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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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의 歷史

동아시아의 반도의 국가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전

일제 강점기

1910년까지 존속했던 조선 왕조(혹은 대한제국)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종결된 이후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 통치받던 한반도는 당연히 여러 반일성 개인/단체의 활동들이 전개되었고 그중에선 이승만, 김구 등 여러 뜻있는 인사들이 상하이에서 함께 하여 아예 건국을 미리 준비하던 경우도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 국명이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성된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실효성은 전혀 없는 이름뿐인 정부조직이었다(하지만 나름대로 독립군들을 지원하고 전용 의용군을 창설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었부터 나온다.

미 군정기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관동군의 붕괴, 만주 상실로 인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이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반도는 자유의 땅이 되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과 맞서 싸운 소련, 미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통치하게 되었고 이 중 소련은 지리상으로 가까운 한반도 북부를 소련군 소속 항일인사였던 김일성을 대표로 통치하였고 반대로 미국은 지리상으로 (일본과) 가까운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과 소련군정으로 양분되어 통치되면 분단이 일어날까 걱정했던 여운형을 주축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급히 발표되는 등 건국 시도가 수차례 있어왔지만, 미국은 한반도 내 모든 독립적인 정부수립을 위한 조직이나 정당들의 활동을 무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들은 미군정에 소속되어 활동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미군정에 의해서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상하이 임시정부 모두 부정되었고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통일 단독 정부수립을 위하여 제 1,2 차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타협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우위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결렬. 더군다나 동아일보에서 오보를 내는 바람에 사람들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나뉘어버렸다. 이로 인해 미국은 UN에 한반도 정부수립문제를 상정해버렸고 UN에서는 남북총선거를 통해 정부수립을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소련은 남한의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였고 결의안을 거부, 38선 이북으로 UN선거관리위원회의 방북을 차단하였다.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5·10 총선거)를 하고 이를 통해서 수립된 정부가 제헌국회와 이승만을 제1 대 대통령으로하는 제1공화국이다.

대한민국 건국

제1공화국

제1공화국은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표되면서 시작했다.[1] 중요 사건으로는 6·25 전쟁과 4·19 혁명이 있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북위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였고, 곧 서울을 거의 저항 하나 없이 북한에게 내준다. 이로 인해 많은 남한의 인사들이 죽거나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고, 결국 8월 12일즈음부터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죽기살기로 버텼다.

곧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던 순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확 기울었고, 남한군과 연합군은 북진을 시작해 곧 9월 2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0일에는 북한의 수비를 뚫고 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남한 주도의 통일이 곧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를 위협으로 본 중국은 10월 25일 북한 측에 참여하였고, 11월 중순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의 다시 북한 측으로 넘어갔고, 해를 지나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다시 북한이 점령한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화성-여주-원주-삼척를 잇는 선까지 진격하였으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연합군 측은 다시 공세로 전환하여 서울을 수복하였고, 6월 즈음부터는 현재의 휴전선에서 전선이 고착화하였다. 이후 몇 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한국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리셋시켰다. 그나마 있던 남한의 산업은 거의 다 갈아엎어졌고, 피난으로 대이동이 일어나 기존의 양반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확실하게 없앴으며, 또한 지방 유지들과 실권자들의 권력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기존 사회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대거 사형, 실종, 또는 전사하면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의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

각주

  1. 제헌 국회는 1948년 5월 10일 선거로 뽑혔으니 엄밀히 말해 제1공화국 때 일어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