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강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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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방어가 주임무인 제8사단은 26km의 정면을 겨우 1개 연대로 전담시킨데다 연대 일부가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실제 38선 경계임무는 2개 대대가 담당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더불어 제10연대는 제1대대와 제3대대가 교대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다만 병력의 외출외박을 금지시켜 <s>분노한</s>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38선 방어가 주임무인 제8사단은 26km의 정면을 겨우 1개 연대로 전담시킨데다 연대 일부가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실제 38선 경계임무는 2개 대대가 담당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더불어 제10연대는 제1대대와 제3대대가 교대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다만 병력의 외출외박을 금지시켜 <s>분노한</s>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제8사단장은 사단의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한 사전, 사후 조치를 하였지만 사단 예비대를 제10연대에 배속하지 않고 지휘를 이원화하여 융통성 있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추가로 제21연대 제1대대가 투입되었을 때 지휘계통이 3원화 되어 혼선을 초래했다.
제8사단장은 사단의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한 사전, 사후 조치를 하였지만 사단 예비대를 제10연대에 배속하지 않고 지휘를 이원화하여 융통성 있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추가로 제21연대 제1대대가 투입되었을 때 지휘계통이 3원화 되어 혼선을 초래했다. 그리고 예비대의 활용을 유효하게 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쉽게 무너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또한 남침 1개월 전부터 북한 병사들이 1개월 뒤에 보자고 말했고, 15일 전 차량들이 남하하였으며, 1주일 전 귀순한 북한군 병사로부터 1주일 이내에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음에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ref>제6사단의 경우 적극적인 수색으로 북한군의 움직임을 샅샅이 지켜보고 있었다. <s>콩이 콩인 이유.</s></ref>
'''추가로 남침 1개월 전부터 북한 병사들이 1개월 뒤에 보자고 말했고, 15일 전 차량들이 남하하였으며, 1주일 전 귀순한 북한군 병사로부터 1주일 이내에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음에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ref>제6사단의 경우 적극적인 수색으로 북한군의 움직임을 샅샅이 지켜보고 있었다. <s>콩이 콩인 이유.</s></ref>


한편 제18포병대대는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의 부재에도 조직적으로 전투에 참여, 초급장교들의 노력과 훈련, 그리고 장비의 가동상태 등 <s>군밀레</s> 준비성이 뛰어났다. 심지어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교육이 부족했음에도 지형을 활용하고 창의적인 포술로 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사단장의 지시로 모든 차량을 탄약 운반에 사용해 물자 부족은 겪지 않았다.<ref>차량화 또는 기계화 부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보급의 중요성에서는 제6사단보다 뛰어났다.</ref>


여담으로 강릉의 학생들이 동원되어 병사들을 위해 물자와 식량을 날랐는데 민간인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엄연한 불법 행위이며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ref>국가 존망이 달린 특수상황이긴 하지만 불법은 불법이다. 만약 학생들이 잡혔다면 포로대우는 커녕 즉결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국제법은 민간인이 국가 공인 무력집단끼리의 충돌에 참여 또는 간섭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s>그런데 북한이잖아? 북한: 포로가 뭐임? 빵야빵야!</s></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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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0일 (금) 17:34 판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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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27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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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협 소장
오백룡 소장
박정덕 대좌
이성가 대령
고근홍 중령
박서권 소령
이창률 소령
이남구 대위

개요

양양-강릉 전투는 북한 제1경비여단을 상대로 제8사단 제10연대 주축의 한국군이 6월 27일 대관령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치룬 전투이다. 제10연대는 진흑동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26km의 38도선을 단독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동해안 해안선 일대를 제외하면 방어선 중앙에 태백산맥이 뻗어있는 산악지대로 동서가 구별되고 교통이 제한되었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한국군 제10연대는 사전의 계획에 의한 전투배치도 해보지 못하고 각 부대간 통신마저 두절되어 분산되었다. 철수한 병력을 수습한 제10연대는 대대 주저항선인 화상천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사단 주저항선인 연곡천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26일 북한군이 도하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한국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그날 밤 한국군이 북쪽으로 도하해 주문진 공격의 발판을 위한 천마봉을 점거하였다. 한국군은 27일 05:00에 주문진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04:00에 북한군이 선제공격을 감행, 포격을 견디지 못한 한국군은 분산되어 대관령으로 철수하였다.

전투전 상황

북한군

북한군 제1경비여단은 전투대형을 2개 제대로 편성하고 주문진-강릉 축선에 주공을 지향했다. 제1제대는 경비여단 소속 7개 보병대대로 편성되었고, 제2제대는 제5보병사단 예하 제10연대로 편성되었다. 제1제대 제1, 제2, 제3보병대대가 귀둔리, 공수전리, 내현리 선에서, 제6대대가 원대리에서, 제4, 제5대대가 하추리, 귀둔리 선에서, 제7대대가 기사문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제대인 제10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 전과를 확대하는 임무를 띄고 양양 부근에 집결하였다.

한국군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제1, 제2대대는 제1경비여단의 정면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고근홍 중령이 지휘하는 제10연대는 강릉비행장에 본부를 설치, 연대 좌일선의 제1대대가 정족산-서림리-우탄리-진흑동에 이르는 12km 정면을 담당하고, 연대 우일선의 제2대대가 정족산-동사면-연화동-장리-명지리-대치리-46고지에 이르는 14km를 담당하였다. 연대 예비인 제3대대는 본부가 위치한 강릉비행장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3대대는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제1대대와 교대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기에 제3대대의 제9, 제11중대는 제1대대에, 제10중대는 제2대대에 배속되었다. 실제로 제3대대의 전력은 대대본부 병력과 제12중대가 유일했으며, 이미 교대를 위한 이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투

38도선

잔교리-연화동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제2대대가 담당한 잔교리-연화동 지역은 24일 저녁부터 내린 비로 인해 시계가 매우 불량하였다. 25일 새벽 제2대대의 38도선 경계진지에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되었으며 일제 공격을 개시하였다. 04:35 제7중대장 강응설 중위로부터 북한군 공격 개시 급보가 대대본부로 전달 되었다. 대대본부는 게릴라 침투를 위한 공격으로 판단하였으나 제5, 제6중대장으로부터 급박한 보고가 이어졌다. 이에 제10중대에서 훈시 중이던 제2대대장 조원영 소령은 제8중대 기관총소대를 제10중대에 배속시키고 화상천 남안의 인구리로 출동시켰다.

분산되어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한 제10중대는 06:00 인구리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2대대장이 각 중대를 호출하였으나 제7중대로부터 후퇴중임이 보고되었을 뿐 제5, 제6중대와 통신이 두절되어있었다. 명지리-장리-연화동의 제5, 제6중대도 진지선이 붕괴되어 철수 중일 것으로 판단한 대대장은 제7중대를 인구리로 철수시키고, 제10중대에게 북분리 남쪽 2.5km의 286고지를 확보하여 제5, 제6중대를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제10중대는 294고지를 점령한 뒤 183고지에 이르렀으나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되어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제2대대장은 연대로부터 북한군이 해안선에 상륙 중이니 강릉 방어를 위해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주문진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철수 명령을 받은 제2대대장은 공격을 중단시키고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주력을 수습하였다.

08:00 통신이 두절되었던 제6중대장 김순기 대위로부터 후퇴중이며 북한군 1개 대대가 동남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제2대대장은 제5, 제6중대에게 주문진 북쪽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제7중대는 동남쪽으로 우회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재편 중이었다.

조금 뒤 북한군이 직사포로 제10중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며 소대규모의 기마정찰대를 해안선으로 남하시켰지만 제10중대는 기마정찰대를 격퇴하고 박격포를 이용해 북한군의 직사포를 파괴하였다. 그때 대치리-명지리를 돌파한 북한군이 325고지의 제7중대를 공격하자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제2대대장이 화상천으로 병력을 후퇴시켰다. 제7중대의 엄호하에 제10중대가 주민들을 피난시키며 철수하였으며, 제7중대도 축차로 철수하였다.

한편 대대 중앙의 제5중대는 소대별로 분산 철수한 뒤 병력을 수습해 방어선을 펼치려 하였으나 무전기의 고장으로 대대와 연락이 불가능하자 주문진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었을 것으로 판단한 중대장의 독단으로 철갑령을 넘어 후퇴하였다.

정족산-진흑동

북한군 제1경비여단 제2보병대대는 정족산에서 진흑동의 12km 정면을 담당한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제1대대의 제9중대 정면을 공격했다. 북한군 제2대대의 2개 중대가 제9중대 제3소대를 집중 공격하고 1개 중대가 중대본부를 급습했다. 제9중대는 북한의 포위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 554고지 정상에 거점을 확보하고 산간계곡을 따라 구룡령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막아섰다. 그러나 제9중대장 박석권 중위가 부상을 입고 북한군의 직사포가 불을 뿜자 중대는 철수를 강요받았다.

제11중대가 담당한 지역엔 북한군의 공격이 없던 관계로 계속 38도선 경계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대대본부와의 통신두절로 개전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국군의 대응

제10연대 주번사령 최면호 중위가 북한군의 공격을 사단에 보고하자 사단 정보참모 육근수 소령은 사단참모들을 소집하였다. 육군본부의 교육검열을 마치고 강릉여관에 투숙 중이던 참모들은 05:30 사령부에 출두하였다. 그들은 항상 있던 국지적인 도발로 의견을 모았지만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으로부터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공격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부하를 소집한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06:00에 작전회의를 시작했지만, 부족한 정보와 통신 두절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다 10:00에 지시를 내렸다.

사단장은 제10연대에게 현 전선에서 북한군을 방어하고, 삼척의 제21연대에게 강릉으로 집결할 것을 명했다. 사단의 주 임무는 강릉의 무조건 사수라고 명시하며, 육본에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육본과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참모장 최갑중 중령이 육본의 이치업 대령과 간신히 통화에 성공하였으나 북한의 전면 침공으로 증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사단장은 제21연대의 북상을 재촉하고, 장기전을 위해 모든 군수품을 대관령 너머 진부리로 이동시키고 계엄령 선포와 동시 모든 행정기관과 민간인의 철수를 명령했다.

연곡천 · 광원리

연곡천 전투

계엄령을 선포한 한국군 제8사단은 11:00에 사천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차렸다. 제2대대장 조원영 소령은 주문진 경찰관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 주민을 사천선 이남으로 피난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주문진읍이 보유한 모든 식량을 반출하거나, 반출이 불가능할 경우 소각을 지시하고, 경찰관과 군인의 조합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만들어 북한군을 탐색토록 하였다.

15:30 북한군의 SU-76 자주포 3대가 동해가도를 따라 응호에 출현하자 59고지에 포진한 한국군이 57mm 대전차포로 선두차를 계속 명중 시켰으나 격파에 실패하였다. SU-76 자주포는 한국군이 파괴한 교량에 이르러 정지했다.

18:00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고 주문진 읍내와 한국군 제2대대에 포격을 가하며 버림말-양지촌-173고지-260고지 방향으로 남하를 시작했다. 20:00 한국군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1개 대대로 방어선을 지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연곡천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20:40 제18포병대대장 장경석 소령이 육군본부에 출장 중이고 각 포대장과 참모장교, 선임하사관 10여 명이 포병학교에 파견 중인지라 대대부관 이남구 대위가 대신 지휘하는 제18포병대대가 제2대대를 엄호하기 시작했다. 제2대대는 축차적인 철수를 시작, 주문진 남쪽에 있는 교량을 파괴한 뒤 23:00에 연곡천으로 집결했다.

북한군 제1경비여단의 주력은 18:00경 광진리와 향동을 점령하였지만 한국군의 반격으로 25일 밤 늦게서야 노동리와 영진리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일차 목표인 동덕리 (주문진 동남쪽 5km) 까지 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26일 10:30 한국군 제21연대 제1대대가 강릉에 도착해 사단예비로 전환되었다.

13:00 한국군의 주저항선 진지가 완료된 상황에서 북한군과 한국군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포격으로 제10연대 57mm 대전차포중대장 김찬호 대위가 전사하였다. 포격 중 북한군 기병대가 해안선을 우회해 동덕리 부근까지 접근했으나 격퇴 되었다. 당시 제18포병대대는 삼림으로 이루어진 지형여건을 활용, 순발신관을 사용해 나뭇가지를 파열시킴으로서 포방부의 기상 시한신관의 효과를 보도록 하였다. 강릉의 학생들 또한 포탄과 식량의 운반을 도왔으며 사단장이 전투의 승패는 오로지 포병에 달려있다고 포방부의 기상 2 격려하였다.

20:00 주문진에서 남하한 북한군이 영진리와 방내리에 이르는 고지를 점령하자 제10연대 제2대대 제7, 제10중대가 연곡천을 건너 21:00에 영진리를 점령하고 33고지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2개 중대가 포격을 집중하며 방내리 방면에서 역습을 감행하자 후퇴하였다. 또한 제8중대장 정순기 대위를 포함한 소규모의 특공대가 연곡천을 도하해 88고지로 진출, 북한군 장교 2명과 병사 3명을 사살한 뒤 복귀하였다.

이 무렵 서해안의 한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했다는 풍문이 나돌고 북한군이 제8사단에게 얻어터진 바람에 공세를 멈추자 제8사단장은 후방철수 명령을 후회하며 육군본부에 1개 연대의 증원을 요청 원산까지 반격하겠다고 전문을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육본에서 병력의 증원이 없더라도 단독으로 반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사단장의 결정에 따라 제10연대 제2대대가 23:00 반격을 시작해 27일 01:00에 천마봉을 점령하였다.

사단장은 북한군이 천마봉을 빼앗겼음에도 침묵을 지키자 주문진을 탈환하고 38도선을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05:00를 기해 주문진 탈환을 계획했던 한국군은 04:00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계획이 무산, 오히려 한국군의 방어선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광원리 전투

계방천 남안의 799고지-795고지-767고지에 이르는 진지를 점령한 제10연대 제1대대는 연대 및 사단과 통신이 두절된 채 25일 밤을 보냈다. 26일 09:00 북한군 1개 대대가 공격을 하였으나 포판이나 가늠대도 없이 직접조준으로 사격한 81mm 박격포의 놀라운 명중률을 이용해 포방부의 기상 3 15:00까지 북한군을 세 차례나 격퇴하였다. 북한군은 큰 타격을 입고 공격을 포기, 조개리 방면으로 물러나 부대를 재편하였다.

당시 제1대대의 제11중대는 대대에 합류하지 않고 연락도 두절되었는데, 대대장 박치옥 소령은 제11중대가 제6사단 지역으로 철수 중이라고 판단하였으나 사실 제11중대는 38도선 진지를 계속 확보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유일무이하게 38도선을 지킨 중대. 뭐라도 와야 공격을 하던 후퇴를 하던 하지. 북한군에게 왕따당한 제11중대.

20:00 연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제1대대는 운두령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강릉 전투

27일 04:00 강력한 포격과 함께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의 2개 대대가 천마봉을 점령한 한국군 제2대대를 3면에서 포위 공격했다. 큰 타격을 받은 제2대대는 방어선을 지탱하지 못하고 포위망을 뚫으며 후퇴를 시작했다. 제2대대는 행정리-방내리를 우회해 연곡천의 주저항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가로막혀 행정리 서쪽에서 연곡천 상류를 도섭한 뒤 207고지-192고지로 후퇴했으나 북한군의 신속한 추격으로 대대가 분산되고 철수를 강요받았다.

주저항선에 위치한 제10연대 제3대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끊임없는 증원으로 좌측의 공병대대가 진지선에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이 철수명령이 하달된 것으로 착각하고 물러섰다. 이에 08:00 주저항선이 붕괴되었으며, 지휘체계가 무너진 제3대대는 사천을 건너 10:00 난곡리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노출된 제18포병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으나 진지를 계속 고수하며 포격을 퍼부었다.[1] 포방부의 기상 4 10:00 북한군이 포위망을 조이자 포병대대는 백병전을 벌이며 포를 하나씩 뒤로 빼내기 시작했다. 빼내지 못한 2문의 포는 폐쇄기와 타이어를 파괴하였다.

한편 제21연대 제1대대와 합류한 공병대대는 사이구라미-상구라미-89고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제10연대 제2대대를 추격중인 북한군을 막기 위해 대대장 정원하 대위가 제3중대를 보냈다. 그러나 제3중대가 이동하는 것을 철수로 오인한 병사들이 물러서자 주저항선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09:00 사천선에서 병력을 수습한 제1대대는 강릉으로 물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공병대대는 큰 병력 손실을 겪었다.

주저항선이 급속히 붕괴되자 사단장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제21연대 제3대대에 사천선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야간 행군으로 지친 제3대대는 쉴 시간도 없이 사천선으로 진출, 사천선을 건너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11:00 북한군과 40분간 접전을 벌인 제3대대는 대대를 노린 북한군의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제3대대는 13:00에 유천리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사천선 남쪽으로 퇴각한 제8사단은 육본과의 통신두절로 작전방침을 알 수 없자 사단장은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사단장은 사단을 대관령으로 철수시키로 결정, 14:00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결과와 평가

38선 방어가 주임무인 제8사단은 26km의 정면을 겨우 1개 연대로 전담시킨데다 연대 일부가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실제 38선 경계임무는 2개 대대가 담당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더불어 제10연대는 제1대대와 제3대대가 교대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다만 병력의 외출외박을 금지시켜 분노한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제8사단장은 사단의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한 사전, 사후 조치를 하였지만 사단 예비대를 제10연대에 배속하지 않고 지휘를 이원화하여 융통성 있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추가로 제21연대 제1대대가 투입되었을 때 지휘계통이 3원화 되어 혼선을 초래했다. 그리고 예비대의 활용을 유효하게 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쉽게 무너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추가로 남침 1개월 전부터 북한 병사들이 1개월 뒤에 보자고 말했고, 15일 전 차량들이 남하하였으며, 1주일 전 귀순한 북한군 병사로부터 1주일 이내에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음에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

한편 제18포병대대는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의 부재에도 조직적으로 전투에 참여, 초급장교들의 노력과 훈련, 그리고 장비의 가동상태 등 군밀레 준비성이 뛰어났다. 심지어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교육이 부족했음에도 지형을 활용하고 창의적인 포술로 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사단장의 지시로 모든 차량을 탄약 운반에 사용해 물자 부족은 겪지 않았다.[3]

여담으로 강릉의 학생들이 동원되어 병사들을 위해 물자와 식량을 날랐는데 민간인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엄연한 불법 행위이며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4]

각주

  1. 제18포병대대 장병의 90% 이상이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북진해 고향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2. 제6사단의 경우 적극적인 수색으로 북한군의 움직임을 샅샅이 지켜보고 있었다. 콩이 콩인 이유.
  3. 차량화 또는 기계화 부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보급의 중요성에서는 제6사단보다 뛰어났다.
  4. 국가 존망이 달린 특수상황이긴 하지만 불법은 불법이다. 만약 학생들이 잡혔다면 포로대우는 커녕 즉결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국제법은 민간인이 국가 공인 무력집단끼리의 충돌에 참여 또는 간섭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이잖아? 북한: 포로가 뭐임? 빵야빵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