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진리교

옴진리교의 모습. 하얀색은 이 종교의 상징이었다.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 오우무신리쿄)는 1984년에 아사하라 쇼코가 만든 사이비 종교였다. 하지만 나중에 사린 가스 테러로 인해 이 집단이 테러리스트 집단인 게 밝혀졌고, 아사하라 쇼코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종교는 아직까지 지금도 존재한다. 교주인 아사하라가 잡혀가면서 남은 신도들이 다시 알레프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다시 세우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편집 | 원본 편집]

진리는 그렇다 쳐도 옴(オウム)이란 이름이 상당히 특이한데, 그건 우주의 탄생 과정 속에서 "옴"이라는 소리가 가장 근원적인 소리라서 그렇다고 한다. 종교인이나 명상가, 도인, 종교학자 등이 온갖 조사 끝에 이 우주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건지, 우주가 생겨난 최초의 발음이 무엇인지 조사한 결과, "옴"이라는 소리가 나왔다고. 옴은 세상을 움직이고 순환시키는 소리이자, 우주의 근원의 소리라고 한다.이게 뭔 소리야

그래서 이들은 원이나 0 같은 게 원만, 화합을 의미하는 거라 "옴"은 마치 부적과도 같은 말이라고 한다. 인도인이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고안해낸 원이나 0에서 만들어진 말이 "옴"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성서나 쿠란 속에도 옴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한다.

쉽게 말해 옴은 우주의 창조, 유지, 파괴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1984년, 아사하라 쇼코는 도쿄 시부야에 요가 수행 도장인 "옴 신선회(オウム神仙の会)"를 설립한다. 이게 교단으로 발전하는데, 당시 일본에 일어나던 오컬트 붐, 세기말 적 흉흉한 분위기를 틈타 크게 성행했던 종교였다. 전성기 때는 신도 수만 1만 명 이상이었고, 일본 내에서만 지부가 20여개나 됐다. 심지어 국외로 건너가 러시아, 호주, 뉴욕에까지 번져 해외 지사까지 생긴다.[1]

이들의 신념은 절대자유, 절대행복을 통해 자신 안의 영혼을 진화시키며, 해탈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 거기다 아사하라 쇼코가 잡지에 자신이 공중부양한 사진을 공개하면서,[2] 신비주의나 초능력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폭풍같은 성장 속에서 신도였다가 변사체로 나타나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옴진리교 본부에 경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체 측에선 머리를 써서 경찰과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대규모 사건을 계획한다.

심지어 옴진리교는 진리당이란 이름으로 정당에까지 진출했다. 게다가 1990년 총선거에도 당당히 출마하기도 했다! 물론 득표율은 3%도 안 될 정도로 매우 저조해 전부 낙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선거 위세를 할 때 되게 이상했다고 한다. 옴진리교 특유의 허옇고 이상한 옷에, 기괴한 음악과 춤을 추며 홍보를 했던 것.(...) 나중에 사람들은 이 때 정계 진출에 실패하니까 테러 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이후 낙선됐음에도 목표를 버리지 않고 1994년 6월 20일, 옴진리교의 조직 부서 이름을 정부 조직처럼 "성청체"로 바꾸고 유사 국가 체제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국가 이름을 진리국, 혹은 으로 바꾼 것으로 모자라[3] 수도도 도쿄가 아닌, 후지산 기슭의 옴진리교 본부로 잡고, 거기다 헌법 조항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세력이 커졌어도 종교 단체는 종교 단체이기에 주요 수급원은 바로 기부였다. 신도도 많았으니 기부금도 쏠쏠하게 모이니까 아키하바라에 PC회사까지 차려 조립 PC 등을 판매하고, 교단 직속 병원까지 차렸다. 거기서 수행에 필요한 항정신성 약품을 판매했는데 그게 뭐냐면 LSD.[4] 거기서 끝나지 않고 라멘집, 돈가스집도 열어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로 인해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교단이 해체되나 싶었지만, 이후 남은 신도들이 모여서 알레프빛의 고리라는 종교 단체를 만들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중이다. 게다가 이 단체들도 규모가 만만치 않다. 현재 신도가 1600명에 자산이 60억. 게다가 지금도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5] 지금은 무료로 손금 봐준다는 식으로 접근하거나 현실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젊은이들을 SNS로 꼬시는 식으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6] 물론 공안부에서는 이들 단체 역시 테러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 지금도 철저하게 감시를 한다.

아사하라 쇼코는 누구인가?[편집 | 원본 편집]

Asahara shoukou.png

(あさ)(はら)(しょう)(こう)

1955년 3월 2일 출생이다. 저게 본명은 아니고, 본명은 마쓰모토 지즈오((まつ)(もと)()()())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눈이 조금 이상한데 이건 맹인이라서 그렇다.[7][8] 그래서 시각장애인 학교를 나왔다.

본인 말로는 자신이 히말라야, 티베트 같은 곳에서 수련을 했는데, 그래서 자신의 영혼은 우주와 맞닿아 있고, 해탈해서 자기 영혼이 열린 상태라고 한다.

사실 아사하라는 원래 마약 중독자였다. LSD에 중독되어 옴진리교에서 차린 병원에서 그걸 불법 판매를 하기도 했다.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 이시하라 신타로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옴진리교를 통해 테러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바로 신이 되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 마치 북한김일성 같은 존재를 꿈꿨던 것이다. 덴노를 폐위시키고 그 위에 군림해 모든 사람들에게 신성시되는 존재. 그리고 나라 이름도 바꿔 진리국으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후 정계 진출에 실패하자 옴진리교 전체를 하나의 재정 일치의 유사 국가로 만들어 자신은 전권을 장악했다.

체포된 이후 2018년 7월 6일 사형이 집행 되었다.

여담으로 개그맨 지상렬이 이 교주와 외모가 비슷해서 일본 입국시 곤혹을 치른적이 있다고 한다. 심사관이 자신과 여권을 여러번 번갈아 봤다고...

마쓰모토 리카[편집 | 원본 편집]

(まつ)(もと)()()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셋째 딸. 1983년 4월생.

교주의 딸이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를 계속 옹호하고 다녔다. 사린 가스 테러를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맹인이라는 점을 들어 동정심을 유발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교주인 아버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20년 후, 월스트리트 저널의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추억과 면회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지금도 아사하라 쇼코가 적절한 수사 없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아사하라 쇼코가 법정에서 기저귀를 찬 모습을 보고, 세속에서 벗어나 성인(聖人)의 과정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는 등(...) 일반인으로썬 이해 못할 말을 하기도 했다.[9]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지 아사하라 쇼코가 체포되고 나서 2008년까지 총 28차례 면회를 갔었다고 한다. 그 때 본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는 듯. 몸은 앙상하고, 피부도 벗겨지고, 머리가 허옇게 샌데다 이빨도 다 빠져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면회 때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거의 한 달 간격으로 면회를 갔는데, 2008년에는 결국 아사하라 쇼코 측에서 면회를 거절했다고 한다.

아사하라 쇼코가 체포됐을 당시엔 겨우 초등학생 밖에 안 됐기 때문에, 옴진리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지속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다. 다만 2000년에 옴진리교를 떠나서 지금은 후속 종교인 알레프빛의 고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말로만 그렇게 해놓고 저 두 단체와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옴진리교 교주의 딸이라는 것 때문에 대학 입학을 거부당해 법정까지 갔었다. 결국 승소해서 대학에 들어간 뒤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왜 심리학을 전공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이 사람은 지금 직업이 없고 상담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네??

사건/사고[편집 | 원본 편집]

아래의 사건들은 옴진리교가 계획적으로 실행한 사건들로, 그 중에서도 3대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들만 기재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옴진리교가 저지른 사건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다. 일본 위키피디아만 봐도 폭탄 사건, 청산 가스 사건 등 기재된 사건만 31건이다. 이 점은 유의하고 넘어갈 것.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편집 | 원본 편집]

TBS 비디오 문제[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당시 TBSTBS 와이드 쇼라는 프로그램에 《3시에 만납시다》 (3時にあいましょう) 라는 코너가 있었다. 거기서 옴진리교 특집 방송을 하기 위해 옴진리교를 취재하면서, 옴진리교를 비난했던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인 사카모토 쓰쓰미(坂本堤)를 인터뷰를 하게 된다.

사카모토 쓰쓰미는 도쿄대 법학부 출신으로, 27세의 나이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에는 이미 종교 관련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고, 에가와 쇼코[10]라는 저널리스트에 의해 옴진리교에 빠진 아들을 탈퇴시키려는 어머니를 소개받아 옴진리교에 대해 안 좋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TBS에서 인터뷰를 하러오자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를 거세게 비난했다. 그래서 대중들도 옴진리교를 비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옴진리교는 궁지에 몰린다. 그러자 사카모토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짓이 오히려 사카모토의 신념을 굳힐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TBS 측에서는 옴진리교 vs. 사카모토 구도로 방송을 진행한다. 그리고 사카모토 역시 계속해서 옴진리교를 비난했다.

TBS는 옴진리교에서 아사하라 쇼코를 만나 아사하라의 초능력을 카메라에 담는다.[11] 그리고 제작진이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와 같이 방송할 거라고 이야기하자, 옴진리교 측은 인터뷰 영상을 보여주지 않으면 특집 방송 못하게 할 거라며 협박을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보여주자, 이번엔 인터뷰 영상을 내보내면 가만 안 놔둘 거라고 TBS를 압박했다. 그래서 결국 특집 방송은 무산되었다.

며칠 뒤, 옴진리교 측은 회유의 목적으로 대변인을 데리고 사카모토 변호사를 만나러 갔지만 거절당한다. 그래도 끈질기게 설득을 계속하자 사카모토 변호사는 고소하겠다며 협박한다. 그래서 별 소득이 없자, 옴진리교는 회의 끝에 사카모토 변호사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살인[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11월 3일, 하시모토 사토루, 나카가와 도모마사, 무라이 히데오[12] 등 최고 간부들이 모여서, 원래 염화 칼륨을 주사시켜 죽이려고 했으나, 법률 사무소가 쉬는 날이어서 작전에 실패했다. 그래서 제대로 열받은 간부들이 작정하고 다음날 새벽까지 법률 사무소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11월 4일 새벽 12시~3시 경, 이들은 변호사의 자택에 몰래 들어가 사카모토를 죽인다. 그리고 당시 29살이었던 그의 부인도 목 졸라 죽인 다음, 아직 1살 밖에 안 된 아기마저 질식시켜 죽였다. 그러고 나서 간부들은 이 3구의 시체를 각각 다른 산에 파묻어 버린다. 사카모토 변호사는 니가타현 니시쿠비키군 나다치정(名立町)의 산에, 아내는 도야마현 우오즈시의 베쓰마타소우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13] 근처에, 아들은 나가노현 오마치시의 히나타산(日向山)에 파묻혔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사카모토 변호사의 어머니, 법률 사무소의 동료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동료들은 물론 대중들까지 이건 분명 옴진리교의 소행이다며 경찰 수사를 진행하라고 한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형식적인 조사만 하고 수색을 끝내버리고,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재수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카모토의 집에서 옴진리교 간부의 배지가 발견됐는데도 경찰에선 사건과 관련이 없다며 수색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옴진리교에선 또 머리를 써서 간부 배지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배지를 가지고 몰아붙이면 "그 배지 어디든지 살 수 있는 거고, 배지도 많이 팔린 거니까 우연히 집에 하나 있는 거"라고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 사이에서 "경찰청장한테 엄청난 뇌물을 먹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결국 사건 발생 5년 10개월 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로 인해 이 사건 역시 재조명되면서 경찰 역시 재수사에 돌입해 모든 진실이 밝혀졌고, 사카모토 일가의 시체 역시 잇달아 발견되었다.

의문점[편집 | 원본 편집]

  • 당시 아랫집에서 증언하기를, 사건 직전에 누군가가 집에서 "사카모토 상"하고 부르는 여자 목소리, 그리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고 한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다고. 그래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시각보다 더 빨리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 사건 당시 집에서 찻잔 3개가 사라졌다. 이건 사카모토를 죽인 다음, 간부 셋이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찻잔은 증거인멸을 위해 치웠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 사건 당시 집은 열려 있었다. 그래서 옴진리교 외의 사람이 도운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존재한다.

마쓰모토 사린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사카모토 일가 사건의 목표가 사카모토 변호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마쓰모토 사린 테러 사건 역시 목표는 한 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몇백 명의 사상자가 나온 잔혹한 사건이었고, 옴진리교 3대 사건에 반드시 거론되는 사건이 되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옴진리교는 정말 커서 각 지역에 지부가 있을 정도였고 마쓰모토시 지부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마쓰모토 시 시민들은 옴진리교에게 아예 이곳에서 떠나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게다가 사기죄로 고발하기도 해서[14] 법정까지 갔다. 하지만 아무리 옴진리교가 돈이 많아도 이번 재판에서 승소할 확률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옴진리교는 다시 살인 계획을 세웠고, 피해자는 이번 재판에서 판결을 내릴 판사가 될 예정이었다.

1994년 6월 27일 저녁, 옴진리교의 간부들은 사린 가스가 든 특수 제작 용기를 트럭에 싣고 마쓰모토시로 향했다. 그리고 법원 관사가 있는 지구에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그리고 다음날 28일 새벽까지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결국 그 근처에 있던 마쓰모토시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린 가스에 중독되었다. 그 결과 7명이 사망, 그리고 600여 명의 시민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병원 신세를 졌다. 그리고 사건 현장을 가스 크로마토그래피로 조사한 결과 사린 가스에 의한 테러란 게 밝혀져 대중들한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경찰들은 계속 이상한 짓거리를 벌여 처음으로 사린 가스 테러를 신고한 사람을 검거했다. 이 사람은 고노 요시유키(河野義行)라는 사람이었는데, 집에 있던 농약과 위험물관리기사 자격을 빌미로 검거된 것이었다. 하지만 TV에서 전문가들이 "농약으로는 절대 사린 가스를 만들 수 없다"고 했는데도 그 말을 무시했고, 언론은 고노를 완전히 범인으로 몰아 독가스맨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결국 애꿎은 고노가 비난을 받고, 법적으로도 협박을 받고,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또다른 시민이 "수상한 트럭을 봤다"며 신고하였고, 수사관들이 "판사를 노린 범행이다"며 의혹을 제기했는데도 경찰은 묵살했다. 애초에 법원 관사에서 범행이 일어났고,, 게다가 고노의 부인이 사린 가스의 피해자였다. 결국 고노의 부인은 의식 불명 상태로 있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옴진리교가 아닌 무고한 고노가 누명을 쓰고 몇 년 동안 징역을 산 것이다.

나중에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 사건이 터지고 나서, 옴진리교 간부 중 하나가 마쓰모토 사린 테러 가스 사건 역시 옴진리교가 벌인 짓이었다며 자수했다. 그러자 고노의 누명은 바로 벗겨져서 석방했고,[15] 언론은 그제야 고노에게 사죄하였다.

나중에 한 경찰서장이 말하길, "마쓰모토 사린 테러는 옴진리교의 실험이었다"고 한다. 옴진리교는 이전부터 암살용으로 쓰기 위해 VX 가스나 포스겐 가스 등을 개발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탄저균까지 배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를 이용해 생화학 테러를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적이 있었다.[16]

마쓰모토 사린 테러 사건 직후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지하철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사린 가스가 살포됐으면 엄청난 대재앙이 됐을 것"이란 의견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이 현실이 되었다.

사린 가스[편집 | 원본 편집]

살인 가스

옴진리교와 연관이 깊은 사린 가스는 맹독성 신경 가스 중의 하나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서 대량 살상용으로 개발된 가스고, 시리아 내전 당시 당국에 의해 시민들에게 살포되어 1,3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가스다.

이 가스의 독성은 청산가리500배에 달한다. 어느 정도냐면 2㎏만 살포돼도 반경 330m까지 쫙 오염되고, 가스에 닿으면 호흡기, 피부, 눈에 바로 흡수된다. 하지만 무색무취라서 가스가 살포된 걸 가스에 닿기 전까지 모른다. 피부에 닿으면 일단 발진이 크게 일어난다. 너무 마셔서 중독되면 눈물, 콧물, 침 등이 다 나온다. 이후에는 시력 저하가 오다가 결국 시신경이 마비된다. 그리고 두통이 엄청 심하게 오고, 구토, 근육 경련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결국엔 근육도 경련하다가 지치고, 호흡도 곤란해진다. 그리고 이게 10분 이상 지속되면 죽는다.

이 가스에 노출됐을 때 긴급 조치로는 일단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옷을 다 벗긴 다음, 흐르는 물이나 식염수로 눈을 먼저 닦아내고, 그 다음엔 피부에 묻은 오염 물질을 다 닦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게 급선무다. 해독제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해독제에는 아르토핀, 프랄리독심, 벤조디아제핀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전시 상황도 아닌 때에 무고한 시민에게 화학 무기를 사용한 인류 최초의 대 테러사건. 일본 경찰청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지하철역 구내 독극물 사용 다수 살인 사건(地下鉄駅構内毒物使用多数殺人事件).

이 시점에서 옴진리교는 이미 여러 사건을 발생시켜서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옴진리교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가 또다시 계획을 세워 경찰의 수사망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이전과는 스케일이 다른 사건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계획은 바로, 일부러 사람이 가장 많을 출근 시간을 노려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 예상대로 이 시간은 학생들과 직장인으로 가득한 러시 아워였고 옴진리교에서 행동을 개시한다. 그들은 2인조로 각자 팀을 짜[17] 제도고속교통영단(現 도쿄 메트로, 이하 영단) 소속의 마루노우치선히비야선에 각 2편성, 그리고 지요다선에 1편성의 지하철 차량으로 들어가 가스를 살포했다.

사건 현장인 가스미가세키역은 일본 정치의 중심지 경찰청, 법원 등의 관공서들이 밀집한 곳이었고, 보통 평일에는 10시까지 출근하지만 월요일에는 아침 조례라는 게 있어 8시까지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옴진리교는 바로 그 점을 노려 테러를 저질렀던 것. 옴진리교가 이런 공무원들의 출근 시간 같은 걸 알고 있으니까 당시 엔 공무원들 중에 옴진리교 신자가 있을 것이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기야 당시 옴진리교엔 의사나 과학자 같은 지식인들도 많았으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6,000여 명의 사람들이 사린 가스에 노출되었다. 승객과 승무원 12명이 사망하고, 5,5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18][19]

당시 영단 측에선 사린 가스로 인한 사건인 걸 알 때까지 사건이 발생한 가스미가세키 역은 무정차 통과를 하거나 아예 운행 중단을 했고, 그게 다음날까지 계속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스미가세키 역을 비롯한 총 4개의 역은 3~6일 정도 폐쇄시켰다.

병원에서도 최선을 다해 피해자들을 치료하다가 나중에 이 사건이 사린 가스 테러란 게 밝혀지자 난리가 났다. 왜냐면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린 가스의 해독제는 아트로핀과 프랄리독심인데, 이 해독제들은 주로 농약 중독의 치료제로 쓰이기 때문에 도쿄에선 자주 쓰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몇천 명의 피해자들을 해독시키기에 역부족이었고, 즉각 전국의 병원에 수집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국의 병원과 공장에서 해독제를 긁어 모았고, 의사들도 병원에만 있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곧장 가서 피해자들에게 바로 해독제를 주사했다. 이렇게 즉각적인 대처로 인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한편 경찰에서는 이 사건이 사린 가스 테러로 판명되자 곧바로 옴진리교를 지목했다. 원래 옴진리교에 대한 관심을 피하려고 일으킨 사건인 걸 생각하면 옴진리교로썬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건 후 이틀 뒤인 3월 22일, 경시청은 신흥 종교 옴진리교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옴진리교 간부 중 하나인 하야시 이쿠오(林郁夫)의 자백으로 모든 것이 밝혀졌고, 어이없게도 범인들은 모두 촉망받는 지식인들이었다. 지요다선에서 테러한 하야시는 당시 평판이 좋은 심장외과 전문의였고, 마루노우치선에서 테러한 범인 중 하나인 히로세 겐이치(広瀬健一)는 와세다대학교의 응용물리학부 수석 졸업생에 대학원생이었다. 그리고 같은 노선의 또다른 범인인 요코야마 마사토(横山真人)는 도카이대학의 응용물리학부 졸업생, 히비야선의 도요타 도루(豊田亨)는 도쿄대학 응용물리학과 졸업생에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노선의 또다른 범인인 하야시 야스오(林泰男) 역시 고카쿠인대학를 다니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아사하라 교주를 비롯한 사건에 관여한 모든 간부들에게 사형을 선고되었다. 다만 고등 법원 판결에선 자백한 하야시 이쿠오를 비롯해 무기징역도 다수 나왔다. 아사하라 교주에게 적용된 죄목은 살인, 가스 테러 등 다 합쳐 13개. 이 13개를 적용시키느라 심의만 256차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첫 공판에서 1심 재판까지 걸린 시간만 7년 10개월. 이 재판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생방송으로 진행되었고, 총 40장 밖에 안 되는 방청권을 얻기 위해 약 5,00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법원 앞에선 피해자 가족들이 "죽여라! 죽여라!"라며 시위도 했다.

거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옴진리교가 저질렀던 사건들을 재수사함으로써, 사카모토 일가 살인사건, 마쓰모토 사린 가스 살포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안 그래도 큰 사건이었는데 묻혔던 사건이 다시 밝혀지니까 매스컴에선 온통 옴진리교로 도배되다시피였고, 지금도 일본에 옴진리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옴진리교의 교주였던 아사하라는 사건 당시에 검거되었지만 그 수하에 있던 사건에 관여한 간부들은 일부 도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깡그리 검거하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렸는데, 결국 계속 추적하다가 2012년 6월 3일에는 간부 기쿠치 나오코(菊地直子), 6월 15일에는 간부 다카하시 가즈야(高橋克也)를 도쿄의 한 만화 가게에서 검거하였다. 이로써 사건 발생 17년 만에 모든 관계자를 검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다카하시는 최후의 1인이었기 때문에 현상금이 1,000만 엔이었다.

다카하시는 잡히면서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며 변명한 것도 모자라 심문에서 "다시 옴진리교의 뜻을 섬기고 수행하고 싶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게다가 잡힐 때 아사하라 쇼코의 사진까지 갖고 있었다 하니 17년 동안 반성은 조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다카하시에 대한 재판은 2015년 1월 16일 시작해 4월 30일, 1심에서 구형 그대로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다카하시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바로 기각당했다. 그랬는데...

11월 27일, 도쿄 고등법원에서 기쿠치 나오코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는 발언에 일본은 완전히 충격에 도가니였고 검찰 측은 12월 9일, 상고를 진행했다.

2015년 3월 20일, 사건 발생 20주년을 맞아 가스미가세키역에서는 추모 의식을 진행했고, 이런저런 언론에서 "충격의 그 날" 이런 식의 기사를 많이 내곤 했다.

각주

  1. 당시엔 공산주의 체제가 막 붕괴되어 힌두교를 믿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와 더불어 옴진리교도 러시아에 번진 것. 결국 러시아에서도 포교 활동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이 났었다.
  2. 당연히 훼이크다. 지금 보면 공중에 점프한 상태로 찍힌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당시 일본 사회가 워낙 흉흉해서 2~30대 젊은이들이 거기에 넘어간 것이다. 또한, 타키모토 타로 변호사가 해당 사진처럼 똑같이 연습해서 성공한 사진을 공개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트위터 프로필 사진으로 써먹고 있다.
  3. 왜냐면 일본이란 이름은 덴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름이기 때문.
  4. 교주가 애초에 마약 중독자였으니 당연히...
  5. 2016년 기준으로 160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6. 실제로 이 두 단체 신도들의 약 60%가 35세 미만의 청년들이다.
  7. 완전히 앞이 안 보이는 전맹 수준까진 아니었다고. 그래서 자신의 기쁨조 라고 할 수 있는 다키니를 선택할 때도 자신이 마음에 드는 외모의 여자를 선별했었다.
  8. 하지만 시각장애인인데도 해외 지사까지 있는 엄청난 신흥 종교의 교주라는 게 해외에까지 큰 이슈가 되어 주목을 받았다.
  9. 물론 나중에 아버지가 미쳤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기도 했다.
  10. 나중에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가 살해당하자 에가와도 옴진리교를 몰래 취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옴진리교 측에서 발각당하자, 에가와가 자는 사이 집에 포스겐 가스를 살포시킨다. 하지만 소리 때문에 들켜 미수에 그친다.
  11. 자세한 방송 기록은 찾아볼 수 없기에 정확히 어떤 초능력인지는 알 수 없다.
  12. 모두 옴진리교의 최고 간부들이다. 그런데 다들 직업이 후덜덜하다. 나카가와는 의사, 무라이는 과학자, 하시모토는 법학과 학생이었다. 옴진리교 들어가고 나서 퇴학했지만.
  13. 이름이 긴데, 이곳은 소가타케(僧ヶ岳)라는 산의 등산로로도 사용되는 산책로다.
  14. 당시 옴진리교는 강제로 헌납받은 재산으로 멋대로 임야를 사들어 기도원을 짓곤 했다. 그래서 고발당한 것.
  15. 고노는 현재 옴진리교를 비롯한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에 관해 여러 강연도 하고 책을 쓰면서 지낸다고 한다.
  16. 이건 가메이도 악취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건 가메이도에 있던 신도쿄총본부에서 1993년 6월 28일7월 2일 2차례에 걸쳐 탄저균으로 카메이도 근처를 테러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왜 실패했냐면 탄저균을 고압 분무기로 살포하는 바람에 탄저균은 죽고 고기 썩은 내만 나서 실패한 것이다. 당시 가메이도의 주민들은 바로 옴진리교를 의심해 거센 항의도 하고, 경찰에서 강제 수색을 가하자, 옴진리교 측은 "종교 의식에 사용할 약품 조합의 실패였다"며 사과하는 것으로 끝났다. 나중에 도쿄 지하철 가스 테러가 나고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17. 일단 살포자가 차량 안에 들어서면 비닐 봉지에 든 액체 상태의 가스를 우산 같이 뾰족한 것으로 찌르고 도망가면, 다음 역에서 기다리던 운전수가 살포자를 태우고 도망가는 작전이었다. 그래서 2인조다.
  18. 워낙 심각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눈의 이상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병상에 누워 생명을 겨우 유지하기도 한다. 이런 사건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일본에서 법이 생겼고, 2008년에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으로 인해 사망자 유족들에겐 2000만 엔씩 지급되었고, 간병인이 필요할 정도로 장해를 입은 사람들은 3000만 엔씩 지급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배상이 완결되지 않아 산케이 신문의 지탄을 받았다.
  19. 물론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측은 380억 엔의 배상비를 내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직도 19억 엔밖에 내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