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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연평도를 출발해 28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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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 결과와 평가 ==
17연대의 옹진반도 방어작전은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병력을 지니고도 북한군을 맞아 버텼다. 또한 2대대의 경우 북한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2대대의 조기 투입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전선인 3대대 지역을 지원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연대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17연대의 옹진반도 방어작전은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병력을 지니고도 북한군을 맞아 버텼다. 또한 2대대의 경우 북한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2대대의 조기 투입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전선인 3대대 지역을 지원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연대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2015년 7월 28일 (화) 18:43 판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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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Ongjin.jpg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26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최현 소장
김후진 대좌
백인엽 대령
병력:
11,000
병력:
3,600

개요

북한군은 옹진지구를 조기에 장악할 생각으로 제6사단 제1연대로 제3경비여단을 증원토록 하여 국군 제17연대를 공격했다. 제17연대는 병력의 열세와 불리한 지형에서도 분투하였지만 동서로 양분되었고, 본래 육군본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해상철수를 실시하였다.

38도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옹진반도는 내륙과의 육로가 차단되어 있었으며 오직 90km 거리의 해로만이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전체적으로 북한군이 위에서 아래로 국군을 내려다보는 상황이었으며 안개가 끼는 때가 많고 간만의 차로 하루에 두 번 대형 선박이 입항할 수 있었다.

전투전 상황

북한군

1947년 7월부터 이 지역을 담당한 제38경비 3여단은 4개 대대를 38도선을 따라 배치시키고 1개 대대를 죽천에 배치하였다. 그러다 1950년 6월 21일에 3개 대대가 옥동으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제203전차연대로부터 1개 전차중대를 배속 받은 제6사단 1연대가 합류하였다.[1]

한국군

1949년에 이미 산발적 전투를 여러번 겪었던 제17연대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방어를 강화하였지만 지형적인 이유로 종심 깊은 방어진지의 편성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육군본부로부터 받은 지침에 의하면 북한이 전면적인 남침을 할 경우 최대한 출혈을 강요하고 해군의 지원을 받아 철수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 즉 끝까지 남아 옹진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2]

6월 23일 제17연대는 육군본부로부터 휴가 또는 외출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며칠전부터 계속된 북한군의 수상한 움직임이 미심쩍었던 백인엽 대령은 오히려 경계강화를 명령하였다. 제3대대에 곡사포와 대전차포를 배치하고 각 부대와 경찰서에 언제라도 출동이 가능하도록 명했다.[1]

전투

25일 04:00 38도선 상공에 신호탄이 빛을 발하면서 북한군이 포격을 시작하고 기마대를 앞세운 제3경비여단이 서쪽으로, 자주포와 장갑차를 앞세운 제6사단 제1연대가 동쪽을 공격하였다.

국군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북한군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전면 침공을 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04:40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에게 대기명령을 하달하고 포병대대장 박정호 소령에게 제1, 제3대대에 지원사격을 하도록 조치하였다.

05:30 연대장은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으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보고를 접했다. 06:00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에게 현지고수를 명령, 06:10 김희태 소령의 전사보고를 받았으며, 북한군의 목표가 양동작전을 피며 옹진 탈취에 있다고 판단, 예비대인 제2대대에 제1대대를 지원토록 했다.

10:00 사령부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연대장은 육군본부에 대책을 요청했지만 적을 지연시키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35 연대장은 옹진에 도착한 미 고문관들로부터 북한군이 전 전선에서 침공해 증원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11:00 제3대대가 석계리-치마 방어선을 돌파당하자 연대본부를 강령으로 이동시켜 제3대대를 증원토록 하고 포병으로 제3대대의 철수를 엄호토록 했다. 북한군의 주공이 좌일선이라고 생각해 제2대대를 보내어 반격에 성공했지만 북한군 제1연대가 우측에서 자주포와 장갑차로 밀고 들어와 제3대대가 밀리는 상황이었다. 이에 연대장은 서류, 보급품, 시설들을 북한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파기하라고 명령하고 주민들에게 피난하도록 알렸다.

좌전방 제1대대 상황

04:15 적의 포성에 잠을 깬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최근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에 상황실로 급히 달려가 상황을 보고하였다. 대대장은 좀 더 사태를 관망키로 하고 전방에 배치된 제2, 제3중대장에게 경계를 철저히 하고 적 포탄에 의한 피해가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04:40 대대장은 제3중대장으로부터 좌정면 토끼고지에 북한군 1개 소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지전임이라 파악한 대대장은 자신이 적들을 생포하겠다고 말하고 제3중대 본부로 이동하였다. 제3중대 본부에 도착한 대대장은 토끼고지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마주친 제3중대원을 만나 제2소대장 김호경 소위가 전사하였으며 북한군의 숫자가 국군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소식을 들은 대대장은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라 판단하였다.

05:00 제2중대장 한혁 중위로부터 은동 정면에 1개 대대, 두락산 정면에 1개 대대와 교전 중이라는 보고 후 제2, 제3중대와 교신이 끊겼다. 05:30 대대본부로 돌아온 대대장은 예비부대인 제1중대를 자동에 배치하라 명령하고 연대장에게 상황보고와 동시 제2대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06:00 대대장은 직접 제1중대의 지휘를 하려는 생각에 본부를 나왔지만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동시각 제2, 제3중대는 많은 희생을 내며 싸웠지만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북한군이 대대본부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07:30 제1중대가 자동에 당도하였을 때 대대본부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안개로 인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면서 자신들이 포위되어 있다는 상황을 알게되었다. 포위된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치열하게 버텼는데, 제2대대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무너지자 제5중대와 함께 제2대대와 합류해 역습에 가담하였다.

우전방 제3대대 상황

04:00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평소와 같은 일상적인 포격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각 중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각 중대에 경계 강화를 명령하는 한편 연대장에게 보고하고 지원포격을 요청하였다.[3] 05:00 미 고문관 브라운 소령은 전황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연대장의 사격요청을 승인하였다. 이에 제7포병대대가 105mm 포의 사격을 시작하였다.

05:30 북한의 포격에 대대관측소가 파괴되고 유무선 통신 기재가 파손되어 지휘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제9중대장의 무전기를 통해 각 중대와의 통신망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연대와의 연락이 끊어져 지원요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군 제1연대가 장갑차량을 앞세워 도로를 따라 침공하였으며 봉오리 지역으로 제3대대를 고립시켰다. 08:00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9중대와 함께 석계리로 철수한 대대장은 각 중대의 위치를 확인하였는데 공격을 받아 분산되었음을 알게되었다. 때마침 대대장이 강령가도를 남하하는 짚차를 발견해 확인해보니 연대장이 보낸 장교가 타고 있었다. 전선을 유지하고 통신망을 확보라하는 연대장의 명령을 전달받은 대대장은 북한군의 공세를 버티기 어려우니 지원병력을 보내달라고 말한 뒤 연락장교를 돌려보냈다.

대대장은 각 중대에게 지원이 곧 도착하니 제11중대는 판서, 제9중대는 석계리, 제10중대는 치마산에서 진지를 편성하고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각 중대는 2.36인치 바주카로 자주포와 장갑차를 파괴하였으나 북한의 화력에 압도되어 후퇴하였다.[4]

예비 제2대대 상황

06:40 병력을 차령화한 제2대대가 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제1대대 본부로 출발하였다. 선두가 마현에서 북한군 1개 대대가 제1대대 본부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자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병력을 하차시켜 제5중대를 도로 우측에, 제7중대를 좌측에 전개시켰다.

07:00 아무런 저항 없이 대대본부에 진입해 방심했던 북한군은 제2대대의 포격과 기습을 받자 큰 혼란에 빠지고 큰 피해를 입었다. 대대장은 승기를 잡기 위해 제5중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고, 제7중대를 전방 사동으로 진출시켰다.

09:00 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마현으로 와 대대를 격려하고 제3대대의 전황이 좋지 않으니 그쪽으로 1개 중대를 파견하라고 명령하였다. 대대 대부분이 승기를 잡고 적과 교전 중이었기에 제8중대의 박격포소대와 제3포대를 강령으로 파견하였다.

10:00 대대장이 대대 관측소를 제1대대 본부 동측능선으로 추진하고 반격하고 있는 제5중대를 격려하고 있을 때 소총탄이 좌측 안면부를 스쳐 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대대장은 위생병에게 응급치료를 받고 계속 작전을 지휘하였다.

14:00 대대장이 제5중대를 자동으로, 제7중대를 사동으로 진출해 퇴각하는 적을 추격케 명령하였는데, 정훈장교가 도착해 연대본부가 12:00에 강령으로 이동하였으니 철수를 서두르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알렸지만 계속 항전의 뜻을 나타내고 정훈장교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섬을 직감한 대대장은 안전한 철수를 위해 각 중대에 철수명령을 전달하였다.

제7중대는 13:00에 제1목표인 사동을 확보한 뒤 제2목표인 은동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 제3소대장 조유동 중위와 소대선임하사 고용출 중사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 전투가 일어나 제1, 제3소대는 중대와 떨어져 냉정리로 철수했다.

15:00 제5중대는 철수 중 차를 세우라는 주민을 만났지만 그대로 지나갔고, 보리밭에 매복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중대장 김교석 중위 등 5명이 전사하였다. 생존자는 비행장 남쪽 해안에서 어선을 타고 철수, 27일 밤 인천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철수

제17연대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에도 큰 피해를 주었으나 개전 8시간만에 양원이 차단되었다. 이에 연대본부와 지원부대를 강령으로 이동시키고 제1, 제2대대의 철수를 위해 강령 북쪽에서 방어하려 했으나 제3대대가 와해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연대장은 분산된 제3대대 병력을 재편성하고 14:00에 북한군 자주포가 부암리까지 진출했다는 보고에 연대본부를 부포로 이동시켰다. 강령으로 나오지 못한 제1, 제2대대는 송호림 소령에게 일임시키고 사관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3대대 부포항 철수

연대장은 대전차포와 4문과 최소한의 운영 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을 제3대대장 지휘하에 중기동으로 이동시켰다. 연대장은 대전차포와 함께 강령에 남아 후퇴하는 낙오병을 수집해 중기동-죽교리선에 방어선을 설차하라 명령했다.

북한군 자주포는 국군의 중화기에 위협을 받은 일이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강령 입구까지 온 북한군 자주포는 일시 정지하여 상황을 지켜보려고 하였다. 이에 대전차포 중대장은 자주포의 측면을 향해 포격을 명령해 자주포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하였고 자주포 1대는 캐터필터가 끊어져 기동 불가능으로 만들었다. 적 자주포를 격퇴한 연대장은 대전차포 병력을 중기동으로 철수시켰다.

16:00 연대장은 중기동을 방어해 부포항을 확보하기 결정했다. 육군본부에서 철수를 위해 함정이 곧 도착한다는 전문회신을 받자 병력 일부를 부포로 이동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연대장은 국군의 사기가 매우 저하된 상황에서 북한군이 야간에 기습할 경우 승산이 없다고 판단, 포병대대에게 날이 밝을 때까지 사격을 지속시키고, 부포항에 있는 빈 차량으로 하여금 중기동까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오고 돌아갈 때 불을 끄는 방복 왕래를 시켜 병력이 증원되는 것처럼 기만작전을 펼쳤다.

23:30 부포항에 해군 LST-801함이 도착, 함장 김옥경 대위가 연대장을 찾아와 내일 08:00에는 썰물이라 배가 떠날 수 없으니 그 전에 승선 완료를 부탁하였고, 이에 연대장은 다음 일몰시까지 승선을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26일 00:30 전선으로 돌아간 연대장은 제3대대와 포병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1개 중대씩 철수를 명령하였고, 어떠한 소리나 불빛도 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철수는 01:00부터 시작하여 05:00에는 제3대대 1개 중대와 포병대대 1개 포대, 대전차포중대만 남게 되었다.

05:00 적이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자 이에 남은 제3대대 제11중대를 철수시키고 남은 대전차포와 곡사포의 사격을 지속시켰다. 북한군의 자주포는 국군의 포화를 뚫고 06:00 중기동 앞 하천까지 진출하였지만 교량은 이미 국군에 의해 파괴된지라 교량복구를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북한군이 교량을 복구하는 사이 연대장은 남아있던 병력과 장비를 부포항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대전차포 2개문을 부포 진입로의 은폐된 곳에 배치하였다.

08:00 썰물이 진행되자 LST-801함은 부포항에서 5km 떨어진 해안에 정박하고 탑제된 소형함과 어선을 이용해 병력을 실어날랐다.

09:30 중기동을 점령한 북한군은 자주포를 몰고 부포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이때 미리 매복시킨 2문의 대전차포로 선두차량과 2번 차량의 측면을 공격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연대장이 전선에서 부포항으로 돌아오자 대부분의 병력은 퇴각하였으나 100여명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연대장은 LST 2척 중 1척을 사곶으로 보내 제1, 제2대대를 수용토록 하고, 부두에 정렬해있던 곡사포와 대전차포는 분해하여 바다 속에 버리도록 하였다.

10:30 북한군은 부포항 근처로 진출하여 부포항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다. 최종 철수병력을 실은 어선들이 연대장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대장과 박정호 소령은 파기하지 않은 1문의 105mm 곡사포로 접근로를 향해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포화가 더욱 거세지자 연대장은 "너희들은 빨리 떠나라. 내가 너희들의 철수를 엄호하겠다"고 말하며 계속 포사격을 하였다.

11:00 제3대대장 및 참모요원과 최종 승선원은 부포항을 떠나 LST로 향했다. 어선이 위험지대 밖으로 벗어나자 연대장은 곡사포를 분해해 바다 속에 넣고 죄책감에 권총으로 자결하려 하였으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수영선수 박정호 소령이 이곳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자며 연대장을 진정시킨 다음 인근 섬까지 수영하여 표류하는 조각배 1척을 끌고 왔다.

14:00 연대장과 박소령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갔다. 이들은 표류 중 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19:00 연평도에 도착, 연평면 향토방위대원들과 함께 연평도 방위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백인엽 대령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JMS-302함과 JMS-307함이 연평도에 접안하였고, 백인엽 대령과 부하 41명은 해군 소해정의 구출을 받아 27일 02:00에 연평도를 떠났다.

한편 14:00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탑승한 LST는 사곶 연안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이 이미 북한군에 점령되었고 제1, 제2대대의 거취를 알지 못해 인천으로 돌아갔다.

27일 08:00 인천에 상륙한 백인엽 대령은 육군본부에서 철수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제17연대가 대전으로 피난중인 정부 경호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

제1, 제2대대 사곶항 철수

15:00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마현으로 이동 중에 총격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냉정리 남쪽에 이르러 철수병력과 조우하였다. 제1, 제2대대병력이 혼합된 400여 명의 철수병력은 오합지졸의 모습이었다. 이에 대대장은 큰 소리로 "대대장은 여기 있다. 제1대대장은 전사했고, 적은 옹진으로 육박, 우리의 퇴로를 차단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여러분과 내가 한데 뭉쳐 힘을 합하여 적을 무찌르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니, 이제부터는 나를 따르고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라고 하였다.

송호림 소령은 4월에 제2대대장으로 전임되기 전까지 제1대대장으로 있었기에 장교와 하사관의 성격과 능력을 알고 있었으며, 여순 반란 사건에서의 경험을 살려 병력을 재편하였다. 1개 분대를 5명, 3개 분대를 1개 소대, 5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여 총 7개 중대로 재편하였다.

송 소령은 사곶으로 철수하기로 정하고 7대의 2.5톤 차량에 기관총을 거치해 선두에 5대는 전투병력 2대는 부상자를 싣고 탄약차를 뒤따르게 하였다.

19:30 연근산에 도착해 그곳에서 개별적으로 철수하던 병력과 합세하였으며 700여 명 정도로 늘었다.

21:00 대대장은 제7, 제4중대의 박격포소대를 연근산에 잔류시켜 사곶으로 철수하는 본대를 엄호하게 했다. 사곶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그곳에 모인 군인, 경찰, 피난민들이 배를 찾느라 혼란에 빠져있었다. 송호림 소령은 하늘에 권총을 쏘아 모두를 진정시키고 인원을 세어보니 1,300여 명의 군인을 포함한 2,000여 명이었다.

23:00 서장대행을 하고 있던 김선진 경감이 찾아와 말하길 용호도에 지서용 경비정이 있는데 우리가 보내달라 해도 오지 않으니 대대장께서 요청해 보라 말했다. 이에 대대장이 용호지서주임을 전화로 호출해 빨리 배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다행히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대대장은 부두에 세워진 차량을 불태우게 하고 배의 접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를 보던 군중들이 제각기 먼저 타려고 하자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대장이 다시 권총을 쏘아 진정시키고 "질서를 어기고 먼저 타려는 자, 또는 정원을 무시하고 타려는 자는 총살에 처한다. 승선순위는 군인, 경찰, 민간인 순으로 하되, 여기 있는 사람은 전원 수송할 것이니 질서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려라"고 말했다.

질서가 잡히자 경비정이 육지에 닿았다. 경비정은 정원 90명의 선박이었으나 대대장은 안전을 위해 80명씩 승선시켰다. 그리고 하선시 수면에서 뛰어내리게 하여 시간을 단축시키도록 하였다. 대대장은 전날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매회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였다.

26일 07:00 군인과 경찰의 해상철수가 끝나고 후위를 담당했던 제1중대가 승선할 무렵 북한군의 포탄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포화가 점점 더욱 거세지자 민간인 500여 명의 철수를 포기하게 되었다.

용호도로 이동한 국군은 송호림 소령의 지휘하에 기강을 확립하고 인근 지역에서 대형 화물선 6천을 확보하였다. 19:00 부포 앞바다에 이르자 제3대대 병사 10명이 탑승한 소형배가 다가와 이미 부포가 함락되었음을 알렸고, 방향을 틀어 27일 07:00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20:00 연평도를 출발해 28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결과와 평가

17연대의 옹진반도 방어작전은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병력을 지니고도 북한군을 맞아 버텼다. 또한 2대대의 경우 북한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2대대의 조기 투입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전선인 3대대 지역을 지원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연대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7연대는 철수작전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여 철수과정에서 순탄하지 못했다. 먼저 민간인 소개작전이 없어 민간인을 방치하였고, 부상병을 소개할 작전도 없었다. 그 결과 민간인을 구출하지 못했고 부상병도 대부분 방치하여 적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군의 지휘관들은 지휘관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7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자신이 먼저 탑승할 수 있음에도 최후의 순간까지 남아 곡사포로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국군장병들의 후미를 맡았다. 또한 1대대장도 자신이 전장에 나가 지휘하려 하였고,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의 경우도 전장에서 적 총탄에 얼굴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흐트러짐 없이 지휘하였다.

이런 지휘관들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국군장병들이 중과부적의 북한군을 맞아 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붕괴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여담

6월 25일 국방부는 17연대가 해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방송했는데 이는 순전히 오보이다. 당시 연합신문사 최기덕 기자 말로는 자신이 이곳의 북한침공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백인엽 대령과 만났고, 그때 백인엽 대령이 자신(최기자)에게 "백인엽이는 부대를 지휘하여 해주로 진격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국방부에 전했다는 것

문제는 당사자인 백인엽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당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제대로 기자와 만나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며, 당시 상황에서 해주 진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결국 해주진공설은 기레기기자의 잘못된 정보전달에 빚어진 결과였다.


각주

  1. 1.0 1.1 1.2 전쟁기념관 옹진지구 전투 [1]
  2. 옹진반도를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만약 현지사수를 했다면 땅도 빼앗기고 전멸했을 것이다.
  3. 당시 105mm 포병 운영은 미 고문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4. 당시 병사들이 전차와 자주포를 구분하지 못해 '전차 발견'이라 신호를 했다.
  5. 육군본부는 원래 제17연대를 미아리 또는 김포반도에 배치해 방어를 강화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