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강릉 전투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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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27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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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협 소장
오백룡 소장
박정덕 대좌
이성가 대령
고근홍 중령
장경석 소령

개요

양양-강릉 전투는 북한 제1경비여단을 상대로 제8사단 제10연대 주축의 한국군이 6월 27일 대관령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치룬 전투이다. 제10연대는 진흑동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26km의 38도선을 단독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동해안 해안선 일대를 제외하면 방어선 중앙에 태백산맥이 뻗어있는 산악지대로 동서가 구별되고 교통이 제한되었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한국군 제10연대는 사전의 계획에 의한 전투배치도 해보지 못하고 각 부대간 통신마저 두절되어 분산되었다. 철수한 병력을 수습한 제10연대는 대대 주저항선인 화상천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사단 주저항선인 연곡천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26일 북한군이 도하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한국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그날 밤 한국군이 북쪽으로 도하해 주문진 공격의 발판을 위한 천마봉을 점거하였다. 한국군은 27일 05:00에 주문진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04:00에 북한군이 선제공격을 감행, 포격을 견디지 못한 한국군은 분산되어 대관령으로 철수하였다.

전투전 상황

북한군

북한군 제1경비여단은 전투대형을 2개 제대로 편성하고 주문진-강릉 축선에 주공을 지향했다. 제1제대는 경비여단 소속 7개 보병대대로 편성되었고, 제2제대는 제5보병사단 예하 제10연대로 편성되었다. 제1제대 제1, 제2, 제3보병대대가 귀둔리, 공수전리, 내현리 선에서, 제6대대가 원대리에서, 제4, 제5대대가 하추리, 귀둔리 선에서, 제7대대가 기사문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제대인 제10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 전과를 확대하는 임무를 띄고 양양 부근에 집결하였다.

한국군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제1, 제2대대는 제1경비여단의 정면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고근홍 중령이 지휘하는 제10연대는 강릉비행장에 본부를 설치, 연대 좌일선의 제1대대가 정족산-서림리-우탄리-진흑동에 이르는 12km 정면을 담당하고, 연대 우일선의 제2대대가 정족산-동사면-연화동-장리-명지리-대치리-46고지에 이르는 14km를 담당하였다. 연대 예비인 제3대대는 본부가 위치한 강릉비행장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3대대는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제1대대와 교대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기에 제3대대의 제9, 제11중대는 제1대대에, 제10중대는 제2대대에 배속되었다. 실제로 제3대대의 전력은 대대본부 병력과 제12중대가 유일했으며, 이미 교대를 위한 이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투

38도선

잔교리-연화동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제2대대가 담당한 잔교리-연화동 지역은 24일 저녁부터 내린 비로 인해 시계가 매우 불량하였다. 25일 새벽 제2대대의 38도선 경계진지에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되었으며 일제 공격을 개시하였다. 04:35 제7중대장 강응설 중위로부터 북한군 공격 개시 급보가 대대본부로 전달 되었다. 대대본부는 게릴라 침투를 위한 공격으로 판단하였으나 제5, 제6중대장으로부터 급박한 보고가 이어졌다. 이에 제10중대에서 훈시 중이던 제2대대장 조원영 소령은 제8중대 기관총소대를 제10중대에 배속시키고 화상천 남안의 인구리로 출동시켰다.

분산되어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한 제10중대는 06:00 인구리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2대대장이 각 중대를 호출하였으나 제7중대로부터 후퇴중임이 보고되었을 뿐 제5, 제6중대와 통신이 두절되어있었다. 명지리-장리-연화동의 제5, 제6중대도 진지선이 붕괴되어 철수 중일 것으로 판단한 대대장은 제7중대를 인구리로 철수시키고, 제10중대에게 북분리 남쪽 2.5km의 286고지를 확보하여 제5, 제6중대를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제10중대는 294고지를 점령한 뒤 183고지에 이르렀으나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되어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제2대대장은 연대로부터 북한군이 해안선에 상륙 중이니 강릉 방어를 위해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주문진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철수 명령을 받은 제2대대장은 공격을 중단시키고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주력을 수습하였다.

08:00 통신이 두절되었던 제6중대장 김순기 대위로부터 후퇴중이며 북한군 1개 대대가 동남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제2대대장은 제5, 제6중대에게 주문진 북쪽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제7중대는 동남쪽으로 우회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재편 중이었다.

조금 뒤 북한군이 직사포로 제10중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며 소대규모의 기마정찰대를 해안선으로 남하시켰지만 제10중대는 기마정찰대를 격퇴하고 박격포를 이용해 북한군의 직사포를 파괴하였다. 그때 대치리-명지리를 돌파한 북한군이 325고지의 제7중대를 공격하자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제2대대장이 화상천으로 병력을 후퇴시켰다. 제7중대의 엄호하에 제10중대가 주민들을 피난시키며 철수하였으며, 제7중대도 축차로 철수하였다.

한편 대대 중앙의 제5중대는 소대별로 분산 철수한 뒤 병력을 수습해 방어선을 펼치려 하였으나 무전기의 고장으로 대대와 연락이 불가능하자 주문진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었을 것으로 판단한 중대장의 독단으로 철갑령을 넘어 후퇴하였다.

정족산-진흑동

북한군 제1경비여단 제2보병대대는 정족산에서 진흑동의 12km 정면을 담당한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제1대대의 제9중대 정면을 공격했다. 북한군 제2대대의 2개 중대가 제9중대 제3소대를 집중 공격하고 1개 중대가 중대본부를 급습했다. 제9중대는 북한의 포위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 554고지 정상에 거점을 확보하고 산간계곡을 따라 구룡령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막아섰다. 그러나 제9중대장 박석권 중위가 부상을 입고 북한군의 직사포가 불을 뿜자 중대는 철수를 강요받았다.

제11중대가 담당한 지역엔 북한군의 공격이 없던 관계로 계속 38도선 경계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대대본부와의 통신두절로 개전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국군의 대응

제10연대 주번사령 최면호 중위가 북한군의 공격을 사단에 보고하자 사단 정보참모 육근수 소령은 사단참모들을 소집하였다. 육군본부의 교육검열을 마치고 강릉여관에 투숙 중이던 참모들은 05:30 사령부에 출두하였다. 그들은 항상 있던 국지적인 도발로 의견을 모았지만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으로부터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공격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부하를 소집한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06:00에 작전회의를 시작했지만, 부족한 정보와 통신 두절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다 10:00에 지시를 내렸다.

사단장은 제10연대에게 현 전선에서 북한군을 방어하고, 삼척의 제21연대에게 강릉으로 집결할 것을 명했다. 사단의 주 임무는 강릉의 무조건 사수라고 명시하며, 육본에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육본과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참모장 최갑중 중령이 육본의 이치업 대령과 간신히 통화에 성공하였으나 북한의 전면 침공으로 증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사단장은 제21연대의 북상을 재촉하고, 장기전을 위해 모든 군수품을 대관령 너머 진부리로 이동시키고 계엄령 선포와 동시 모든 행정기관과 민간인의 철수를 명령했다.

연곡천 · 광원리

연곡천 전투

계엄령을 선포한 한국군 제8사단은 11:00에 사천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차렸다. 제2대대장 조원영 소령은 주문진 경찰관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 주민을 사천선 이남으로 피난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주문진읍이 보유한 모든 식량을 반출하거나, 반출이 불가능할 경우 소각을 지시하고, 경찰관과 군인의 조합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만들어 북한군을 탐색토록 하였다.

15:30 북한군의 SU-76 자주포 3대가 동해가도를 따라 응호에 출현하자 59고지에 포진한 한국군이 57mm 대전차포로 선두차를 계속 명중 시켰으나 격파에 실패하였다. SU-76 자주포는 한국군이 파괴한 교량에 이르러 정지했다.

18:00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고 주문진 읍내와 한국군 제2대대에 포격을 가하며 버림말-양지촌-173고지-260고지 방향으로 남하를 시작했다. 20:00 한국군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1개 대대로 방어선을 지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연곡천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20:40 제18포병대대장 장경석 소령이 육군본부에 출장 중이고 각 포대장과 참모장교, 선임하사관 10여 명이 포병학교에 파견 중인지라 대대부관 이남구 대위가 대신 지휘하는 제18포병대대가 제2대대를 엄호하기 시작했다. 제2대대는 축차적인 철수를 시작, 주문진 남쪽에 있는 교량을 파괴한 뒤 23:00에 연곡천으로 집결했다.

결과와 평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