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 전투

여량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20일 (월) 13:04 판 (찾아바꾸기입니다!)

개요

옹진반도 주둔 국군 제17연대(백인엽대령)가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과 맞써 싸운 전투이다. 옹진반도 지역은 국군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제17연대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26일 14시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옹진반도는 내륙과 육로가 차단되어 있어 국군 제17연대가 보급을 받거나 퇴각하는데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6월 24일 북한군의 움직임에 이상함을 느낀 백인엽 대령은 전 연대에 경계강화를 명령하고 화포를 전방에 추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6월 25일 새벽 4시 옹진반도 하늘에 적색과 녹색의 신호탄이 터졌고, 이를 기점으로 북한군은 17연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다.

좌전방 제1대대 상황

6월 25일 04:15

적의 포성에 잠을 깬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최근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에 상황실로 급히 달려갔다. 이때 상황실은 전화통마다 사병들이 붙어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하였다.

대대장이 상황실에 도착하자 교육관 김희제 중위는 "적이 04:00부터 포격을 시작하였는데 과거와 대대 전역으로 포격을 개시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대대장은 북한군의 일상적인 포격일 것을 가만하고 먼저 적의 움직임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전방에 배치된 2,3중대장에게 전화로 경계를 철저히하고 적 포탄에 의한 피해가 없도록 하라 명령하였다.

4:40

1대대장은 3중대장으로부터 전방 토끼고지에서 적 1개 소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에 북한군의 국지전임이라 파악한 1대대장은 자신이 그 부대를 생포하겠다고 말하고 3중대 본부로 이동하였다. 짚차로 3중대 본부에 도착한 대대장은 3중대 본부가 포격으로 파괴되고 토끼고지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이에 운전병과 차를 엄폐시키고 토끼고지 근처로 이동하였다.

그곳 근처에서 3중대원을 만나 3중대 2소대장 김호경 소위가 전사하였고, 북한군의 숫자가 국군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소식을 들은 1대대장은 이것은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즉각적으로 짚차로 1대대 본부로 이동 예비 1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5:00

2,3 중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2중대장 한혁 중위의 최종보고는 은동 정면에 적 1개 대대, 두락산 정면에 적 1개 대대 총 2개 대대와 교전 중이라는 보고였다.

05:30

1대대장은 대대 본부에 도착하자 마자, 김희제 중위에게 예비 1중대를 3중대를 지원하라 명령하고 인사장교에게는 도로에 나가 철수병력을 수습하라 지시하였다. 그리고 연대장에게 유선으로 상황을 보고하고 예비 2대대를 이쪽으로 투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06:00

1중대의 출동을 확인한 김희태 소령은 잠시 뒤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는 생각에 짚차를 타러가던 중 적의 포탄을 맞아 사망하였다.

동시에 2중대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분전하였지만 적의 일부가 1대대 본부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07:30

1중대가 3중대 본부에 도착하였을때, 1대대 본부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안개로 인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후 시간이 흘러 안개가 걷히면서 1중대는 자신들이 적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상황을 알게되었다. 이후 북한군의 파상공세에 치열하게 혈전을 벌이며 버텼고, 이후 제2대대장의 역습으로 북한군이 무너지자 제2대대와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전방 제3대대 상황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전날 추가 배속된 제1포대, 1개 전차포소대, 1개 대전차포소대를 전선에 배치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04:00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3대대도 과거와 같은 일상적인 포격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각 중대에서 적 포격으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연대에 지원포격을 요청하였다.

05:00

연대 본부에 있던 미 고문관 브라운 소령은 전황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국군이 105mm포 발포를 승인하였다. 이에 05:00 국군은 105mm포를 북한을 향해 발포하였다.

05:30

3대대 본부가 북한군의 포격을 받아 유무선 통신기가 파괴되었다. 이에 대대장은 인접 9중대로 이동하여 무전기를 통해 각 중대와의 통신망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연대와의 연락이 끊어져 지원요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에 3대대는 분전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08:00

3대대장은 각 부대의 위치를 확인하였는데 대대장이 인솔하는 9중대를 제외하고 연락이 되는 중대는 11중대뿐이었다. 나머지 10, 12중대하고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마침 그때 오익경 소령은 강령가도를 남하하는 짚차를 발견하여 저지했는데 그 차량에는 연대장이 보낸 연대 작전장교가 타고 있었다. 연대 작전장교는 전선을 유지하고 통신망을 확보라하는 연대장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이에 오익경 소령은 현재 북한군의 공세에 버티기 어려우므로 이쪽으로 지원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연대 작전장교는 연대장에게 보고하겠다고 대답하고 연대 본부로 향하였다.

이후 병력을 수습한 오익경 소령은 11중대는 판서, 9중대는 석계리 10중대는 치마산에서 진지를 편성하고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의 공세는 막강하였다.

10:40

10중대는 적의 전차(자주포였으나 전차로 오인함)를 발견하여 그곳에 화력을 집중했으나 오히려 역공을 맞아 격파되었다.

11:00

적 자주포와 장갑차량과 조우한 제9중대는 2.36인치 자주포로 적 자주포와 장갑차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적의 계속되는 공세에 제9중대도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예비 2대대의 역습

6월 25일 6:40

2대대 병력을 차령화한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1대대 본부로 출발하였다.

07:00

2대대 선두가 1대대 본부를 정찰하였는데, 이미 1대대는 와해되었고 대대본부에는 북한군 약 1개 대대가 진입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이에 2대대장은 1대대 본부 인근에 병력을 모두 하차시킨 후 기습을 위해 은밀히 이동하였다.

이후 준비를 완료한 2대대장은 일제히 공격을 명령하였다. 1대대 본부에 진입한 북한군은 국군의 갑작스런 포화에 큰 혼란에 빠졌다. 2대대장은 북한군이 혼란에 빠진 상황을 보고 승기를 잡기 위해 5중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고, 7중대에게 전방 사동으로 진출시켰다.

09:00

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2대대 관측소가 있는 마현으로 와 2대대장과 2대대원을 격려하고 3대대의 전황이 좋지 않으니 그쪽으로 1개 중대를 파견하라고 명령하였다. 2대대의 병력 대부분이 적과 교전 중이었기에 1개 중대를 빼기는 어려웠고 이에 박격포소대와 3포대를 3대대가 있는 강령지역으로 파견하였다.

10:00

2대대장은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대대 관측소를 1대대 본부 동측능선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격하고 있는 5중대를 격려하고 있었다. 이때 적탄이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의 좌측 안면부를 스쳐 귀를 관통하였다. 그러나 대대장은 흐트러짐 없이 위생병을 불러 응급치료 후 작전을 지휘하였다.

12:00

강령의 3대대가 결국 붕괴되자 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연대본부를 철수시키기로 명령하였다. 그리고 연대 본부에서 보급품 관리를 맡고 있던 8중대는 연대본부가 철수하자 이들도 철수를 시작했다. 다만 이들은 연대본부와 달리 사곶으로 가 2대대와 합류하기로 하였다.

13:00

7중대는 북한군을 격퇴하여 몰아냈고, 사동을 확보하였다.

14:00

2대대는 북한군을 몰아내고 있었고, 이에 2대대장은 5중대를 자동, 7중대를 사동으로 진출시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대 보급관에게 탄약과 건빵을 보급하여 군 사기를 높이려 하였다.

이때 연대 정훈장교가 연대장이 서명한 철수명령서를 가져왔다. 연대 정훈장교는 3대대가 무너져 전선이 유지하기 어려우니 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2대대장은 우리가 전세를 반전시켰는데 무슨 소리이냐!! 항전하겠다고 말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연대본부가 철수했다는 사실에 사태가 심각함을 알고 병력을 온전하기 철수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이에 5중대장에게 철수로를 확보하라 명령하였다. 또 대대 정보, 교육장교에게 각각 7중대와 1대대 각 중대에게도 철수명령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7중대는 14:00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1소대를 후방에 남겨 철수를 엄호하게 하고 기관총소대, 화기소대, 2소대, 3소대 순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철수 도중 3소대장 조유동 소위가 적의 저격에 즉사하였고, 3소대선임하사 고용출 중사도 소총을 난사하면서 적진으로 과감히 공격하다가 즉사하였다.

15:00

5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으로 중대를 마현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철수로 확보를 위해서 중대장은 2.5톤 차량 1대에 2개 분대병력을 탑승시키고 자신도 그 차량에 탑승해 야전병원으로 향하였다. 이때 한 주민이 고함을 지르며 차를 세우라 손짓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바로 그때 보리밭에 잠복하고 있떤 적의 기습 사격을 받아 중대장 김교석 중위 등 5명이 전사하였다. 생존자 15명은 비행장 남쪽 해안으로 철수하여 어선을 타고 26일 새벽 연평도에 상륙하였고, 27일 밤 인천에 도착 본대와 합류하였다.

8중대는 철수하던 도중 1기관총소대와 기타 병력 70여명과 조우 이들을 인솔하여 사곶으로 향하여 21:00에 사곶에 도착하였다.

20:00

중대장 사망 이후 5중대는 혼선 속에서 퇴각을 했고, 그 와중에 3대대와 조우 3대대장 오익경 소령의 지휘하게 들어갔다. 오익경 소령의 지휘하에 5중대는 적 300여 명을 사살하고 많은 포로와 각종 장비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전투과정에서 3소대장 이춘만 중위 외 사병 20명이 전사하였고, 유홍식 중위를 포함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해안 철수

제3대대 부포항 철수

17연대는 적의 기습공격을 맞아 적에게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병력과 장비의 우세로 인해 전선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3대대는 적의 공세에 11:00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3대대 병력 수용 및 재편성을 서두르게 하였고, 전 부대에게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적 자주포가 부암리까지 진출하자 제1,2대대는 송호림 소령 지휘하에 강령이 아닌 사관으로 철수하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연대장과 3대대는 강령남쪽 중기동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때 연대장은 대전차포 4문과 이를 운용할 사수와 부사수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모두 3대대장 지휘하에 중기동으로 이동시키고 자신은 강령 하천 남안에 대전차포 4문을 배치하여 적을 기다렸다.

북한군 자주포는 국군의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로 위협받은 일이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강령 입구까지 온 북한군 자주포는 일시 정지하여 상황을 지켜보려고 하였다. 이에 대전차포 중대장은 자주포의 측면을 향해 포격을 명령했다. 이에 자주포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하였고 자주포 1대는 캐터필터가 끊어져 기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적 자주포를 격퇴한 연대장은 대전차포 병력을 중기동으로 철수시켰다.

16:00 연대장은 중기동을 방어하여 부포항을 확보하기로 각 부대에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때 육본에 현황을 보고하였고, 육본은 퇴각을 위한 함정을 보낼 것이라 회신하였다. 제2대대하고 연락이 되지 않자 연대장은 기존의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국군의 전투피로가 상당한 상황에서 적이 야간에 기습할 경우 승산이 없을 것이라 판단. 모든 포를 날이 밝을 때까지 포격하라 명령하였다. 이를 통해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23:30 부포항에 해군 LST-801함이 접안되고 함장 김옥경 대위가 연대장을 방문하여 내일 8:00(26일 08:00)에는 썰물이라 배가 떠날 수 없게 되므로 그 이전에 승선 완료를 부탁한다고 하였고, 이에 연대장은 다음 일몰시까지 승선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26일 00:30 전선으로 돌아간 연대장은 제3대대와 포병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1개 중대씩 철수를 명령하였고, 어떠한 소리나 불빛도 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등화관제) 철수는 01:00부터 시작하여 05:00에는 제3대대 1개 중대와 포병대대 1개 포대, 대전차포중대만 남게 되었다.

05:00 적이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자 차량이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남은 제3대대 11중대는 도보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고, 남은 포대와 대전차포중대에게 전방에 포격을 계속하라 명령하였다.

북한군 몇개의 자주포는 국군의 포화를 뚫고 06:00 중기동 앞 하천까지 진출하였다. 중기동 앞 조촌의 교량은 이미 국군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에 북한군은 교량복구를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북한군이 교량을 복구하는 동안 제17연대는 남아있던 모든 화포와 대전차포를 모두 부포항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연대장은 대전차포 2개문을 부포 진입로의 은폐된 곳에 배치하였다.

09:30 북한군은 자주포를 앞세우고 부포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이때 미리 매복시켜놓은 2문의 자주포로 북한군 선두차량과 2번 차량의 측면을 공격 파괴하였다.

이보다 이른시간은 08:00 썰물이 진행되자 부포항에 접안한 801함장 김옥경 대위는 함을 부포항에서 5km떨어진 해안에 정박시켰다. 그리고 어선과 소형함으로 병력을 801함에 태웠다.

연대장이 전선에서 부포항으로 돌아오자 전 병력의 상당수는 퇴각하였다. 그러나 100명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연대장은 LST 2척 중 1척은 사곶으로 보내 제1,2대대를 수용하게 하도록했고, 부두에 정렬해있던 105mm곡사포와 대전차포는 분해하여 바다 속에 버리도록 하였다.

10:30 북한군은 부포항 근처로 진출하여 부포항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다. 최종 철수병력을 실은 어선들이 연대장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연대장과 박정호 소령은 파기하지 않는 1문의 105mm곡사포로 적의 접근로를 향해 사격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적의 포화가 더욱 거세지자 연대장은 "너희들은 빨리 떠나라. 내가 너희들의 철수를 엄호하겠다."라고 말하며 연대장은 계속 포사격을 하였다.

11:00 연대장의 굳건한 의지를 꺾지 못한 제3대대장, 참모요원 그리고 최종 승선원은 눈물을 흘리며 부포항을 떠나 LST로 향하였다. 어선이 위험지대 밖으로 벗어난 것을 본 연대장은 105mm 1문을 분해 바다 속에 넣고 주민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권총으로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에 박소령이 연대장의 손을 뿌리치며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빠져나간 후일을 도모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하며 진정시킨 다음 인근 섬까지 수영하여 표류하는 조각 1척을 끌고 왔다.

이에 연대장과 박소령은 조각배에 몸을 실고 26일 14:00 주민들을 뒤로하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갔다. 이들은 망망대해로 밀려가다가 19:00 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연평도에 도착하였고, 연평면 향토방위대원들과 함께 연평도 방위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국군 군함 2척이 연평도에 접안하였는데, 이는 백인엽 대령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국군 군함이었다. (JMS-302함장 염봉생 대위와 JMS-307 함장 백운기 대위)

이에 백인엽 대령과 부하 41명은 해군 소해정의 구출을 받아 27일 02:00 연평도를 떠났다.

그리고 한편 LST 1척을 이끌고 사곶으로 간 유창훈 대위는 그곳이 이미 북한군에 점령되었고 제1,2대대의 거취를 알지 못해 인천으로 돌아갔다.

27일 08:00 인천에 상륙한 백인엽 대령은 수원 육군본부에 가 철수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은 17연대에게 대전에 있는 정부경호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육본은 17연대 병력을 김포에 배치하여 방어전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국방장관의 명령에 그 작전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백인엽은 다시 영등포 방적공장에서 헤어진 부대원과 상봉하고 병력을 정비 대전으로 이동하였다.

제2대대의 사곶 철수

앞서말했듯 25일 14:00 철수명령을 받은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5중대에게 철수로 확보임무를 부여하고 81mm박격포 2문으로 냉정리에서 적의 자주포를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다.

15:00 마현으로 이동 중에 총격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냉정리 남쪽 철수병력과 조우하였다. 각 대대명력이 혼합된 400여 명의 철수병력은 오합지졸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이에 송호림은 큰 소리로 "대대장은 여기 있다. 제1대대장은 전사했고, 적은 옹진으로 육박 우리의 퇴로를 차단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여러분과 내가 한데 뭉쳐 힘을 합하여 적으로 무찌르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니 이제부터 나를 따르고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하였다. 그리고 우선 장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확인하자 총 45명이었고, 그 중 선임자는 제1대대 부대대장 박주용 대위였다.

송호림 소령은 여수 순천반란사건 때 김백일 대령 휘하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나누어 반란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경험을 살려 병력을 재편하였다.

1개 분대를 5명으로 하였고, 3개 분대를 1개 소대, 5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여 총 7개 중대로 재편하였다. 송 소령령 사곶을 철수방향으로 정하여 7대의 2.5톤 차량에는 기관총을 거치하여 선두에 5대는 전투병력 2대에는 부상환자와 그리고 김충구 중위가 인솔하는 탄약차를 뒤따르게 하였다. 차량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사격을 하면서 옹진시를 지나가게 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박주용 대위에게 일임하여 옹진시를 우회하여 이동하도록 하였다.

19:30 연근산에 부대가 합륙하자 제4중대 1개 소대와 제7중대 2개 소대병력 그리고 기타 개별철수병력이 모여 700여 명 정도가 되었다.

대대장은 7,4중대의 박격포소대를 연근사에 잔류 부대 철수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병력을 수습한 이후 21:00 사곶을 향해 철수하였다. 제1,2대대 전 병력이 사곶으로 철수하였는데 그곳은 이미 피난민으로 인해 혼잡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송호림은 큰 소리로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권총을 꺼내 하늘을 향해 5발을 연속으로 쏘며 질서를 확보하였다.

"나는 563부대장 송호림이요 이제부터 여러분의 안전은 제가 맡을 터이니 떠들지 말고 내 명령에 복종하시오."

질서를 회복하고 인원을 점검하자 군인만 1,100여명이 넘었다. 이에 군인들에게 뗏목이나 드럼통을 엮어 활용하려 했으나 이 많은 인원을 그것으로 철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3:00가 되었을때, 서장대행을 하고 있는 김선진 경감이 다가와 이 건너 용호도에 지서용 경비정이 있는데 우리가 보내달라고 해도 오지 않으니 대대장께서 요청해 보라 말했다. 이에 송호림은 용호지서주임을 전화로 연락하여 지서용 경비정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다행히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대대장은 부두에 세워진 차령 15대를 불태우게 하고 배의 접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를 보던 군중들이 제각기 먼저 타려고 대오가 무너지면서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송호림은 다시 권총을 쏘아 진정시키고 "질서를 어기고 먼저 타려는 자, 정원을 무시하고 타려는 사람은 총살형에 처한다. 승선순위는 군인, 경찰, 민간인 순으로 하되 여기 있는 사람은 전원 수송할 것이니 질서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려라"라 말했다.

질서가 잡히자 경비정은 다시 육지에 다았다. 경비정은 정원 90명의 선박이었으나 송호림 소령은 안전을 위해 80명씩 승선시켰다. 그리고 하선시 수면에서 뛰어내리게 하여 시간을 단축시키도록 하였다. 송호림 소령은 수송 도중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매회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였다.

26일 7시 군인과 경찰의 해상철수가 끝나고 백경석 중위 지휘하 경계하고 있던 제1중대가 승선할 무렵 적의 포탄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포화가 점점 더욱 거세지자 민간인 500여 명을 철수를 하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용호도로 이동한 제2대대 병력은 송호림의 지휘하에 기강을 확립하고 인근 지역에서 대형 화물선 6천을 확보하였다. 이에 1500여명의 군,경 인원을 이 화물선에 승선시켜 연평도로 이동하였고

연평도에서 다시 군산항에 상륙하여 대전 본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이야깃거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