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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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 ===
===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 ===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든 히틀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만큼 영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오판했던 것. 그런 오판 속에서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틈을 타 1달만에 전광석화처럼 폴란드를 정복하였다. 뒤이어 1940년 4월 [[덴마크]]를 협박, 군대 주둔권을 얻어낸 후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으며, 5월에는 황색 작전을 발동, [[베네룩스 3국]]에 의해 서부전선의 대국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뒤이은 영국 침공 계획이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고, 1941년 6월, 자신의 독단으로 [[소련]]을 기습 침공하여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한때는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끝내 함락에는 실패했고, 히틀러 본인의 아집으로 계속된 전략적 오판을 통한 패배를 자초하였다. 뒤이어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자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등 전쟁의 규모를 계속해서 벌려 나갔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히틀러의 불안감과 신경쇠약, 편집증은 심해져만 갔으며 194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점점 비현실적인 신무기에 집착하고 과대망상에 빠졌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퇴와 항복이란 단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은 지휘관들을 같은 이유로 기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미수 사건으로 더욱 심해졌다. 파리 주둔군 사령관 콜티츠에게 '''도시를 초토화시켜라!'''는 명령을 내리다 역설적으로 콜티츠의 항복을 불러일으켰고,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라는 무리수로 패배를 앞당겼다. [[베를린 전투]]에서도 존재하지도 않는 슈타이너 집단군이 소련군을 물리쳐 줄 것이라 믿다가 [[그런 거 없다]]는 측근들의 말에 엄청나게 격분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베를린의 지하벙커 늑대굴에 남았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며 다시는 독일 역사에 항복이라는 치욕스런 단어가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충실히 따라준 [[에바 브라운]]과 간략하게 결혼식을 치룬 후 유언장에 [[카를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로 지명한 후 끝까지 싸우라는 지시를 내린 후 권총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독일군이 즉시 화장하려 했으나 베를린 전투의 급박한 상황에 화장을 위한 충분한 연료가 없어 실패했고, 결국 늑대굴을 점령한 소련군이 그의 시신을 접수하여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 지명한 되니츠는 철저항전이라는 히틀러의 유언을 무시하고 항복하여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끝낸다.


== 사상 ==
== 사상 ==

2015년 5월 8일 (금) 16: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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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출생 1889년 04월 20일
사망 1945년 04월 30일 (56세)

Adolf Hitler

개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930~40년대 독일의 독재자.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의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타 민족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너무나 당연시한 극단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이고 아리아인 우월주의에 빠진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특정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겠다는 망상을 실행에 옮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상 최악의 대량학살자.

역사의 전개에 있어 특정 개인 한 명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A라는 인물이 큰 업적을 이뤘어도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를 대신할 다른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요소로 자리잡는 매우 드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대체불가능적 요소가 매우 극단적으로, 그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인류 전체의 흑역사

그가 없었으면 제2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일어났더라 하더라도 세계대전 규모가 아닌 비교적 흔한 지역전쟁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관측이다. 좋든싫든 현대사회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1인. 위에서 언급한, 인류 역사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대체불가능한 인물. 그의 악행을 모두 적기에는 위키 페이지의 여분이 부족할 지경이다.

생애

평범한 화가 지망생에서 빈의 유랑화가로

1889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브라우나우 태생이나 곧 이사하여서 사실상 린츠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제국의 중하위직 세무공무원으로 아들이 자신처럼 공무원의 길을 밟기를 희망하였으나 소년 히틀러는 화가를 지망하였고, 안그래도 전통적인 가부장의 표본이었던 알로이스 히틀러와 마찰이 심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음에도 학력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승진했기에, 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자신과 같은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길 희망했다.아버님 소원대로 공무원이 되긴 했는데……

반면 소년 히틀러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본인 스스로도 공부보다는 예술가, 특히 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에 대한 전통적인 아버지들의 인식은 좋지 않아서 자연스레 부자는 장래를 놓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부친 생전에 히틀러는 일부 폭력을 동반한 부친의 강요와 억압에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히틀러는 부친의 강권으로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였으나 성적은 더더욱 좋지 못했고 이런 히틀러의 학교 생활은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의 사망(1903년 1월)을 계기로 얼마 못가 끝나게 된다.

부친 사망 이후 자유로워진 히틀러는 얼마 안 가 학교를 완전히 포기하고 수도 빈으로 유학하여 꿈에도 그리던 미술학교 응시에 나섰으나 결과는 광탈. 히틀러는 분명 그림을 좋아했고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곤 나쁘진 않은 수준이었지만 딱 그정도 수준에서 그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그는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채 스스로 풍경을 스케치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07년 모친까지 사망하고 사실상 혼자가 된 히틀러는 이후 빈에 완전히 머물면서 여러 하숙방들을 전전하는 백수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 히틀러가 가난에 허덕이고 이로 인해 자본가, 특히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사실 히틀러는 적으나마 연금과 생활보조금을 받고 있었고, 친척으로부터의 지원도 받아서 혼자서 먹고 살기엔 부족하진 않았다고 한다. 풍족하게 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을 하던 처지는 아니었다는 것. 영 돈이 궁해지면 본인이 직접 거리로 나가 그림을 그려 파는 것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히틀러가 경제적으로 궁핍하진 않았더라도 반유대주의, 최소한 게르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였던 룸메이트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갖고 있는 돈을 대부분 박물관 및 오페라 등에 투자했다고 하며, 특히 독일 민족신화를 오페라 작품화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몇 번이고 감상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가 국경을 넘어 쫓아온 오스트리아 수사관들에게 무릎끓고 싹싹 빌며 몸이 허약해서 군대에 못간다고 사정하여 끝내 면제 판정을 받아냈다. 본인은 훗날 나의 투쟁에서 다민족 잡탕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대에 몸을 담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냥 1913년 당시 군대에 가기 싫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1년 뒤 독일군에 자원입대한 것을 근거로 히틀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추론도 있지만 평시였던 1913년과 전시로 애국심의 광기에 다들 미쳐있던 1914년 8월을 똑같이 보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같은 부대 소속 병사들의 평가로는 용감히 싸웠고 맡은 임무는 성실히 해내는 훌륭한 병사지만 전우들과 마음을 터놓는 교우관계는 쌓지 못했다고 한다. 주로 연락병으로 종군하였으며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으며 공훈을 인정받았다. 철십자 훈장은 독일군의 훈장 체계에서 최하급의 훈장이지만 그래도 일개 병사가 받기엔 상당히 힘든 것은 다른 훈장들과 다를 바 없다. 최소한 병사로서는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것.

참호전의 와중에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은 서부전선의 참극 속에서도 히틀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말 안타깝게도 살아남았고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후 후방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다가 독일의 항복과 종전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높이 산 상관들덕에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든 독일군에 잔류할 수 있었다. 그는 뮌헨에서 군 정보부 및 방첩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그의 상관은 뮌헨의 수많은 정치조직들에 대한 감시 및 동향파악 업무의 일환으로 히틀러를 독일 노동자당 정기모임에 파견시키는 지시를 내리고 말았다.안돼!!

독일 노동자당 모임에 참석한 히틀러는 불평분자들 몇이 모여 떠드는 것을 지켜보다 참지 못해 스스로 회의에 참석, 화려한 언변으로 참석자들을 죄 버로우시킨 후 당의 권유를 받아 군을 전역하고 정식으로 입당한다. 이후 히틀러는 단번에 쬐그마한 정당을 접수하여 당 지도자가 되었고, 1920년 2월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바꾸며 당내에서 일인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나치의 지도자에서 일국의 총리까지

히틀러는 특유의 연설력과 카리스마로 당세를 빠르게 확장시키며 당내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확고부동한 1인자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차지한 것을 보고 이를 모방하여 1922년 뮌헨 맥주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같은 연대세력과의 동상이몽과 어설픈 준비로 쿠데타는 즉시 진압되었고,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루 형기가 감형되어 9개월의 복역 끝에 출소했지만 당세는 많이 약해졌고 당내 반대파가 강성해지는 등 위기가 찾아왔가. 하지만 수감생활동안 히틀러는 두 가지의 성과를 얻는데 하나는 나의 투쟁을 저술하여 지명도를 전국적으로 넓혔고 다른 하나는 불법적 쿠데타로 정권을 쓰러트릴 수 없으니 합법적 수단(선거)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전략적 방침 변화였다.

이후 여라 차례 선거에서 나치는 쓴맛을 보았으나 꾸준희 의회에 의석을 내는 원내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1930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뒤를 이어 원내 제2당까지 치고 올라왔고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과에는 당 바깥으로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최악의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기성정당에의 불신, 카톨릭중앙당이나 국가인민당 등 보수정당의 분열과 나치와의 연대 모색,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공산당의 성장과 이에 따른 공산혁명에의 공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당 내부로는 헤르만 괴링파울 요제프 괴벨스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성과를 내주었는데 특히 괴벨스의 천재적 선동술은 나치의 급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결국 1932년 1차 총선에서 나치는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는 아직 기존 정당의 경계심, 그리고 히틀러의 고집스런 협상태도로 집권하지 못했지만 슐라이허 내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고, 같은 해 11월 2차 총선에선 의석수가 약간 줄었지만 여전히 원내 1당을 유지, 리페 주의회 선거 승리와 보수계 정치인이며 전 총리이기도 한 프란츠 폰 파펜의 협력으로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국가인민당과 연정을 통해 총리에 취임했다.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퓌러)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랐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1938년 3월엔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간 국가를 통합(사실상 흡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협박, 주테텐란드를 빼앗았다.(뮌헨 협정) 그리고 1939년 3월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멸망시키며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으며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 지방을 할양받았다.

히틀러는 일련의 거듭된 침략 행위에도 서방국가(영국프랑스)가 침묵하고 개입하지 않는 것에 자신감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폴란드에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 단치히 회랑의 양도를 요구했으나 폴란드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이에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을거라 판단, 1939년 9월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든 히틀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만큼 영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오판했던 것. 그런 오판 속에서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틈을 타 1달만에 전광석화처럼 폴란드를 정복하였다. 뒤이어 1940년 4월 덴마크를 협박, 군대 주둔권을 얻어낸 후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으며, 5월에는 황색 작전을 발동, 베네룩스 3국에 의해 서부전선의 대국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뒤이은 영국 침공 계획이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고, 1941년 6월, 자신의 독단으로 소련을 기습 침공하여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한때는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끝내 함락에는 실패했고, 히틀러 본인의 아집으로 계속된 전략적 오판을 통한 패배를 자초하였다. 뒤이어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자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등 전쟁의 규모를 계속해서 벌려 나갔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히틀러의 불안감과 신경쇠약, 편집증은 심해져만 갔으며 194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점점 비현실적인 신무기에 집착하고 과대망상에 빠졌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퇴와 항복이란 단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은 지휘관들을 같은 이유로 기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미수 사건으로 더욱 심해졌다. 파리 주둔군 사령관 콜티츠에게 도시를 초토화시켜라!는 명령을 내리다 역설적으로 콜티츠의 항복을 불러일으켰고,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라는 무리수로 패배를 앞당겼다. 베를린 전투에서도 존재하지도 않는 슈타이너 집단군이 소련군을 물리쳐 줄 것이라 믿다가 그런 거 없다는 측근들의 말에 엄청나게 격분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베를린의 지하벙커 늑대굴에 남았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며 다시는 독일 역사에 항복이라는 치욕스런 단어가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충실히 따라준 에바 브라운과 간략하게 결혼식을 치룬 후 유언장에 카를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로 지명한 후 끝까지 싸우라는 지시를 내린 후 권총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독일군이 즉시 화장하려 했으나 베를린 전투의 급박한 상황에 화장을 위한 충분한 연료가 없어 실패했고, 결국 늑대굴을 점령한 소련군이 그의 시신을 접수하여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 지명한 되니츠는 철저항전이라는 히틀러의 유언을 무시하고 항복하여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끝낸다.

사상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끝이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것들 중에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하고 가장 1순위였던 사상은 독일어로 Herrenvolk, <지배자 민족>사상이었다. 매우 극심한 정도의 국가주의로서 애국심이든 뭐든지 너무 심하면 안좋은거다 자기네 Aryan race, 즉 백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주장이다. 근데 사실 이 인종은 일부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말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인종인데 이에 대해서 히틀러는 백인이며, 키가 크고, 노란색 머리에 파란 눈인 인간들이라고 주장했다... 근데 진짜 웃긴건 이중에서 백인이라는 거 뺴면 히틀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추정 키가 173cm로 작은 편이고, 머리색도 검정/갈색에다가 눈도 갈색. 근데 여기서 키는 히틀러가 체격 검사시 복장 벗는 것을 거부해서 추정된 키일 뿐이다 근데 173이 작은 건가? 180 미만이면 다 키 작은 거 아닌가요?

더 자세한 그의 사항을 알고 싶으면 나치 항목을 참고 바람.

성격

능력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