 베어보다 사이즈가 뻥튀기 된 테디 베어들이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Red Racer factory, SatCom Array NN-03d, Sniper shack, Zane house 등이 있다.
- The Pitt의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면 '치료제'인 마리를 위해 테디 베어를 모아다 주는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다(에셔 편을 들어 반란 노예들을 제거하면 친엄마인 산드라에게, 웨르너 편을 들어 폭군 레이더들을 제거하면 보호자인 메데이아에게 주면 된다).
- Point Lookout의 등장인물 케니가 아끼는 테디 베어가 있었는데 작중 시점으로 잃어버린 상태로 이걸 찾아주면 호감도가 올라서 케니의 거처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동심 perk가 있거나 언변술 스킬이 높다면 그냥 설득하고 거처를 쓸 수도 있다.
- 넬리스 공군 기지의 부머 중 한 소녀가 잃어버린 테디 베어를 찾아주거나, 테디 베어가 죽었다고 뻥치는 퀘스트가 있다.
- 웨스트사이드에 새로 입주하는 사람들을 몰래 노예상에게 팔아넘기는 악한 둘이 있어 NCR 장교의 지시로 수사하는 퀘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사람들을 빼돌렸다는 증거로 이들의 본거지에 숨겨져있는 테디 베어를 가져다주는 퀘스트가 있다.
- 더 포트의 노예 소녀가 애호하는 테디 베어가 하나 있는데 약자를 우습게 아는 군단의 철칙에 따라 군단병들이 소녀를 우습게 보고 테디 베어를 강제로 빼앗아가서 군단견들에게 던져준지 오래이다. 그 개들을 죽여 되찾아와 소녀에게 돌려줄수도 있고 그냥 생 깔수도 있고, 돌려주되 눈 앞에서 찢어보이는 막장짓을 구사할 수도 있다.
- Old World Blues의 등장인물 닥터 달라는 테디 베어를 좋아해서 오만것들을 테디 베어라고 부른다. 힉스 빌리지에 위치한 생전의 거처에도 테디 베어들이 여럿 쌓여있다.
트리비아[편집 | 원본 편집]
- 현재 기네스 기록에 있는 가장 비싼 테디 베어는 2000년 10월 14일 모나코 크리스티 경매에서 팔린 슈타이프사의 '루이비통 테디 베어'다.[5] 이 테디 베어는 2000년에 45cm 크기로 만들어졌으며, 213,720.00유로로 판매됐다. 그리고 이게 제주도 테디 베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만일 박물관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보고 오자.
- 테디 베어 제조사마다 고유의 라벨이 있다. 라벨의 위치로 제작 년도를 추정할 수 있고, 라벨의 종류와 보관 상태에 따라 테디 베어의 가치가 달라진다. 그래서 테디 베어 수집가들은 이 라벨또한 애지중지한다고.[6]
- 'Teddy Bear Cops program'이란게 있다. 미국 NAPLC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인데, 테디 베어가 사고나 비상사태에 빠진 아이들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경찰이나 소방관들이 사고 상황에서 불안해 하는 아이들에게 테디 베어를 나누어주게 되었다.
관련 문서[편집 | 원본 편집]
각주
- ↑ 1.0 1.1 1.2 영어 위키백과 20:40, 20 May 2015
- ↑ http://www.amazon.com/Bear-me-teddy-bear-symposium/dp/0090987306/ref=sr_1_1? s=books&ie=UTF8&qid=1432638758&sr=1-1&keywords=Bear+with+Me+peter+bull
- ↑ http://web.archive.org/web/20110723184018/http://www.teddybearandfriends.com/archive/articles/history.html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7693&cid=43128&categoryId=43128
- ↑ http://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most-expensive-teddy-bear
- ↑ http://blog.naver.com/louii/150008237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