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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이다.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 (이름)|자]]는 원정(元正)이다. [[태종 (조선)|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세종대왕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세종 맞다.
'''세종'''(世宗)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이다.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 (이름)|자]]는 원정(元正)이다. [[태종 (조선)|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 생애 ==
== 생애 ==

2022년 3월 8일 (화) 01:13 판

틀:지도자 정보

세종(世宗)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이다.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 는 원정(元正)이다. 태종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생애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孝寧君 李補)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 이제(李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락커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업적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먼치킨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周時經)에 의해 한글이란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어, 오늘날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해와 달, 행성을 관측하여 기후를 예측하는 데 사용된 혼천의, 해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림자로 시곗바늘의 위치를 표시하는 해시계 앙부일구, 물이 떨어지는 원리를 이용하여 시계를 만든 물시계 자격루,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에 출몰하는 감수성오랑캐가 속한 여진족(女眞族)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倭寇)를 토벌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서적

  •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
  • 동국정운》(東國正韻) 세종의 명으로 1448년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간행. 대한민국 국보 제17호
    한자음을 당시 중국어 발음과 맞춘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 중고한어를 기준으로 한자음을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중세국어식 한글표기가 쓰였으며 당시 훈민정음 표기와는 약간 다른 "동국정운"식 표기가 쓰였다. 초성과 중성만 있더라도 아래에 ㅇ을 채워넣었다. ㅇ받침은 현대에는 /ŋ/ 발음을 표기하는데 당시에는 받침에 넣어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자로 한자음을 표시했던 반절(反切) 대신에 효율적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한자음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한글 운서이다. 예전의 ㄷ입성(入聲)은 민간의 발음에 따라 ㄹ로 바꾸되, 입성의 자질을 살리기 위하여 'ㅭ'과 같이 표기하였다. 각 글자의 뜻은 표기하지 않고 여러 음을 가진 경우 그 글자 아래에 세주(細註)를 달았다.[1]

특이사항

  • 고기를 무쟈게 좋아했다. 아마 한글이 ㄱ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하루라도 고기반찬이 없으면 수라상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고, 특히 허구한 날 앉아서 공부만 하고 운동따윈 장식으로 여기시는 책벌레였기 때문에 실제 모습은 흔히 알려진 상상화와는 달리 매우 후덕한 비만인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단, 이런 사항이 고정관념대로 게으르다는 뜻이 아님에 유의. 하지만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있으니, 참고바람

대중문화 속의 세종

각주

  1. 동국정운(東國正韻)”. 한국민족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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