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시아 도르트문트

Raute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21일 (화) 21:38 판

틀:축구구단 정보

개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독일 도르트문트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단이다. 도시 이름인 도르트문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 현지에서는 Ballspielverein Borussia의 축약어인 BVB(베파우베)를 많이 쓴다.[1]

상징색이 노랑과 검정이고, 유니폼에도 줄무늬를 자주 활용하는데다 독일의 유명 동화이자 애니메이션인 꿀벌 마야 때문에 '꿀벌 군단'이라는 애칭이 있고 마스코트도 에마(Emma)라는 이름의 꿀벌이다. 근데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 만든 게 함정 2008년 위르겐 클롭이 부임한 이후 강한 압박과 많은 활동량에 기반한 '게겐 프레싱'(Gegenpressing) 전술을 보면 마치 달려드는 꿀벌떼 같이 보이므로 매우 적절한 별명이다.[2] 덕분에 국내에서는 BVB보다는 그냥 꿀벌이라고 부르거나 도르트문트를 줄인 돌문이라고 많이 부른다. 물론 현지에서는 돌문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

역사

창단 이후 2차대전까지(1909-194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도르트문트에 위치한 '삼위일체 성당'의 교우회를 모태로 1909년에 탄생했다. 교우회의 젊은 광부들은 종교활동 외에도 함께 운동을 즐기곤 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축구가 인기였다. 그러나 새로운 교우회장은 야만적인 행위라며 축구를 금지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이들은 회의를 거쳐 교회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클럽을 창단하기로 했다. 돌발적인 사태였기 때문에 변변한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고, 회의 전만 해도 클럽의 이름조차 정해두지 않았다. 간단한 논의 끝에 결정된 이름은 보루시아였는데, 몇 년 전에 파산해서 사라진 인근 맥주 양조장의 이름이었다.[3]

클럽의 초창기는 험난했다. 교회와 선을 긋고 시작했기 때문에 축구팀으로 승인받지 못해 육상부를 운영하기도 했고, 수년간 지역리그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서독 1부리그에 처음으로 발을 딛은 건 1926년이 되어서였다. 그나마도 꼴찌로 다시 강등당했고, 재정위기를 겪고, 나치에 의해 클럽의 수뇌부가 교체당하기도 했다. 새로 출범한 가우리가에서 2번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나치 치하는 엄혹했다. 홈구장 바이세 비제에서 쫓겨나 슈타디온 로테 에어데로 옮겨가야 했고, 클럽 관계자들은 나치에 부역해야만 했다. 물론 끝까지 나치에게 저항한 이들도 있었으나 SA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버리가 시대(1946-1963)

2차대전이 끝나고 독일 축구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쟁의 참화와 나치 청산으로 인해 많은 클럽들이 사실상 재창단의 길을 걸었고, 독일의 축구리그인 가우리가도 오버리가로 바뀌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오버리가 체제에서 빛을 본 클럽 중 하나였다. 베스트팔렌의 우승팀 자격으로 개편된 오버리가 서부지구에 참가해 최초의 서부지구 우승팀 자리를 차지했다.[4] 1948/49시즌에는 리그 2연패에 성공했고 부활한 전국대회에 팀 역사상 처음으로 참가해 준우승팀이 되었다. 최초의 3연패도 BVB가 달성했으며, 비록 서부지구 최초의 독일 우승팀은 놓쳤지만 1955/56시즌에 드디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처음으로 진출한 유러피언컵에서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긴 했지만 전국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해 오버리가 체제에서 유일하게 2연패에 성공한 클럽이 됐다. 1957/58시즌에 독일팀 최초로 유러피언컵 8강에 진출했고, 이후에도 서부지구의 강호 자리를 유지했다. 특히 1962/63시즌에는 서부지구 준우승에 그쳤지만 전국대회서 서부지구 우승팀 쾰른을 꺾고 우승해 유일한 3회 우승팀이자 오버리가 시대의 마지막 우승팀이 되었다. 오버리가 체제에서 도르트문트는 서부지구에서 6번 우승하고 전국대회에서 3번 우승했는데 이는 서부지구 최고 기록이며 누적승점에서도 1위였다.[5]

분데스리가의 개막과 유럽대회 우승(1964-1970)

오버리가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분데스리가 설립멤버에 포함되었다. 다른 지방의 명문클럽들과는 달리 BVB는 성공적으로 분데스리가에 안착했고, 지속적으로 상위권에서 경쟁했다. 비록 분데스리가 우승은 차지하지 못하고 계속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1965년에 클럽 역사상 최초로 DFB-포칼에서 우승했으며, 1965/66시즌 UEFA 컵 위너스컵에서 독일 클럽으로는 첫번째 유럽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67시즌을 끝으로 주축선수들의 이탈과 노쇠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하위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1969/70시즌 5위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일시적인 회광반조에 지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서부지구 출신인 쾰른 역시 분데스리가 초대 우승팀이 되는 등 60년대 독일 최고의 팀 중 하나였는데 이 무렵부터 전성기에서 내려와 리그를 주름잡는 패자의 교체가 일어났다.

강등과 침체기(1970-1991)

1970년에 주장 볼프강 파울이 은퇴했고, 마침내 팀의 몰락이 일어났다. 1971/72시즌, 17위에 그치며 처음으로 강등당했고 새 홈구장 베스트팔렌슈타디온[6]의 개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2부리그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1976/77시즌 1부리그에 복귀하여 빌리 리펜스, 만프레트 부르크스뮐러 등의 활약으로 중위권에 안착하긴 했으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게 0:12로 대패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7] 우도 라텍, 브란코 제베치, 카를-하인츠 펠트캄프 등의 감독들이 거쳐가며 상위권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번번히 7위 전후의 성적에 머무르고 감독이 떠나는 과정을 반복했다.

1985/86시즌 강등위기에 몰렸으나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팀을 구했고, 프랑크 밀, 토마스 헬머, 노어베르트 디켈을 영입하는 공격적인 투자로 4위라는 성과를 냈다. 자프티히가 성적부진으로 물러난 뒤 신임감독 호어스트 쾨펠의 지휘 아래 안드레아스 묄러, 미하엘 루메니게 등을 영입하며 1989년에 포칼 우승을 차지하고 1989/90시즌 4위에 오르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고무된 도르트문트는 당시 독일 이적료 신기록인 410만 마르크의 금액으로 플레밍 폴센을 영입했으나 쾨펠 역시 자프티히처럼 성공 이후 부진을 경험하며 팀을 떠났다.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을 끝낸 것은 스위스에서 온 남자, 오트마 히츠펠트였다.

히츠펠트와 황금기(1991-2003)

오트마 히츠펠트는 도르트문트를 매년 우승 경쟁에 참여하는 강팀으로 탈바꿈시켰다. 첫시즌에 리그 2위, 2번째 시즌에 리그 4위와 UEFA컵 준우승이란 호성적을 거뒀고 4번째 시즌에 드디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상금과 TV중계권료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투자를 했는데 슈테판 로이터, 마티아스 자머, 카를-하인츠 리들레, 안드레아스 묄러, 위르겐 콜러 등 매년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을 수집하며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여기에 스테판 사퓌자, 줄리우 세자르 등 외국인 선수들 역시 팀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히츠펠트는 1994/95시즌과 1995/96시즌 연거푸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1996/97시즌에는 UEFA컵에서 악연이 있던 유벤투스를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나 우승을 차지했다.[8] 특히 결승전에서 라스 리켄이 넣은 쐐기골은 클럽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정상에 오른 히츠펠트는 감독에서 물러나 단장으로 부임하고, 그 뒤는 이탈리아의 명장 네비오 스칼라가 이었다. 스칼라는 인터콘티넨털컵에서 우승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순항하긴 했지만 리그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경질되었다. 히츠펠트는 클럽을 안정화시키는 대신 라이벌 바이언으로 떠나버렸고 클럽은 다시 반등과 부진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이 이룬 업적과 거대해진 규모로 인해 도르트문트가 독일을 대표하는 강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1995년에 착공한 홈구장 확장 덕분에 많은 입장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특히 1999년부터 추진한 주식 상장은 구단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부를 앞세워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들여 에바니우손, 데데, 토마스 로시츠키, 얀 콜레르, 마르시우 아모로주, 에베르톤 등 여러 선수를 사왔고, 감독으로 변신한 마티아스 자머의 지휘 아래 2001/02시즌 우승트로피를 탈환하고 UEFA컵 결승에 올랐다. 2002/03시즌은 리그 3위와 챔피언스리그 2차 조별리그 탈락에 그쳤지만 구단의 전력이 강력한 것은 분명했고, 도르트문트의 미래는 계속 밝아보였다.

재정위기와 파산, 그리고 몰락(2003-2008)

클롭의 시대(2008-2015)

라이벌

국내에서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지만, 사실 도르트문트의 가장 큰 라이벌은 단연 FC 샬케 04이다. 지리적으로도 거의 옆 동네 수준으로 가까우며, 양 팀이 모두 광부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등, 자연스럽게 최대의 라이벌이 될 만한 조건을 갖췄다. 이 더비를 레비어 더비라고 부르는데, 레비어 더비는 세계 10대 더비로도 뽑히는 등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치열한 더비이다. 마침 각 팀의 상징도 노랑(도르트문트)과 파랑(샬케)으로 보색 관계에 있어 라이벌리가 더욱 돋보이...나?

스쿼드

15-16 시즌

틀:축구단 선수 명단/시작 |- | 1 | 로만 바이덴펠러 | Roman Weidenfeller | 골키퍼 | 독일 | 1980년 8월 6일 | style="text-align:left;" | |- | 4 | 네벤 수보티치 | Neven Subotić | 수비수 | 세르비아 | 1988년 12월 10일 | style="text-align:left;" | |- | 6 | 스벤 벤더 | Sven Bender | 미드필더 | 독일 | 1989년 4월 27일 | style="text-align:left;" | |- | 7 | 요나스 호프만 | Jonas Hofmann | 미드필더 | 독일 | 1992년 7월 14일 | style="text-align:left;" | |- | 8 | 일카이 귄도간 | İlkay Gündoğan | 미드필더 | 독일 | 1990년 10월 24일 | style="text-align:left;" | |- | 9 | 치로 임모빌레 | Ciro Immobile | 공격수 | 이탈리아 | 1990년 2월 20일 | style="text-align:left;" | |- | 10 | 헨릭 므키타리안 | Henrikh Mkhitaryan | 미드필더 | 아르메니아 | 1989년 1월 21일 | style="text-align:left;" | |- | 11 | 마르코 로이스 | Marco Reus | 공격수 | 독일 | 1989년 5월 31일 | style="text-align:left;" | |- | 15 | 마츠 후멜스 | Mats Hummels | 수비수 | 독일 | 1988년 12월 16일 | style="text-align:left;" | |- | 16 | 야쿱 브와슈치콥스키 | Jakub Błaszczykowski | 미드필더 | 폴란드 | 1985년 12월 14일 | style="text-align:left;" | |- | 17 |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 Pierre-Emerick Aubameyang | 공격수 | 가봉 | 1989년 6월 18일 | style="text-align:left;" | |- | 18 | 누리 사힌 | Nuri Şahin | 미드필더 | 튀르키예 | 1988년 9월 5일 | style="text-align:left;" | |- | 19 | 케빈 그로스크로이츠 | Kevin Großkreutz | 미드필더 | 독일 | 1988년 7월 19일 | style="text-align:left;" | |- | 20 | 아드리안 라모스 | Adrián Ramos | 공격수 | 콜롬비아 | 1986년 1월 22일 | style="text-align:left;" | |- | 21 | 올리버 키르히 | Oliver Kirch | 수비수 | 독일 | 1982년 8월 21일 | style="text-align:left;" | |- | 23 | 카가와 신지 | Shinji Kagawa | 미드필더 | 일본 | 1989년 3월 17일 | style="text-align:left;" | |- | 24 | 마리안 자르 | Marian Sarr | 수비수 | 독일 | 1995년 1월 30일 | style="text-align:left;" | |- | 25 |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로스 | Sokratis Papastathopoulos | 수비수 | 그리스 | 1988년 6월 9일 | style="text-align:left;" | |- | 26 | 루카스 피스첵 | Łukasz Piszczek | 수비수 | 폴란드 | 1985년 6월 3일 | style="text-align:left;" | |- | 27 | 곤살로 카스트로 | Gonzalo Castro | 미드필더 | 독일 | 1987년 6월 11일 | style="text-align:left;" | |- | 28 | 마티아스 긴터 | Matthias Ginter | 수비수 | 독일 | 1994년 1월 19일 | style="text-align:left;" | |- | 29 | 마르셀 슈멜처 | Marcel Schmelzer | 수비수 | 독일 | 1988년 1월 22일 | style="text-align:left;" | |- | 33 | 율리안 바이글 | Julian Weigl | 미드필더 | 독일 | 1995년 9월 8일 | style="text-align:left;" | |- | 34 | 마빈 둑쉬 | Marvin Ducksch | 공격수 | 독일 | 1994년 3월 7일 | style="text-align:left;" | |- | 37 | 에릭 두름 | Erik Durm | 수비수 | 독일 | 1992년 5월 12일 | style="text-align:left;" | |- | 38 | 로만 뷔르키 | Roman Bürki | 골키퍼 | 스위스 | 1990년 11월 14일 | style="text-align:left;" | |- | 39 | 헨드릭 본만 | Hendrik Bonmann | 골키퍼 | 독일 | 1994년 1월 22일 | style="text-align:left;" | |- | 40 | 예레미 두지악 | Jeremy Dudziak | 수비수 | 독일 | 1995년 8월 28일 | style="text-align:left;" | |- | 44 | 케빈 캄플 | Kevin Kampl | 미드필더 | 슬로베니아 | 1990년 10월 9일 | style="text-align:left;" | 틀:틀 끝

이것저것

각주

  1. BVB라는 축약어만으론 헷갈릴 수 있으니 창단년도를 붙여 BVB09라고도 부르는데 축구게시판에서는 다들 알아보니까 그냥 BVB라고 하는 편.
  2. 다만 2014-15 시즌을 끝으로 클롭이 사퇴하면서 앞으로 전술이 어떻게 될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3. 그러므로 보루시아란 이름을 프로이센 왕국에서 따왔다거나 BVB가 프로이센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4. 오버리가는 1945/46시즌부터 시작되었으나 서부지구는 북부지구와 함께 1947/48시즌에 생겼다.
  5. 12년 랭킹에서는 쾰른에게 밀려 서부지구 2위였다.
  6.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홈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의 원래 이름
  7. 분데스리가 최다점수차 경기 기록이며, 이 패배로 인해 BVB012라는 별명이 붙었다.
  8. UEFA컵에서 준우승할 때의 상대가 유벤투스였고, 1995년에도 4강에서 유벤투스에게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