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3 - 여우 계단

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Whispering Corridors 3: Wishing Stairs
작품 정보
배급사 시네마서비스
제작사 씨네2000
감독 윤재연
제작 이춘연
작가 김수아, 이용연, 이신애, 이소영
출연 송지효, 박한별, 조안
장르 호러
나라 대한민국
언어 한국어
개봉일 2003년 8월 1일 (20주년)
시간 97분
기타 정보
음악 박승원, 조민수, 송경근
여고괴담 시리즈
여고괴담 여고괴담2 여고괴담3 여고괴담4 여고괴담5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의 제3편. 2003년에 개봉했으며, 최초로 여자 감독이 제작했다.

다른 시리즈들과 달리 예술고등학교가 배경이다. 실존하는 예고들은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모두 남녀공학이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예고는 여학교이다.

청어람 출판사에서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제목은 ‘여우계단’으로 동일하며, 이신애 작가가 집필했다. 영화에는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도 있고,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묘사된 부분들도 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 기숙사로 향하는 계단에는 전설이 1가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본래 계단은 모두 28개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밤중에 간절히 여우에게 소원을 빌며 계단을 오르면, 평소 존재하지 않던 29번째 계단이 나타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것이다.

터무니없게 들리는 소문이지만, 그래도 간절하고 절박한 소원을 품고 있는 소녀들은 계단을 오르며 소원을 빈다. 그녀들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동시에 끔찍한 비극도 함께 따라와 그녀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등장인물[편집 | 원본 편집]

김소희(박한별)[편집 | 원본 편집]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 무용과 2학년. 발레를 전공하고 있다. 발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고, 노력 또한 열심히 하여, 항상 1등을 독차지한다. 소희의 어머니도 무용을 전공했지만 무용수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기에, 딸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고 싶어서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신다.

발레 실력뿐 아니라 빼어난 미모와 상냥함도 갖추어, 또래 여학생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소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무용과의 단짝 친구인 윤진성(송지효) 뿐이다. 소희는 진성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여우계단에서 “진성이와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하지만 다정하던 진성은 언제부터인가 차가워지고 멀어지는데…

윤진성(송지효)[편집 | 원본 편집]

소희와 둘도 없는 단짝 친구. 발레에 대하여 굉장한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있으며 부지런한 노력파이지만, 타고난 천재인 소희와 달리 진성은 매일같이 열심히 연습해도 만년 2등이다. 이 때문에 소희에게 애증(愛憎)을 느끼고, 여우계단에서 “소희를 이기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게 된다.

엄혜주(조안)[편집 | 원본 편집]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 미술과 2학년. 뚱뚱한 몸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따돌림, 놀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유일하게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준 무용과 학생 김소희를 동경하고, 그녀처럼 예쁘고 날씬해지기를 꿈꾼다. 혜주는 여우계단에서 “살이 빠지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었고, 소원대로 살이 몰라보게 빠졌지만, 혜주가 동경했던 소희는 불의의 사고로 학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혜주는 다시 여우계단에 올라 “소희를 돌려주세요.”라고 빌었고, 혜주의 소원대로 돌아온 소희는 학교를 온통 공포에 몰아넣는데…

한윤지(박지연)[편집 | 원본 편집]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 미술과 2학년.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무용과의 1등이 김소희라면, 미술과의 1등은 한윤지이다.

미술과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실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교사들과 학생들도 그런 윤지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본인과 주변의 기대만큼 훌륭한 작품을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하여, 무용과의 2등인 진성만큼이나 많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같은 미술과 소속인 혜주를 앞장서서 무시하고 괴롭히는, 주도적인 학교폭력 가해자이다. 그러나 항상 무시당하며 주눅들어 있던 혜주의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는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줄거리[편집 | 원본 편집]

소희, 진성, 혜주, 윤지[편집 | 원본 편집]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의 교정(校庭)에서, 홀로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헤아리는 여고생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녀가 헤아리는 숫자는 29에서 끝나고, 계단을 끝까지 오른 그녀는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간절하게 소원을 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그녀를 감싸고, 그녀의 길고 검은 생머리와 회색 교복 치맛자락이 마구 휘날린다.

날이 밝고,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의 일상이 여느 때처럼 시작된다. 무용과 학생들이 무용실에서 선생님(문정희)의 지도하에 한창 발레를 연습하는데, 김소희(박한별)는 다리를 다쳐서 연습을 못하는 대신 오디오 앞에서 음악 재생을 맡고 있었다. 윤진성(송지효)은 그날따라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연습을 마친 진성은 소희에게 다가가는데, 두 소녀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소곤거리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소희는 진성을 이끌고 몰래 학교를 빠져나갔다. 진성과 함께 발레 공연을 보러 가려는 것이었다. 오후에도 보충수업(연습)이 있었기 때문에 진성은 선생님께 들켜 꾸중을 들을까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소희가 어렵게 입장권을 예매했고, 소희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기에, 진성은 결국 소희를 따라갔다.

한편 어둡고 컴컴한 지하 미술실에서는, 미술과 2학년생 엄혜주(조안)이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케이크를 먹으며 생일을 자축하다가 (미술과 학생으로서는 엉뚱하게도) 연분홍빛 토슈즈를 꼭 껴안고 소파에 누웠는데,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쯤 인기척이 느껴져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토슈즈를 감추며 뒤를 돌아보니, 미술과 동급생인 한윤지(박지연)가 담배를 물고서 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지는 혜주가 무언가 숨기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혜주의 뚱뚱한 몸을 조롱하고, 혜주가 준비하고 있는 전시회 출품작을 유치하다며 깎아내렸다.

혜주가 흙으로 빚어 만들고 있던 작품은 학교 기숙사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일명 ‘여우계단’이라고 불리는 길이었다. 본래 28개로 이루어진 계단이지만 ‘간절히 소원을 빌면서 오르면, 평소에는 없던 29번째 계단이 나타나면서 여우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공간이었다.

발레 공연이 끝난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소희와 진성은 학교로 돌아왔다. 집에서 통학하는 소희와 달리, 진성은 기숙사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두 소녀는 작별을 아쉬워하며, 여우계단 앞에 있는 후문에서 한참동안 전설에 대하여 수다를 떨었다. 진성은 숫자를 헤아리며 계단을 올라가보았지만, 계단은 평소처럼 28개에서 끝났다. 계단을 다 오른 진성은 소희에게 “공연 잘 봤어! 고마워!”라며 감사 인사를 건넸고, 소희는 머리 위에 두 팔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사랑해!”라고 진성에게 애정 표현을 했다.

다음 날, 쉬는 시간에 소희와 진성이 교실에서 무용과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복도 쪽의 창가에 낯선 인물이 나타났다. 미술과의 엄혜주였다. 무슨 일인지 묻는 소희에게, 혜주는 머뭇거리며 “나에게 맞지는 않겠지만… 체육복이…”라며 말을 더듬는다. 잘 모르는 아이였지만 소희는 친절하게 자신의 체육복을 선뜻 빌려주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체육관에서는 미술과 학생들의 체육 수업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기 전, 학생들은 줄을 맞추어 달리기를 했다. 그러나 소희의 체육복을 입은 혜주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소희는 전교에서 제일 날씬한 학생이었지만 정반대로 혜주는 전교에서 제일 뚱뚱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헐렁헐렁한 체육복조차도 혜주의 몸에는 꽉 끼었고, 수업시간 내내 혜주는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선생님으로부터는 꾸중을 들었다.

그 시각, 무용과 학생들이 한창 발레 연습 중이던 무용실에서는 선생님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희와 진성이 몰래 연습을 빼먹고 학교를 빠져나가 공연을 보고 왔다는 사실을, 선생님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희는 선생님께 “진성이는 싫다고 했는데 제가 억지로 끌고 갔어요.”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았지만 선생님은 진성만을 꾸짖었고, 무용과 1등인 소희에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리는 이제 좀 괜찮니?”라고 물었다. 진성은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진성과 혜주는 각자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혜주는 소희의 체육복을 깨끗이 빨아서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학교에 친구가 하나도 없고 외톨이였던 혜주는 방 안에 화분을 여러 개 두었는데, 화초에 정성껏 물을 주고 말을 걸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이어 혜주는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우계단에서 “살이 쏙 빠지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더니, 29번째 계단이 나타나면서 소원이 이루어지는 내용이었다.

한편 기숙사 복도를 걷던 진성은 소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지만, 잡음이 많아서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진성은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곧장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겁하여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의 손이 하나 올라오고 있었고, 놀란 진성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어 창문이 열리면서 반갑게 진성을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소희의 얼굴이 나타났다. 경악하여 공포에 떨던 진성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너무 황당하기도 했다. 진성은 무모하게도 3층까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소희를 부축하여, 자신의 방으로 무사히 들어오게 했다. 소희는 어머니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고 했다.

소희도 집에서 챙겨온 잠옷으로 갈아입고, 진성과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소희는 진성에게 어머니와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희의 어머니도 무용을 전공했고, 무용수로 크게 성공하고픈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소희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 때문에 소희의 발레 공부를 물심양면으로 철저히 뒷바라지하며 소희를 굉장히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희는 “엄마도 없고, 발레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우리 20살 되면 꼭 같이 살자.”라고 말하면서 진성의 머리를 매만져주었고, 진성과 함께 즉석사진을 촬영하고, 진성의 침대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서울발레콩쿨 공지[편집 | 원본 편집]

다음 날 아침, 먼저 일어난 소희는 교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아직 잠들어있는 소희에게 혼자서 소곤소곤 말했다.

진성아, 사실 나는 발레를 할 때가 제일 좋아. 우리가 10년 후에,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함께 공연하는 거야. 나는 지젤, 너는 알브레히트… 그러면 정말 멋지겠지? 잠깐 집에 들렀다가 올게. 이따가 학교에서 보자.

말을 마친 소희는 조용히 진성의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잠들어있는 줄 알았던 진성은 사실 깨어 있었고, 소희가 나가자 진성은 “내가 왜 알브레히트야? 당연히 지젤이지.”라며 못마땅한 투로 혼잣말을 했다.

등교해보니 무용과에는 새로운 행사가 공지되어 있었다. 곧 서울발레콩쿨이 열리는데, 각 학교에서 1명씩만 출전할 수 있으며 입상자에게는 러시아 국립무용학교 유학이라는 어마어마한 특전이 주어진다고 했다. 진성은 간절히 콩쿨에 출전하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은 무용과 1등인 소희를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가 역력했다. 소희와 진성은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발레에 있어서는 경쟁자로, 매일같이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희는 타고난 무용 신동(神童)으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진성은 아무리 부지런히 노력해도 소희를 넘어서지 못하고 만년 2등이었다.

진성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점차 소희에 대한 열등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진성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용과 사무실에서 선생님들과 화기애애한 상담을 마치고 나온 소희는 여전히 진성에게 다정하게 대한다. 마침 소희는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녀가 어머니와 콩쿨에 대해 이야기하며 밝게 웃는 것을 들으며, 진성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진다.

여우계단에서 소원을 비는 혜주와 진성[편집 | 원본 편집]

그러던 중, 진성은 미술과 학생들의 작품이 전시된 교내 미술관에 들렀다가 엄혜주가 만든 ‘여우계단’을 보게 된다. 진성이 여우계단을 보고 있는데 마침 작품의 작가인 혜주가 나타났다. 그런데 진성은 혜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 뚱뚱하던 혜주가 몰라보게 날씬해졌기 때문이다. 혜주는 “여우계단에서 ‘살이 빠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더니, 정말로 그 소원이 이루어졌어.”라고 말했다. 너무도 심각하고 진지한 혜주의 모습에, 진성은 농담처럼 웃어넘기지도 못하고 할 말을 잃었다.

어느덧 소희의 다리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소희는 다시 발레 연습을 시작했다. 마침 그날은 무용과 학생들이 한 사람씩 선생님 앞에서 발레 동작을 검사받는 날이었다. 그런데 무용과 탈의실 사물함에 넣어두었던 소희의 토슈즈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소희는 진성에게 토슈즈를 빌려 신고서 발레를 했다. 한참 쉬었다가 오랜만에 발레를 하는데도 그녀는 완벽하게 <지젤>의 안무를 소화했고, 선생님과 학생들은 연신 감탄했다. 선생님은 무용과 학생들에게 서울발레콩쿨에 대해 이야기하며 “교내 예선에서 우승한 학생을 학교 대표로 콩쿨에 출전시킬 테니, 모두들 열심히 준비하라”고 독려한다. 하지만 이미 소희가 대표로 내정되어 있음을 다들 짐작하고 있었고, 무용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삼삼오오 무용실을 빠져나가며 “어차피 1등인 김소희가 선발되지 않겠느냐”고 수군거렸다. 소희와 진성은 가장 늦게 무용실을 나왔다. 심란한 진성과 달리 소희는 밝게 웃는 얼굴이었고, 진성에게 토슈즈를 돌려주며 “토슈즈가 너무 낡았으니 바꾸라”고 말한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생들이 하교할 때, 진성은 무용 선생님을 찾아가서 “콩쿨에 출전하고 싶어요”라고 간절히 청한다. 하지만 역시나 선생님은 진성의 간곡한 청을 거절했다. <지젤>은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고, 고난도의 표현력과 예술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진성보다는 소희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사라지자 절망한 진성은 학교 뒤뜰 벤치에 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소희는 싹싹하게 다가가서 “같이 토슈즈 사러 가자. 내가 맛있는 것 사줄게.”라며 말을 걸었지만, 진성은 차가운 얼굴로 소희를 뿌리치더니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서 기숙사로 돌아가 버렸다.

몇 시간 후,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홀로 교복 차림 그대로 기숙사를 빠져나온 진성은 여우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숫자를 세면서 신중하게 계단을 오르자, 정말로 소문으로만 듣던 29번째 계단이 나타났다. 감격한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여우야, 여우야, 내 소원을 들어줘. 내가 콩쿨에 나갈 수 있게 해줘.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는 학교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무용과 학생들이 무용실에서 실기 수업을 받고 교실로 돌아와 보니, 소희의 책상 위에는 지난번에 혜주에게 빌려주었던 체육복이 있었다. 그런데 체육복 위에는 발레리나용 왕관도 놓여 있었다. 체육복을 빌려준 답례로 혜주가 선물한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책가방을 챙겨들고 먼저 교실을 나섰고, 혼자 남아있던 소희는 교실 뒤편에서 왕관을 쓰고서 거울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복도로 시선을 돌렸는데, 아직 돌아가지 않고 무용과 교실을 훔쳐보고 있던 혜주와 눈이 마주쳤다. 소희는 혜주에게 말을 걸었지만, 혜주는 쑥스러웠는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진성은 홀로 무용과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사물함을 열어보니 새로운 토슈즈 1켤레와 소희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소희가 진성에게 애정을 가득 담아 보내는 선물이었지만, 가뜩이나 소희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던 진성은 오히려 불쾌하기만 했다. 그녀는 손에 마시고 있던 음료수(오렌지주스) 병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고, 탈의실 바닥에는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탈의실에 들어서던 무용과 동급생 조영선이 진성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뒤돌아서 누군가를 목격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잠시 후, 무용과 학생들은 서울발레콩쿨 출전자를 선발하기 위한 교내 예선을 앞두고 있었다. 레오타드만 입고 연습하던 평소와 달리, 다들 제대로 화려한 무대의상을 차려입고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진성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없이 소희에게 토슈즈를 돌려주었다. 소희는 당황하여 진성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진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예선이 시작되었고, 진성에게서 돌려받은 토슈즈를 신은 소희는 평소처럼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지젤>을 선보였다. 그녀의 춤사위에 선생님들과 무용과 학생들은 아무런 이견 없이 감탄했다. 무용과뿐 아니라 음악과와 미술과의 학생들도 구경하러 왔는데, 무용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녀들도 하나같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특히 소희를 동경하는 혜주의 반응은 더욱 대단했다.

예선이 끝나고, 모두의 예상대로 소희가 1등을 차지하여 학교 대표로 서울발레콩쿨에 출전하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2등에 머무른 진성은, 굳어진 얼굴로 무용실을 빠져나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발걸음을 옮겼다. 소희는 계속 진성을 부르며 따라갔지만 진성은 돌아보지 않았고, 두 소녀의 걸음은 건물 맨 위층의 계단에서 멈추었다. 구석진 곳이고, 사용하지 않는 책걸상과 이젤 및 그림들이 쌓여있는 공간이었다. 소희는 진성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진성은 소희를 뿌리치며 차가운 말투로 한마디를 뱉었다.

김소희… 나는 네가 정말 싫어. 너는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

말을 마친 진성은, 등 뒤에 소희를 남겨두고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소희는 그런 진성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너 이대로 가버리면, 다시는 나를 못 보게 될 줄 알아!!

순간 진성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희는 울면서 진성을 끌어안고 애원했다.

진성아, 가지마…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지만 진성의 마음은 여전했고, 그녀는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소희의 손길을 거칠게 떼어놓으려고 했다. 소희를 밀어내려는 진성과, 그런 진성을 놓지 않으려는 소희는, 계단에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몸이 흔들린 소희는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소희뿐 아니라 진성도 몹시 놀라 그 자리에 굳어졌고, 곧이어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목격한 학생들의 비명소리로 그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진성의 우승과 소희의 죽음[편집 | 원본 편집]

며칠 후에 서울발레콩쿨은 예정대로 개최되고, 소희를 대신하여 출전한 진성은 당당히 1위를 차지하여 찬사를 받는다. 오랫동안 노력해온 목표를 마침내 이루어낸 그녀는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소희의 일이 마음에 걸려 신경이 쓰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진성은 소희가 입원해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병실에 미처 들어서기도 전에, 병실에서는 소희 어머니의 서러운 울음소리와 소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부상이 심하여 다시는 발레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모녀의 대화를 들은 진성은 충격으로 굳어졌다. 소희는 “나 발레 안 해도 상관없다고!!”라며 악을 썼지만, 누구보다 발레를 좋아하고 재능이 출중했던 그녀가 얼마나 절망하고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성은 차마 소희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미처 우산도 챙기지 못한 채 학교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날 밤, 진성은 젖은 교복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창가를 바라보니 예전처럼 소희가 창문을 열고 진성의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친 몸으로 기숙사 3층까지 올라온 소희를 보고, 진성은 깜짝 놀랐다. 소희는 “너 우산 두고 갔어.”라며, 진성이 병원에 두고 갔던 빨간색 우산을 건네주었다. 놀라움, 반가움, 미안함, 후회 등등 여러 감정들을 동시에 느끼며 진성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소희는 진성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진성의 우승을 축하해주었다. 두 소녀는 침대 위에서 같이 깡충깡충 뛰고, 그간 미처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한참 나누다가, 예전처럼 서로 꼭 껴안고 함께 침대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진성이 눈을 떴을 때 이미 소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진성은 ‘예전처럼 먼저 나갔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걱정하지 않았고[1], 소희와 화해하여 한결 편안해진 마음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등교했다. 그러나 진성을 마주친 무용과 학생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다들 자신을 피하거나, 불편해하거나, 노려보거나, 수군거리자, 진성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며 교실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2]에 앉았다. 그때, 애써 자리에 앉아있는 듯했던 조영선이 마침내 폭발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진성의 자리로 다가와서 분노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소희… 죽었대.

뒤이어 무용과 학생들이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진성이 병원을 다녀간 직후에 소희는 병실에서 투신하여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진성이 소희를 계단에서 떠밀었다”는 소문이 소희의 부고(訃告)와 합쳐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소희에 대한 동정과 진성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여 교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에 진성은 양호실 침대 위에서 눈을 떴고, 무용 선생님과 양호 선생님이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3] 진성은 선생님들에게 “어젯밤에 소희가 제 방에 왔었어요. 저와 이야기하고, 제 방에서 같이 자다가 갔어요.”라고 말했지만, 선생님들은 ‘진성이 친구를 잃고 정신이 이상해졌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환경을 바꾸어주면 진성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선생님들은 기숙사 사감 선생님과 상의했고, 진성과 혜주에게 서로 방을 바꾸도록 했다. 진성은 내키지 않았지만 선생님들의 호의 어린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방을 정리하여 짐을 모두 챙긴 진성은 복도에서 혜주와 부딪혔고, 그 바람에 혜주가 들고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성은 혜주에게 사과하며 그녀의 물건들을 챙겨주었는데, 그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색 약병이 하나 있었다. 진성이 약병을 들고서 살펴보려고 하자, 혜주는 당황하며 재빨리 약병을 빼앗아 들고서 자신의 새로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편 혜주 역시 소희의 죽음으로 몹시 충격을 받아 슬퍼하고 있었다. 그녀는 홀로 지하 작업실에서 소희의 토슈즈를 껴안고서 울고 있었는데,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이 모습을 누군가 몰래 훔쳐보며 비웃고 있었다. 미술과 동급생이자 혜주를 앞장서서 괴롭히는 윤지였다.

다음 날 아침, 미술과 교실에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져 있었다. 혜주의 책상에는 윤지가 쏟아놓은 토슈즈, 무용복, 속옷, 타이즈 등이 가득했는데, 모두 죽은 소희가 생전에 잃어버린 물건들이었다. 혜주는 소희를 동경한 나머지 몰래 그녀를 스토킹하며 그녀의 물건들을 훔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왕따였던 혜주가 이런 음침한 행각까지 일삼아오고 있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아이들은 혜주를 더욱 배척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마침 혜주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대놓고 그녀를 ‘사이코’라고 불렀고, 혜주는 자신의 자리를 빙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을 밀쳐내고 소희의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혜주와 윤지가 동시에 소희의 토슈즈 한 짝을 붙잡았고, 윤지는 “네 것 맞아? 맞으면 돌려줄게.”라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항상 기죽어 있던 평소와 달리, 혜주는 윤지를 노려보며 토슈즈를 놓지 않았다. 윤지가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과 눈빛을 교환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혜주를 비웃는데, 혜주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윤지에게 달려들더니 책상을 번쩍 들고서 윤지를 내리치려고 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혜주의 공격적인 모습에 윤지는 순간 놀랐고, 문득 정신을 차린 혜주 역시 스스로에게 놀랐다. 혜주는 책상을 내던지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점심시간, 혜주는 학생식당에서 몹시 정신없이 게걸스럽게 급식을 먹고 있었다. 무심코 혜주와 같은 식탁에 앉았던 미술과 1학년 학생들은 경악하여, 밥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혜주의 모습을 한참동안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듯 “나… 그동안 너무 배가 고팠거든…”이라고 변명하는 혜주에게, 후배들은 “언니, 더 드세요. 저희는 배불러요.”라며 자신들의 식판에 있던 음식까지 덜어주고는 자신들끼리 키득거렸다. 혜주는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입 안에 음식을 그대로 물고서) “너희들은 내가 무슨 돼지인 줄 알아?!”라고 외치더니, 이전보다 더욱 노골화된 학생들의 비난과 욕설과 조롱들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식당을 뛰쳐나가 버렸다.

곧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지만, 미술과 2학년 학생 2명은 화장실에서 수다를 떨면서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화장실 칸을 열어본 그녀들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는데, 혜주가 어마어마한 양의 토사물을 변기와 바닥에 한가득 쏟아낸 채 기절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혜주는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여우계단에 오른다. 그리고 “소희를 다시 돌려줘”라는 소원을 빈다.

돌아온 소희[편집 | 원본 편집]

흐린 날씨에 비가 제법 많이 쏟아지던 어느 날, 종례시간이 되었지만 진성은 멍하니 홀로 창밖을 바라보며 교실에 서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교실에 들어온 담임 선생님은 “윤진성이 러시아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발표하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학생들에게도 다함께 박수를 치라고 했다. 하지만 무용과 학생 그 누구도 진성을 축하해주지 않았고, 차갑고 냉소적인 반응들만 보였다. 선생님이 재차 박수를 권하자 마지못해 몇 번의 박수 소리가 나왔을 뿐이었다. 모두가 불편한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 속에서, 무용과의 종례시간이 끝났다.

같은 시각, 혜주 역시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학교 건물 현관으로 나왔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혜주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와 텅 빈 복도를 오가던 혜주는, 벽에 기대어 있던 빨간색 우산을 하나 발견했다. 혜주가 복도에서 우산을 쓰고서 발레리나 흉내를 내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곧이어 익숙한 모습의 소녀가 교복 차림에 길고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발레리나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놀란 혜주의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혜주는 화장실로 갔다. 조금 전에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칸마다 모두 문을 열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자신이 한바탕 구토하다가 정신을 잃었던 칸을 열어보니, 벽면마다 자신을 추잡하게 묘사해놓은 온갖 욕설과 낙서들로 뒤덮여 있었다. 윤지를 비롯한 미술과 학생들의 소행임을 익히 짐작하고 분노한 혜주는, 화장실 칸의 문을 닫고 세면대로 와서 얼굴과 손을 씻었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다시 천둥번개 소리가 사방을 요란하게 울렸다. 혜주가 거울을 보고 있는데, 왼쪽 세면대 앞의 거울에 아까 복도에서 보았던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얼굴과 손을 씻는데, 저만치 뒤에 서 있던 소녀가 순식간에 앞으로 오더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혜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워진 저녁, 혜주는 혼자 미술실에서 흙으로 자화상을 빚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감미로운 목소리의 DJ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혜주는 자화상을 빚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해봅시다”라고 말하던 DJ는 갑자기 목소리를 음산하고 싸늘하게 바꾸어 “사랑을 주고도 배신당하면, 그때는 죽어야지요. 살아서 뭐합니까?”라고 말하더니, 깔깔거리며 비웃는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혜주가 라디오를 끄려고 했지만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라디오는 혜주를 도발하듯 책상 위에서 움직이기까지 했다. 혜주는 미술실에 있던 연장으로 라디오를 때려 부수었다.

이제 조용해졌나 싶어 혜주가 다시 라디오를 살피는데, 라디오는 여전히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놀란 혜주가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는데, (건물 외부를 향하여 나 있는) 미술실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낮에 복도와 화장실에서 보았던 소녀가 혜주의 얼굴 옆에 나타나 속삭였다.

머리가 검으면 더 예쁠 텐데.

혜주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비추어진 모습은 익숙하고 추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낮에 보았던 길고 검은 생머리의 아름다운 소녀-죽은 소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거울 왼편에서 또 하나의 소희가 나타나더니, 혜주에게 “예전부터 너와 친해지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거울 속 소희와 똑같은 얼굴의 혜주는, 황홀감과 기쁨에 어쩔 줄 몰라 웃음을 그치지 못한다.

같은 시각, 무용실에서는 진성과 영선이 발레 연습에 한창이었다. 선생님의 지시로 진성은 영선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오디오 장치가 고장이 나서 배경음악을 재생할 수 없게 되었고, 가뜩이나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마지못해 연습하고 있던 영선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만하자고 말했다. 발레 연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다가, 영선은 문득 진성에게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저번에 교내 예선 때 말이야… 너, 그때 소희와 토슈즈를 서로 바꾸더라? 왜 그런 거야?

진성은 순간 뜨끔했지만, 애써 드러내지 않고 “그게 왜 궁금한 거야?”라고 당당하고 단호하게 되받아쳤다. 진성이 당황할 줄 알았던 영선은 의외의 반응에 “그냥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 정색하니?”라며 한발 물러서더니, 먼저 샤워를 마치고 탈의실로 나갔다. 진성이 혼자 샤워를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샤워실의 불이 꺼졌다. 불은 이내 다시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샤워기에서 붉은 핏물이 쏟아졌고, 진성은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소리에 놀라서 달려온 영선이 “그냥 녹물이다”라며 핀잔하지만 진성의 놀람과 불안은 진정되지 않았고, 진성뿐 아니라 기숙사 전체가 한바탕 귀신 소동에 휩싸였다. 거세게 불어오는 음산한 바람 소리가 기숙사를 온통 감싸고, 기숙사생들은 사감 선생님을 붙잡고 “귀신을 봤다”며 공포를 호소하지만, 사감 선생님은 단호하게 “귀신이 어디 있어?! 그냥 바람 소리야!!”라고 잘라 말하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기숙사가 요란하게 들썩이는 와중에, 혜주는 방에서 연한 갈색이던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지만 그녀는 계속 눈에 보이지 않는 소희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소희가 생전에 진성에게 건넸던 말들을 중얼거린다. 염색을 마친 혜주는 이전에 자신이 쓰던 방, 즉 진성의 방으로 향했다. 한밤중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혜주가 찾아오자 진성은 당황했다. “무서우니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게.”라는 혜주를, 진성은 “뭐가 무서워. 그냥 바람 소리야. 여기 있으면 사감 선생님께 혼나.”라며 돌려보냈다.

윤지의 소원[편집 | 원본 편집]

수업이 끝난 어느 오후, 윤지는 미술과 친구들과 함께 여우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여우계단 전설에 관하여 재잘재잘 수다를 떨면서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거나 “예뻐지고 싶다”는 등의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윤지는 “갑자기 볼 일이 생겼다”며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여우계단에 남았다. 사실 윤지 역시 ‘소원을 이루어주는 29번째 여우계단’에 대하여 적지 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과 학생들은 기말고사 과제로 자화상을 빚고 있었다. 선생님은 미술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작업을 살펴보며 지도하다가, 미술과 1등인 윤지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애들과 함께 하려니 수준이 안 맞지? 내가 조만간 지하실에 내려가서 볼 거야?”라고 말한다. 윤지는 도도하게 “알았어요.”라고 대답하며 미술도구들을 챙겨서 지하 작업실로 내려가지만, 선생님도 학생들도 월등한 실력의 그녀를 정색하여 꾸짖거나 무시하지 못한다.

윤지는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을 계속한다. 얼굴만 만들고 있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녀는 전신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원대한 야심과 달리 좀처럼 원하는 대로 멋지게 만들어지지 않아서 무척이나 답답하고 화도 많이 났다. 윤지의 어머니는 미술계에서 이름난 작가이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술을 공부한 윤지 역시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닮아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으며 주변으로부터 ‘미술 신동’으로 많은 기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윤지는 한계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한창 작업하던 윤지가 소파에 누워 쉬면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데, 지하실에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내려오신 줄 알고 윤지는 화들작 놀라서 서둘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는데, 나타난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라 평소 무시하던 혜주였다. 윤지는 안도하는 동시에 혜주에게 폭언과 욕설을 내뱉는데, 평소와 달리 혜주는 “이건 네 의자가 아니잖아!!”라고 외치며 윤지를 공격한다. 놀란 윤지가 몸을 피하려고 하자, 혜주는 소희의 가냘픈 목소리로 “너, 혜주에게 왜 그래? 혜주가 불쌍하지도 않아?”라고 호소한다. 이어 그녀의 목소리는 섬뜩하게 바뀌어 “오늘 내가 너의 소원을 이루어줄게…”라고 말하더니, 등 뒤에 숨겨두고 있던 조각도를 연신 휘둘러 윤지를 살해한다.

미술 선생님은 한참 후에야 지하 작업실로 내려왔지만, 구석구석 살펴보아도 윤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작업대 위에서 윤지의 전신상을 발견한 선생님은 감탄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우며 형태도 비례도 정확했기 때문이다. 윤지를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선생님은 종이와 펜을 꺼내어 ‘한윤지, 최고다!’라고 써서 전신상 앞에 놓고는 지하 작업실을 나갔다. 선생님이 나가자 전신상의 머리카락 부분에서 미처 마르지 않은 흙이 떨어졌고, 미처 흙을 다 바르지 못한 손가락 끝 부분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소희에게 빙의된 혜주[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진성이 유학가기로 결정된 러시아 발레학교에서는,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로 관련 우편물을 보냈다. 무용 선생님은 진성에게 “기숙사로 우편물을 보내놓았으니 확인해 봐라”라고 말씀하셨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간 진성이 사감 선생님에게 우편물에 대해 물었더니, 사감 선생님은 “너의 방에 갖다놓았다”고 답한다. 그러나 방으로 올라간 진성이 책상 위에서 발견한 것은 텅 빈 봉투뿐이었고, 진성은 당황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린다.[4]

진성은 무용과 후배로부터 “선생님이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용실로 간다. 하지만 무용실에는 선생님 대신 무용과 학생들만 여럿 있었다. 무용실을 현수막과 풍선으로 장식해놓고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들은 폭죽을 터뜨리고, 스프레이를 뿌리고, 진성에게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내밀며 유학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축하에 진성이 고맙다고 웃으며 케이크의 촛불을 끄자, 학생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진성의 얼굴에 케이크를 와락 처박았다. 학생들은 진성을 조롱하며 썰물처럼 무용실을 빠져나갔고, 진성은 충격을 받아 얼굴과 옷에 생크림이 묻은 채 그대로 무용실에 서 있었다.

진성은 대강 씻은 후 넋을 놓고 교내를 배회한다. 어느새 그녀의 걸음은 소희가 자신과 다투다가 굴러 떨어져 다쳤던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위에 방치되어 있던 여러 그림들 중에서, 유독 인물화 1점이 묘하게 진성을 노려보는 듯했다. 그때처럼 무언가 계단을 굴러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희와의 일을 떠올리며 진성이 돌아보았더니, 그 소리의 정체는 계단 위에 있었던 그림들 중 하나였다. 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무언가가 진성의 두 발목을 덥석 잡았다. 창백한 얼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눈이 퀭한 소희였다. 진성은 비명을 질렀다.

진성이 깨어난 곳은 교실이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방금 전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지경으로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진성은 여우계단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핸드폰을 열고 확인해본 문자는 그녀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이따가 저녁 7시에 지하 작업실에서 만나. ^^ -소희-

죽은 소희가 문자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진성은 무슨 일인지 진상을 파악하고 싶어서 약속시간에 지하실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진성을 요란하게 반기는 사람은 소희가 아닌 혜주였다. 혜주는 소희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생전 소희의 말투와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진성의 유학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노라고 말한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진성과 다르게 혜주는 너무도 사근사근 살갑게 굴면서, 손수 준비하여 차려놓은 조촐한 잔칫상(케이크와인) 앞으로 진성을 안내한다.

혜주가 병따개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성은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지하실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도중에 혜주가 만들고 있던 자화상에 씌워진 비닐이 벗겨지는데, 그것은 혜주가 아닌 소희의 얼굴이었다. 진성은 경악하여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출구로 향하는 길목에는 이미 혜주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소희에게 선물했던 발레리나용 왕관을 쓰고 울면서 “진성아, 소희가 자꾸 나를 찾아와.”라며 호소하는데, 조금 전과 달리 예전 자신의 목소리와 태도였다. 순간 다소 안심한 진성이 혜주에게 조금 다가가자, 혜주는 진성을 와락 껴안고 다시 소희의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기겁한 진성은 비명을 지르며 혜주를 와락 뿌리치고 지하실을 빠져나와 1층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바깥으로 통하는 현관문들은 모두 잠긴 상태였다. 혜주는 진성을 쫓아오고, 진성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다시 지하실로 향하게 된다. 작업대 밑에 엎드려 숨어있던 진성은 실수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혜주의 인형을 세게 눌렀고, 인형에서 소리가 나면서 그만 혜주에게 들키게 된다. 진성은 작업대 위에 있던 조각도를 손에 꼭 쥐고서 혜주에게 맞선다.

엄혜주, 네가 모르는 것이 있어. 나는 소희를 계단에서 밀지 않았어. 네가 소희라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잖아?! 엄혜주, 너는 미쳤어!!

혜주와 맞서던 진성은 작업대 위에 앉아있던 윤지의 전신상을 건드렸고, 전신상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신상이 아니라 윤지의 시신 위에 흙을 발라 전신상으로 위장해놓은 것이었고, 시신이 넘어지면서 들끓고 있던 구더기들이 드러났다. 진성은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혜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소희의 흉내를 내면서 “무슨 소리니, 진성아? 엄혜주라니? 어떻게 그런 더러운 아이와 나를 착각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어 소희와 혜주의 목소리가 동시에 합쳐져 “나야, 소희.”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진성이 혜주를 외면하고 돌아서려 하자, 혜주는 소희가 계단에서 진성에게 했던 말을 한다.

너 이대로 가버리면, 다시는 나를 못 보게 될 줄 알아!!

순간 진성은 움찔했지만, 다시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혜주를 지하실에 남겨둔 채 나가버렸다. 혜주는 망연자실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진성이는 너를 좋아하지 않나 봐…”라고 중얼거리더니, 지하실 바닥에 기름을 붓는다. 기름에 비친 혜주의 모습은 날씬한 검은머리가 아니라, 이전처럼 뚱뚱한 갈색머리였다. 혜주는 라이터를 켜서 기름 위에 던지고, 지하실은 삽시간에 불길로 휩싸인다.

진성과 소희의 재회[편집 | 원본 편집]

한편 무용과 탈의실 사물함을 정리하던 진성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환상을 보게 된다. 진성의 뒤편에서 사물함을 열어보고 있던 소녀가, 사물함 속에 들어있던 새 토슈즈를 보자 갑자기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병이 깨지며 사방에 유리조각이 튀었다. 그녀는 바로, 서울발레콩쿨 교내예선전 직전의 진성 자신이었다.

이때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영선이 이 광경을 목격하여 깜짝 놀라고, 뒤따라오던 누군가에게 탈의실의 상황을 소곤소곤 이야기해 주는데… 영선을 뒤따라오던 사람은 바로 소희였다. 영선과 소희가 문틈으로 탈의실 내부를 살펴보니, 진성은 소희가 선물해진 토슈즈에 깨진 유리조각을 넣으면서 입이 찢어지도록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면서, 그리고 소희가 자신의 악행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유리조각이 들어있는 토슈즈를 그대로 신고서 교내예선을 치렀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진성은 큰 충격과 자괴감에 빠진다.

그러나 진성은 애써 마음을 독하게 먹고 러시아 유학을 준비한다. 드디어 출국 전날, 진성은 기숙사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짐을 모두 싸놓고, 책상 위에 여권과 비행기 표를 올려놓고 일찌감치 전깃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불을 끄자마자 창가에는 소희가 나타났고, 소희는 창문을 두드리더니 이내 창문을 열고 진성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진성은 옷장 속으로 숨었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 ‘이제는 괜찮아졌을까’ 하여 살그머니 옷장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진성의 옆에는 혜주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진성은 비명을 지르며 옷장을 뛰쳐나왔고, 이어 방에서도 뛰쳐나와 발길 닿는 대로 교내를 뛰어다녔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학교 건물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멀쩡하던 창문이 갑자기 혼자서 와장창 깨지고, 복도의 전등은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며, 그녀의 뒤에서는 소희가 <지젤> 배경음악을 흥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 묻은 토슈즈가 바닥을 탁탁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진성의 발걸음은 무용실에 닿았고, 그곳에서는 소희가 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레복 차림에 머리를 산발한 소희는 공중을 날아다니며 발레를 하다가 진성에게 날아왔고, 창밖에서는 소희의 얼굴이 무용실 내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성은 허둥지둥 무용실을 빠져나와 소희로부터 도망쳤다.

진성이 도착한 곳은 여우계단이었다. 그녀는 “되돌려놔, 다시 처음으로 다 되돌려놓으란 말이야!”라고 절규하며 계단을 올랐다. 끊임없이 강풍이 밀어닥치고, 바람소리는 마치 누군가들의 울음소리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었으며,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발목을 누군가가 연신 붙잡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했으나, 계단의 개수는 여전히 28개에서 끝나고 있었다. 아무리 계단을 올라도 29번째 계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진성의 발걸음은 다시 28번째 계단에서 끝났다. 그리고 계단 앞에 있던 나무 위에서, 교복 차림의 소희가 뛰어내렸다. 도망치려는 진성의 등 뒤에서 소희는 “가지 마!”라고 외쳤고, 진성은 더 이상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진성아, 왜 자꾸 나를 피하니? 나는 여기서 아주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어.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야… 나에게는 너밖에 없어…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까? 여기에 너를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 너무 무서워…

소희는 진성의 등 뒤로 다가와서 진성을 꼭 껴안았다. 진성은 눈물을 흘리며 소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너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어. 그저… 단 한번만이라도… 너를 이겨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용서를 구하는 진성에게, 소희는 생전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소희는 진성의 허리를 점점 더 세게 껴안았다.

그럼…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니. 우리는 친구잖아… 진성아, 그런데…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앞으로…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우리…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소희의 품 안에서 진성의 허리는 완전히 꺾였고, 진성은 그대로 여우계단 위에 힘없이 쓰러진다. 무표정한 얼굴로 진성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소희의 형체가 점점 흐려지더니 완전히 사라진다.

다시 처음으로[편집 | 원본 편집]

4명의 학생이 떠난 후로도, 영화여자예술고등학교는 여전히 변함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무용과 탈의실의 사물함에서는 소희와 진성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미술실에서는 혜주와 윤지가 만든 작품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기숙사에는 음악과 학생[5] 1명이 새로 입사했다.

교복 차림에 책가방과 함께 커다란 첼로를 짊어진 그녀는, 소문으로만 듣던 여우계단이 신기한지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세어보았다. 검은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이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기숙사를 향해 올라갔지만, 계단은 역시 28개뿐이었다. 그녀는 “에이, 뭐야”라고 웃으며 계단을 끝까지 올라 기숙사로 들어가서, 사감 선생님이 안내하는 방에 짐을 풀었다. 사감 선생님은 “오랫동안 비워놓았던 방이니 환기를 시키라”고 당부하고 방을 나갔다.

창문을 열었더니 (예전과 달리)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어서, 창문으로 드나들 수 없는 구조였다. 그녀는 무심코 발레 <지젤>의 배경음악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다가 “어? 이게 무슨 노래지? 내가 아는 노래인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옷장 앞을 지나 방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발 근처로 발레리나 인형과 사진 몇 장이 뒹구는데, 진성과 소희가 기숙사 방에서 함께 찍은 즉석사진이었다. 사진 속 소희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소희의 눈동자가 갑자기 새하얗게 변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각주

  1. 진성이 열려있던 창문을 닫는데, 창가에는 예전과 달리 사다리가 없었다. 전날 밤 진성의 방에 찾아왔던 소희의 정체를 암시하는 장치이다.
  2. 창가 맨 뒷자리
  3. 이때 창밖의 운동장에서는 미술과 학생들이 피구를 하고 있었는데, 혜주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었다.
  4. 삭제된 부분과 소설에 의하면, 우편물은 기숙사 지하 1층의 세탁실에서 발견된다. 혜주가 진성의 우편물을 훔쳐서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5.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서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부분이었으나, 박한별이 맡은 배역이었다고 한다. 즉 영화에서 박한별은 1인 2역(김소희, 음악과 학생)을 연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