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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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걸 국방부 정훈국 장교가 훈장 상신서를 보고 대단한 영웅을 발견했다며 국방 잡지에 소개했고, 심일의 육사 교관이었던 대령이 노몬한 전투로 생도들의 <s>덴노 헤이카 반자이</s> 정신교육을 했는데 그대로 실천했다고 <s>망언을</s> 퍼뜨리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심일을 수색중대장에 임명, 영월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추가 조작을 가하였다.<ref name=chosun></ref>
그런데 그걸 국방부 정훈국 장교가 훈장 상신서를 보고 대단한 영웅을 발견했다며 국방 잡지에 소개했고, 심일의 육사 교관이었던 대령이 노몬한 전투로 생도들의 <s>덴노 헤이카 반자이</s> 정신교육을 했는데 그대로 실천했다고 <s>망언을</s> 퍼뜨리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심일을 수색중대장에 임명, 영월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추가 조작을 가하였다.<ref name=chosun></ref>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을 본 이대용 예비역 준장은 춘천 전투 당시 연대장이었던 임부택 예비역 소장을 만나 심일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바로잡자고 논의했으나 2005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한 심일의 모친보다 임부택이 먼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이대용은 국방부와 6·25 전사편찬위원회에 사건의 진실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 name=chosun></ref>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을 본 이대용은 춘천 전투 당시 연대장이었던 임부택 예비역 소장을 만나 심일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바로잡자고 논의했으나 2005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한 심일의 모친보다 임부택이 먼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이대용은 국방부와 6·25 전사편찬위원회에 사건의 진실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 name=chosun></ref>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과 서로가 입을 다물면 모두가 해피 엔딩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조작을 용납하는 순간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과거사 부정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짐으로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정당성과 희생을 통해 무훈과 명예를 쌓은 수많은 참전용사들을 욕보이는 행동을 국방부는 스스로 저지른 것이다.<ref>당시엔 몰랐다고 할 수 있으나 진실을 들었음에도 고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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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5일 (화) 16:38 판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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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28일
결과 북한의 피로스의 승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이청송 소장
현파 총좌
이성호 대좌
전병갑 대좌
전문섭 중좌
안격호 대좌
이원성 대좌
김종오 대령
임부택 중령
민병권 중령
김성 소령

개요

제7연대 제1대대 무쌍 또는 인민군 제2사단의 눈물나는 이야기. 춘천-가평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국군 제6사단 예하 제7,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제2보병사단과 제12보병사단 예하 31연대와 벌인 전투이다.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과 가평을 점령한 뒤 서울 동남쪽으로 진군한다는 계획에 따라 화천-춘천과 화천-가평 축선에 병력을 투입해 국군 제7연대를 공격하였다. 제7연대는 38도선에서 철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였으며 27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뒤 금곡으로 철수하였다.

전투전 상황

북한군

원래 함흥에 배치되었던 제2사단은 춘천 공격을 위해 6월 17일 까지 배치를 완료하였다. 제2사단은 춘천과 가평을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제1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단의 주공이자 우익인 제6보병연대의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춘천 방면으로, 제2대대가 가평 방면으로 진출하는 사이, 조공이며 좌익인 제4보병연대는 양통고개-부귀대를 돌파해 청평리-천정리로 이동해 춘천을 포위하기로 하였다. 제17보병연대는 제6연대를 지원하는 예비대의 성격을 띄었다.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사단의 좌일선 부대로 5월 3일에 춘천으로 이동하였고 제8연대가 담당하던 화천 방면의 경계임무를 인수받아 제3대대와 제2대대를 좌우로 두고 제1대대는 연대본부와 함께 춘천에 주둔하였다.

제6사단은 춘천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던지라 제16야전포병대대를 춘천에 배치시켜 화력을 강화하였다. 다만 각 중대가 담당하던 지역이 병력에 비해 넓었기 때문에 중요지형과 예상접근로에만 병력을 배치하고 빈 공간은 시민단체를 동원하여 경계임무를 수행케 하였다.

제7연대의 장병 모두는 지형에 익숙한 상태였으며 훈련에 큰 관심을 가졌던 임부택 중령은 38선을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연대의 대대 전투 훈련을 완료시켰다. 연대장은 휘하에 있던 대부분의 장교들을 보병 및 포병학교에 파견시키는 등 이색적인 행보를 보였다. Every officer is an artilleryman 우리는 화력덕후 또한 춘천 시내가 38도선에 매우 가까운데다 방어면적에 비해 연대병력이 터무니 없이 적었으므로 소양강변과 164고지에 콘크리트나 통나무, 대인지뢰 등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우주방어 방어진지를 보강했다.

매번 등장해 제6사단의 귀중한 경험치로 바뀌는 북한은 5월 이래로 한 건의 도발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6월초부터 포진지가 늘어나고 지도를 펼친 장교들의 모습이 관측되자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예의주시하였다. 그런데 6월 19일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으로부터 북한군 제2사단 소속 전차병이 귀순하여 화천에 많은 병력, 전파, 포가 집결했음을 증언했다는 보고를 받자 제7연대에게 정찰 명령을 내렸다. 연대장은 6월 23일 08:00에 직접 귀순 병사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목격하고 마침 연대를 방문한 사단장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전운이 감돌자 사단장은 즉시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의 고문관인 미군 대위에게 상황을 알려주었으나 북한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제7연대장은 작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군량미의 부족으로 외출 명령을 내린 육군본부에 의해 사단 병력의 1/3이 빠진 상태였다.

전투

춘천지구 전투

6월 25일

04:00 북한군이 포격을 시작하였으며 이에 고탄리 북쪽 286고지에 있던 제3대대 제9중대의 중대장 이내흥 대위가 전사하였다.[1] 포격 보고를 받은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북한의 침공 방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포격이 인람리에 집중되는 것을 보고 주공이 화천-춘천-홍천으로 이어지는 5번 도로라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연대장은 비상을 발령하고 사단장에게 보고한 뒤 각 대대에 명령을 하달하였다.

약 1시간의 포격이 끝나자 북한군의 주공 제6연대가 SU-76 자주포와 함께 국군 제3대대를 공격하였다. 전사한 중대장을 대신해 김정규 중위가 지휘한 제3대대 제9중대는 병력 부족으로 05:30에 진지 돌파를 허락하였다. 살아남은 제9중대원 30여명은 07:30에 제6중대 일부와 합류해 예정된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북한군 조공 제4연대는 국군 제2대대를 고립시키고 2개 대대를 투입시켰으며, 06:00에 진지가 돌파되자 제7, 제5중대는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08:00에는 제6중대도 철수를 시작하였다. 제2대대는 11:00에 연대 지휘소가 설치된 우두산에 집결하였으며 1시간 뒤 소양강을 도하해 하천선 방어에 임했다. 때마침 북한군 제4연대는 소양강 도하를 준비하였는데 제5중대장 김상흥 대위는 30명의 병사와 함께 적진에 침투하여 반격을 가하고 무사히 되돌아왔다.

한편 춘천역 부근에 위치한 예비대인 제1대대는 대대장 김용배 소령의 판단아래 연대장의 비상 이전부터 외출 중인 장병들을 소집하고 있던지라 출동명령을 받았을 땐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한 상태였다. 08:20 제1대대는 128고지와 164고지에 이르는 진지에 투입이 완료되었다.

12:00 북한군 제6연대가 SU-76을 5대와 함께 옥산포를 통과하고 넓은 지역에 나타나자 국군 제1대대는 제16포병대대의 사격과 함께 공격을 했다. 기습을 받은 제6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도주하자 제1대대가 추격하였으나 연대장은 제1대대를 다시 포지원거리 내로 복귀시켰다.

북한군이 다시 SU-76 10대를 앞세우고 옥산포로 돌아오자 국군은 57mm 대전차포로 응사했다. 모두 명중했음에도 격파에 실패하자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 중위가 가까이 접근해 SU-76 2대를 격파하하고 승무원을 생포했다. 피해를 입은 북한의 SU-76 부대는 서원 방면으로 퇴각하였고, 자주포가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지켜본 제7연대의 사기가 올랐다.[2]

2차례의 공격에 실패한 북한군은 만회를 위해 국군 제1대대가 위치한 164고지를 1개 대대로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모든 공격과 제6연대의 소양강 도하가 실패하자 예비대인 제17연대를 투입했다. 때마침 제1대대도 반격을 하던 중이라 서로 개활지에서 맞닥트리게 되었고 제1대대의 중화기와 포병 지원에 북한군 제17연대는 궤멸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 제1대대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자 대부분이 죽거나 북한강에 빠져 익사했으며 극히 일부만이 건너편으로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북한군이 개활지를 밀집대형으로 인민 웨이브 밀고 내려온 반면 국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엄폐를 하였으며 제16야전포병대대는 5천발의 포탄을 쌓아두고 신나게 쏘아재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분들이 대한민국 국군 화력덕후 시초일지도.

6월 26일

전날 제1대대의 반격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옥산포에 집결했으며, 그 사이 원주역을 출발한 국군 제19연대의 제1, 제2대대가 05:00에 춘천에 도착하였다. 제2대대는 연대장 민병권 중령의 명령에 따라 소양강을 건너 우두산에 도달해 제7연대 제1대대와의 연결에 성공했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증원에 힘입어 옥산포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제1대대 김용배 소령에게 08:00부로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제19연대장 민병권 중령은 제2대대장 최석락 소령에게 동일한 시각 제17연대 제1대대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대대는 대포병사격으로 포격 지원이 끊긴 상황에도 북한군 1개 대대규모를 사살하고 옥산포를 탈튀하고 더욱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13:00 북한군이 포격과 함께 SU-76 자주포를 선두로 국군 제1대대에 공격을 개시하자 2.36인치 바주카로 반격했으나 격파에 실패했다. 제1대대는 최전방에서 싸우던 제3중대를 옥산포로 되돌리고 1시간 동안 교전을 치루었으나 다시 164고지로 복귀하였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적이 계속 몰려오자 소양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역공하기 위해 도하명령을 내렸다. 15:00 제19연대 제2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제7연대 제1대대가 소양강을 도하하자 이를 눈치챈 북한군이 접근했으나 제2대대는 포병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제2대대가 도하할때도 북한군이 공격해왔는데 제5중대가 방패막이가 되는 사이 대대가 도하하였으며 제5중대도 소대별 축차 엄호로 도하하여 본대와 합류하였다.

모든 부대가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자 공병대대장 박정채 소령이 사단장에게 기존 작전에 따라 소양교 파괴를 건의했으나 기각당하고 대신 파괴된 트럭으로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한편 제7연대 제2대대는 17:00 소양강 북안 천전리 일대에 자주포와 대규모 병력이 우두동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자 박격포로 사격하였다. 1시간 뒤 춘천 동쪽 방어를 위해 후평리로 이동하였고 온갖 중화기를 보유한 제8중대가 소양교에 배치되었다.

6월 27일

05:00 북한군은 집중포격을 시작했으며 06:00부터 총공격을 시작했다. 제7연대와 제19연대 모두 중과부적에 달하자 사단장이 홍천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먼저 제1, 제2, 제3 각 대대의 연계적인 엄호 아래 제19연대가 10:00부터 철수를 시작해 13:00에 학곡리에 집결하여 30분 뒤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제7연대를 공격한 북한군은 막대한 인명손실과 자주포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결국 11:00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하에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의도한 만큼 작전이 잘 진행되지 않고 사상자만 늘어나자 화력지원만 하던 자주포를 소양교로 밀어붙이고 더욱 많은 병력을 도하시켰다. 그리고 전날 도착했지만 통신이 두절되어 멍때리던 제12사단 제31연대가 연락을 회복하자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13:00 제7연대는 상황이 악화되자 원창고개에 연대관측소를 이동시켰다. 15:00 제1시가지 방어선이 뚫리고 제2시가지 방어선도 17:00에 돌파되었다. 게다가 제19연대가 있었던 빈 공간을 통해 연대의 우측을 위협하자 연대장은 보급로 차단을 우려해 춘천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대룡산으로 북한군을 유인하여 섬멸한 뒤 춘천을 탈환하겠다고 건의했으나 사단장은 포위되기 쉬운 위치인데다 병력 보전을 위해 계획 승인을 거부하였다. 18:00 마지막 방어선이 뚫리자 제7연대는 철수하였고 북한군 제2사단이 결국 춘천을 점령하였다.

가평지구 전투

6월 25일

국군 제3대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대대장 인성관 소령은 보병학교 입교를 위해 자리를 비웠으며 연대 작전주임 이남호 소령이 제3대대장으로 겸직 발령을 받았으나 현재 상황에서 작전주임을 대신할 장교가 없어 결국 제10중대장 하상도 대위가 대대장 대리를 하였다. 또한 38도선 임무를 담당했던 제9중대는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 중이었으며 대대 예비인 제11중대는 가평에 있어 거리가 멀었다. 제12중대의 경우 화력지원을 위해 춘천에 있었다. 즉 제3대대는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 되어 대대 소속 4개 중대가 따로 독자행동을 하는 상태였다.

05:00 북한군 제2사단 제6연대 제2대대가 접근하자 제1소대로 하여금 유인 격파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09:00 제1소대는 콘크리트 토치카에 대기하다 적이 다가오자 격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우회기동을 하자 14:00에 자리를 이탈, 16:00에 339고지에서 중대와 합류하였다. 병력이 워낙 부족했던지라 북한군 제2대대는 가평 동북쪽 10k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00 제11중대가 제10중대와 합류하였으며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6월 26일

07:00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였고 국군 제3대대는 지형을 이용해 저항하였다. 그런데 마침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제1기갑연대 제1중대 1개 소대가 나타났고 장갑차를 이용해 화력지원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기 역부족이었던지라 14:00부터 후퇴를 시작했고 제11중대는 우일선 434고지, 제10중대는 좌일선 옥녀봉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 제2대대는 가평 서쪽 2km 거리까지 전진해 서울과 춘천을 잇는 46번 도로를 노렸다.

육군본부는 제7사단과 제6사단 사이에 30km 간격이 생기자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를 가평으로 파견했다. 제8연대 연대장은 가평군청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제7연대 제3대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또다시 배치계획이 바뀌자 다음 날 서울로 복귀하게 되었다.

6월 27일

07:00 북한군이 46번 도로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대대장 대리 하상도 대위는 제10중대를 보납산으로 철수시키고 제11중대를 가평 인근으로 물렸지만 북한군은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제10중대와 제11중대 사이에서 화력을 지원하던 기갑연대 제8중대는 제8연대가 철수했음을 알아차리고 서울로 복귀하였고 북한군이 그 간격으로 침투함으로서 두 중대가 분리될 상횡에 놓였다.

제3대대는 연대와 통신이 두절되고 탄약이 떨어져가며 계속된 전투로 극도의 피로에 노출되었다. 이에 대대장 대리는 대대를 가평 남서쪽으로 철수시켰으며, 도중 원주로 철수하여 연대와 합류하라는 육본의 지시로 청평을 거쳐 횡성으로 이동 본대와 합류하였다.

제3대대의 철수로 북한군 제6연대 제2대대는 가평 근처 경춘철로를 차단하고 춘천을 점령한 본대와 합류해 가평으로 진공했다.

6월 28일

14:00 북한군이 가평을 점령하고 제2사단의 주력이 서울 동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결과와 평가

국군 제6사단 제7, 제19연대는 북한군 제2사단을 3일간 어그로를 끌고 지연시키고 큰 피해를 입혀 북한군 전체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일으켰다. 제6사단의 괴짜들 지휘관들이 장병과 장교들의 훈련과 교육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고, 두터운 방어진지의 구축, 첩보전의 중요성과 공수전환의 유연성이 낳은 결과였다. 특히 포병의 적극적 활용은 전선 전반에 걸처 전장을 지배했으며 군밀레 '명장 아래 약졸 없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다만 인접사단간의 통신상태가 좋지 않아 즉각적인 상황파악과 정보 공유가 힘들었으며, 특히 제7연대 제3대대의 병력 분산 배치와 소양교 폭파 실패는 방어작전에 지장을 초래했다.

이후 북한군 제2사단은 국군 제7연대 제3대대를 추격해 6월 29일 20:00 서울 동쪽 25km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북한군 제12사단 제31연대는 원창고개에서 제7연대와 맞붙게 된다. 자세한 것은 원창고개 전투 참고.

심일 소령의 전과 조작

당시 제7연대 제1대대 제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이자 전 주월(駐越) 공사가 교전 상황이 기록된 자료를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에게 넘겨주고 그것이 기사화 되면서 심일 소령의 전과(戰果)가 국방부에서 저지른 허위 날조임이 밝혀졌다. 심지어 심일 소령은 6·25 호국 영웅 리스트 첫 줄에 기재되었고, 동상이 세워짐은 물론, 육군에서 매년 우수한 중대장에게 심일상을 수여하는 등 사회적인 여파가 큰 인물이기에 이슈가 되었다.[3]

증언과 기록에 의하면 심일 소령은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대전차포 1문을 북한군이 접수하도록 방치한 뒤 도망을 가 소속 중대장이 총살감이라 보고할 정도로 노여움을 샀다. 보직 해임된 심일 소령은 뒤에 포병 연락장교로 일하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퇴각 중 1951년 1월 26일 중공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나중에 그의 부모가 제7연대를 찾아와 네 아들 중 막내만이 남았다며 하소연 하니 연대장이 훈장을 하나 받아주겠다고 약속한 뒤 돌려보냈다. 부관이 심일은 훈장을 줄 만한 전공이 없다고 보고하자 연대장이 노몬한 전투에 있었던 일본군의 육탄 돌격을 떠올리며 사스가 황군의 후예 훈장을 만들라고 지시했으며, 1951년 10월 심일에게 태극무공훈장이 나와 부모에게 전달하였다.[3]

그런데 그걸 국방부 정훈국 장교가 훈장 상신서를 보고 대단한 영웅을 발견했다며 국방 잡지에 소개했고, 심일의 육사 교관이었던 대령이 노몬한 전투로 생도들의 덴노 헤이카 반자이 정신교육을 했는데 그대로 실천했다고 망언을 퍼뜨리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심일을 수색중대장에 임명, 영월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추가 조작을 가하였다.[3]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을 본 이대용은 춘천 전투 당시 연대장이었던 임부택 예비역 소장을 만나 심일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바로잡자고 논의했으나 2005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한 심일의 모친보다 임부택이 먼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이대용은 국방부와 6·25 전사편찬위원회에 사건의 진실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과 서로가 입을 다물면 모두가 해피 엔딩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조작을 용납하는 순간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과거사 부정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짐으로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정당성과 희생을 통해 무훈과 명예를 쌓은 수많은 참전용사들을 욕보이는 행동을 국방부는 스스로 저지른 것이다.[4]

각주

  1. 6·25 전쟁의 최초 전사자라고 추정되는 인물이다.
  2. 조작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서술.
  3. 3.0 3.1 3.2 3.3 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1]
  4. 당시엔 몰랐다고 할 수 있으나 진실을 들었음에도 고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