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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은 지속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등과 경쟁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스페인]]과도 경쟁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다. 이 전투로 잉글랜드는 당대 최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이후 식민지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잉글랜드 왕국은 지속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등과 경쟁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스페인]]과도 경쟁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다. 이 전투로 잉글랜드는 당대 최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이후 식민지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는데 이때를 [[튜더 왕조]]의 끝으로 보고 스코틀랜드의 군주인 [[제임스 1세 (잉글랜드)|제임스 1세]]<ref>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지만 잉글랜드에는 "제임스"라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이다.</ref>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다. 당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겸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연합 상태가 된다.
이 때에 여러 문학 인물들도 탄생하였는데 주된 예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제임스 1세]]는 [[1625년]] [[3월 27일]]에 죽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자동으로 왕위는 아들인 [[찰스 1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의회를 과도하게 압박하였으며 [[청교도]]인이 다수인 [[스코틀랜드]]인에게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결국 잉글랜드에는 찰스 1세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으며 이 내전의 결과로 [[찰스 1세]]는 사형을 당하고 [[올리버 크롬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크롬웰은 정부 형태를 [[연방]]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국명도 [[잉글랜드 연방]]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크롬웰이 [[1658년]]에 숨을 거두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서 [[찰스 2세]]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찰스 2세의 적임자로는 찰스의 동생 [[제임스 2세 (잉글랜드)|제임스 2세]]가 주목받고 있었는데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성공회가 국교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서는 부적절했다. 이때 영국의 정치 세력은 제임스 2세의 승계에 찬성하는 [[토리당]]과 반대하는 [[휘그당]]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때마침 찰스 2세가 [[1685년]]에 숨을 거두면서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제임스 2세의 왕비인 메리가 왕자를 낳으면서 상황은 바뀌었고 휘그당과 토리당은 연합하여 제임스 2세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아내인 [[메리 2세]]와 함께 즉위하게 된다.
이때 사회적으로는 [[런던]]에서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화재로 런던 인구의 대부분이 노숙자 신세가 되며 1만채 이상의 집이 불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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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2일 (금) 12:38 판


잉글랜드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와 함께 영국의 지방 중 하나이다.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영토를 접하고 있으며 영국 본토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아일랜드 해가 잉글랜드 서쪽에 있으며 켈트 해가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잉글랜드는 실리 제도와이트 섬 등 100개가 넘는 섬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유명한 유적인 스톤헨지로 볼 수 있듯이 이곳에는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동유럽에 살던 켈트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잠깐동안 로마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다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이곳은 게르만족 중에서도 앵글족의 지배로 들어가게 된다. 10세기부터는 이곳에 잉글랜드 왕국이 세워졌으며 이 왕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후로 매우 강성하게 발전했다.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쳐졌으며 잉글랜드는 이후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방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북쪽에 있는 스코틀랜드와는 달리 잉글랜드는 대부분이 평야와 들이며 대부분의 산 또는 언덕은 고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따라서 이곳은 옛부터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했고 런던버밍엄 등의 영국 내 큰 도시들이 대부분 이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영국의 수도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인 런던은 유럽 연합 내에서도 가장 큰 도시이며 이 런던을 포함한 잉글랜드는 영국 인구 중에서 80% 이상을 차지한다.

역사

선사 시대

지금의 잉글랜드 지방에 처음으로 나타난 유인원호모 안테세소르였다. 이 종은 약 800,000년 전에 잉글랜드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500,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이 사실을 증명해준다. 현생인류는 구석기 시대 후기에 잉글랜드에 나타났으며 인류의 정착지는 불과 6000년 전부터 이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 14000년 전에는 역대 최대의 빙하기가 도래하여 매머드 등이 번성하고 인류는 잉글랜드에서 다시 물러나는 듯 했으나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지금의 스페인 지방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류가 북상하면서[1] 다시 인류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아일랜드에도 이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해수면은 다시 올라오면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섬이 되었다.

이후 기원전 2500년에 들어서면서 점토로 토기를 만드는 비커 문화가 서유럽과 영국 제도 등에 도래했는데 이 비커 문화가 잉글랜드에도 유입되면서 스톤헨지에이브베리 유적 등의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후 주석을 섞어 청동을 만드는 청동기 시대가 열렸으며 이때에도 비커 문화는 계속 이어졌다.

잉글랜드의 철기 시대는 철기를 이미 사용하던 켈트인들이 영국 제도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비커 문화는 쇠퇴기를 겪다가 사라지고 대신 켈트 문화와 라텐 문화가 잉글랜드에서 시작된다. 본격적으로 영국에 문명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고대

잉글랜드에 켈트족이 한창 번성하고 있을 때 고대 로마포에니 전쟁에서 이기며 스페인 지방을 차지하고 그리스 등의 발칸 반도 지역과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를 다 먹어버리는 등 유럽의 최강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켈트족도 로마에 우호적으로 다가갔지만 고대 로마가 영국 제도에 발을 들이면서 평화는 깨지게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영국 제도를 두 번이나 공격했으며 그 후에도 1세기 후반까지 영국 제도에 대한 침략은 계속된다. 특히 43년부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영국 제도를 침략했는데 이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대부분은 로마 제국(고대 로마)의 땅이 된다. 이후 84년까지 이어진 대대적인 침략으로 잉글랜드는 물론 영국 제도의 거의 전체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로마 제국은 4세기에 동서로 분열된 뒤에도 5세기앵글족이 영국 제도를 차지할 때까지 영국 내 영토를 지키게 된다.

이후 395년에 로마 제국은 둘로 분열되는데 이때 아시아에서 이동한 훈족에 의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난다.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잘 버텼지만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영토가 줄어들었고 결국 410년앵글족이 잉글랜드를 차지한다.

중세

서로마 제국의 군사가 영국 제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영국 제도는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픽트족 등의 차지가 된다. 500년 경의 배든 전투 후에는 남아있던 켈트족마저 사라지고 영국 제도에 암흑 시대가 도래한다. 5세기 경부터는 웨섹스 왕국, 노섬브리아 왕국, 켄트 왕국, 이스트 앵글리아 왕국, 에식스 왕국, 서섹스 왕국, 머시아 왕국7왕국이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부근에 들어서서 서로 패권을 다투며 일곱 왕국은 8세기 경까지 티격태격 치고받고 싸우다가 9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웨섹스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되기 시작한다.

이후 웨섹스 왕국은 잉글랜드를 통일하였으며 잉글랜드 왕국이 웨섹스 왕국을 모태로 하여 세워진다.

잉글랜드 왕국이 세워진 후에도 웨섹스 왕들의 혈통은 이어졌는데 11세기에 들어 윌리엄 1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잉글랜드 왕국 군에 크게 승리하여 노르만 왕조가 시작된다.

이후 프랑스 왕국이 자국 내의 잉글랜드 왕국 영토를 문제 삼아 여러 차례 분쟁을 일으키자 결국 두 나라 사이에는 백년 전쟁이 시작된다. 백년 전쟁은 중반까지 잉글랜드 왕국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1415년에 시작되는 제3기에 들어선 뒤에는 프랑스군의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결국 1453년에 프랑스가 사실상 백년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후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는 거의 사라졌는데 이때 잉글랜드 내에서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열로 요크가랭커스터가의 분쟁인 장미 전쟁이 일어난다. 장미 전쟁은 1488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로 새로운 왕조인 튜더 왕조가 정권을 잡는다.

근세

장미 전쟁의 결과로 튜더 왕조헨리 7세가 정권을 잡은 후 저 멀리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예술적, 문화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많은 혁신이 있었으며 군사적으로도 총의 등장으로 중세가 막을 내리게 된다. 잉글랜드에서도 군사적으로 혁신이 일어나서 잉글랜드 왕국은 당시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된다. 종교적으로는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가톨릭 대신 성공회가 자리를 잡는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우는 것에 열중했는데 스페인과 경쟁하면서 지금의 미국 버지니아 주 부근에 로어노크 식민지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로어노크 식민지 계획은 실패하였으며 대신 인도에 관심을 가져서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기까지에 이른다.

잉글랜드 왕국은 지속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등과 경쟁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스페인과도 경쟁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다. 이 전투로 잉글랜드는 당대 최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이후 식민지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는데 이때를 튜더 왕조의 끝으로 보고 스코틀랜드의 군주인 제임스 1세[2]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다. 당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겸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연합 상태가 된다.

이 때에 여러 문학 인물들도 탄생하였는데 주된 예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제임스 1세1625년 3월 27일에 죽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자동으로 왕위는 아들인 찰스 1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의회를 과도하게 압박하였으며 청교도인이 다수인 스코틀랜드인에게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결국 잉글랜드에는 찰스 1세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으며 이 내전의 결과로 찰스 1세는 사형을 당하고 올리버 크롬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크롬웰은 정부 형태를 연방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국명도 잉글랜드 연방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크롬웰이 1658년에 숨을 거두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서 찰스 2세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찰스 2세의 적임자로는 찰스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주목받고 있었는데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성공회가 국교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서는 부적절했다. 이때 영국의 정치 세력은 제임스 2세의 승계에 찬성하는 토리당과 반대하는 휘그당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때마침 찰스 2세가 1685년에 숨을 거두면서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제임스 2세의 왕비인 메리가 왕자를 낳으면서 상황은 바뀌었고 휘그당과 토리당은 연합하여 제임스 2세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아내인 메리 2세와 함께 즉위하게 된다.

이때 사회적으로는 런던에서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화재로 런던 인구의 대부분이 노숙자 신세가 되며 1만채 이상의 집이 불탔다고 한다.


각주

  1. 당시에는 바닷물의 감소와 얼음 때문에 유럽 본토와 영국이 연결되어 있었다.
  2.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지만 잉글랜드에는 "제임스"라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