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스페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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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스페인 전쟁(영어: Sapnish-American War)은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사이에서 있었던 전쟁이다. 스페인을 한자로 서반아(西班牙)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줄여서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 하기도 한다.

전쟁의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미국-스페인 전쟁의 원인은 꽤 단순한 편에 속하는 전쟁이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스페인의 탄압이 심화되면서 잦은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이 무렵 미국의 자본이 상당히 쿠바의 플렌데이션이 투자되어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미국은 쿠바에 대한 투자와 교역을 유지하고, 쿠바에 거주중이던 미국 시민을 보호할 계획이었으며, 더 나가서 쿠바를 독립시키면서 자신들의 시장을 확장하는 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메인호를 기억하라!

이러한 배경에서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아바나 항에서 쿠바에 거주중이던 미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파견되어있던 미국 전함 메인함이 폭발하여 승조원 354명 중 26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원인은 21세기가 되도록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의 테러로 단정짓고 1898년 4월 21일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두 나라의 전력 및 작계[편집 | 원본 편집]

전쟁 초기에 미국 해군은 전함 5척, 장갑순양함 2척, 다수의 초게함과 포함, 그리고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 함대의 주력은 10,000톤급의 신형 전함 아이오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 오리건 4척과 구형 전함이었던 전함 텍사스, 그리고 8,000톤급 장갑순양함 브룩클린과 뉴욕 2척이었다.

스페인쪽의 전력은 전함 1척, 장갑순양함 5척, 순양함 11척, 그리고다수의 포함과 약간의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의 주력은 전함 펠라요를 비롯하여 7,000톤급 장갑순양함 카를로스 5세, 마리아 테레사, 오퀜도 및 비스카야와 보다 신형인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구성되었다. 숫적으로는 스페인 해군이 미국에게 밀릴 것이 전혀 없었으나 문제는 스페인 해군의 행정능력은 미국에 비해서 뒤쳐진데다 훈련상황도 미국보다 뒤떨어져 있었고 결정적으로 보급 상황이 해외 식민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상당히 불안한 보급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작계[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해군 차관이었던 루즈벨트만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필리핀에 있고, 그 곳에 함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과 전쟁을 할 경우 대서양태평양 두 곳에서 동시에 공세적인 작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남북전쟁에서 실전경험이 있는 듀이 준장을 미국 해군의 아시아전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897년 12월에 부임한 듀이 제독은 필리핀 근해의 수로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홍콩에서 전투를 준비하였으며, 예하 함정을 정비수리하면서 필리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여기에 미국 해군은 대서양 방면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태평양 연안에 전개중이던 전함 오리건을 대서양으로 이동시켰다. 당시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의 시절이어서 남미의 혼 곶(케이프 혼)을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없는데 실제로 3월 6일 시애틀에서 출항하였던 오리건은 평균 12노트의 속력으로 66일동안 15,000마일을 항해하여 5월 18일 서인도제도 해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서양쪽 주요 작전은 서인도제도를 벗어난 공세작전을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서양에서 미국 해군의 주력부대는 샘슨 소장이 지휘한 북대서양 전대였으며 키웨스트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4월 22일 미국 해군성은 샘슨 제독에게 쿠바 해역을 봉쇄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샘슨 제독은 여기서 더 나가서 아바나를 포격하고 아예 상륙전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해군성은 육군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제해권 확보 전에는 상륙작전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당장 승인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작계[편집 | 원본 편집]

스페인은 사실 전쟁에 대비한 특별한 계획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스페인 정부는 세르베라 제독의 지휘 아래 1개 전대를 출동시켜 서인도제도의 스페인 식민지를 보호하도록 조치하였을 뿐이다. 세르베라 제독의 전대 순양함 4척과 구축함 2척이 스페인에서 가용한 전제 전력이었는데 여기에 화력이 강한 펠라요와 카를로스 5세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아예 출항조차 하지 못하였다.

주요 전장[편집 | 원본 편집]

미국-스페인 전쟁은 두 전쟁 당사국의 지리적인 거리 때문에 주로 해군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제해권을 장악한 국가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 전쟁에서의 주요 전장은 필리핀에서 발생한 마닐라 만 해전쿠바에서 전개된 산티아고 해전에 의하여 결정되게 되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마닐라 만 해전과 산티아고 해전 두 곳에서 모두 패배한 스페인은 결국 미국의 종전 제안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1898년 12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의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결과 스페인은 쿠바의 독립을 승인하고,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하였으며, 필리핀도 헐값에 미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제는 이 영토들은 당시 스페인 해외 식민지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후로도 스페인의 해외 영토는 거의 늘어나지 못하여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카나리아 제도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미국은 이 전쟁으로 북미 일대에서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기 시작하였으며, 먼로주의를 무력으로 실현하면서 미주 대륙 일대에서의 유럽 세력을 사실상 몰아내고 해당 지역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다만 이 당시 필리핀까지는 미국이 단독으로 방어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서 일본제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대한제국과 필리핀의 상호 지배권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을 믿던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쳐 맞은 셈. 이외에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 함대가 분산되어 있고, 이것을 서로 집중하려다 보니 너무 먼 거리를 돌아가서 개고생을 했던 오리건함의 항해 사례 이후 미국은 미친듯이 파나마 지역의 운하 건설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파나마 지역을 배후조종하여 파나마까지 독립시켜 친미정권을 세운 뒤 진짜로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게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