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사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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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이 되자 라구사 공화국은 8개 이상의 도시와 항구에 영사관을 짓는 등 꽤나 조직화된 영사 네트워크를 지니게 된다. 1806년에는 프랑스 제 1제국에게 항복하였고, 이에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이 공격하여 1달간의 공성전을 치루게 된다.<ref>약 3000개가 넘는 대포알이 도시에 떨어졌다고...</ref>그 뒤 프랑스군이 등장해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을 쫓아냈다. 같은 해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이 라구사에 진입하였다. 1808년 마르몽 원수는 라구사 공화국을 폐지하였고,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ref>이탈리아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괴뢰국</ref>에 편입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라구사 공작으로 선언했다. 1810년에는 리구사를 포함한 달마티아 전역이 프랑스 제국의 일리리아 주로 편입되었다. 1814년 파리 전투에서 마르몽 원수는 니폴레옹을 배신하였고,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졸지에 그의 작위 중 하나였던 라구사 공작에서 따온 ''ragusade''와 ''raguser''는 프랑스어로 각각 ''배반을 선언하다'', ''사기꾼''을 의미하게 된다.<s>졸지에 반란자가 되버린 라구사인들 지못미</s>
1800년이 되자 라구사 공화국은 8개 이상의 도시와 항구에 영사관을 짓는 등 꽤나 조직화된 영사 네트워크를 지니게 된다. 1806년에는 프랑스 제 1제국에게 항복하였고, 이에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이 공격하여 1달간의 공성전을 치루게 된다.<ref>약 3000개가 넘는 대포알이 도시에 떨어졌다고...</ref>그 뒤 프랑스군이 등장해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을 쫓아냈다. 같은 해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이 라구사에 진입하였다. 1808년 마르몽 원수는 라구사 공화국을 폐지하였고,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ref>이탈리아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괴뢰국</ref>에 편입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라구사 공작으로 선언했다. 1810년에는 리구사를 포함한 달마티아 전역이 프랑스 제국의 일리리아 주로 편입되었다. 1814년 파리 전투에서 마르몽 원수는 니폴레옹을 배신하였고,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졸지에 그의 작위 중 하나였던 라구사 공작에서 따온 ''ragusade''와 ''raguser''는 프랑스어로 각각 ''배반을 선언하다'', ''사기꾼''을 의미하게 된다.<s>졸지에 반란자가 되버린 라구사인들 지못미</s>


라구사 귀족들 또한 그들의 이념이나 행동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였다.
라구사 귀족들 또한 그들의 이념이나 정치적 견해에 차이를 두고 서로 대립하였다. ''1811년 칙령'' 44장에서 과거 상속법에 있었던 신탁 유증제도를 폐지하였는데,


==정부==
==정부==

2015년 10월 1일 (목) 07:59 판

틀:번역중 라틴어 : Respublica Ragusina


크로아티아 : Dubrovačka Republika


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Ragusa


한국어 : 라구사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1358~1808)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프랑스 제 1제국
이 세상에 모든 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유와는 바꾸지 않으리!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
— 라구사 공화국의 모토

라구사 공화국 또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현 크로아티아 최남단에 위치한 해양 공화국으로 1308년부터 1858년까지 존속해있었다. 15, 16세기에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1858년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나라 안에는 3만명, 도시 내에는 5000명이 살고 있었다.

어원

라구사 공화국의 초기 이름은 Communitas Ragusina인데 이는 라틴어로 라구사 지방정부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14세기 들어와서 Respublica Ragusina(라구사 공화국)로 변경되었다. 이탈리아어로는 Repubblica di Ragusa, 크로아티아어로는 Dubrovačka Republika라고 한다.

크로아티아어 이름인 두브로브니크는 오크 숲을 의미하는 dubrava에서 따왔다. '좋은 베니스'를 의미하는 터키어 Dobro-Venedik에서 따왔다는 민간 어원도 존재한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달마티아어 이름인 라구사는 그리스어로 절벽을 의미하는 Lausa에서 따왔으며, 후에 Rausium, Rhagusium, Ragusium, Rausia, Lavusa, Labusa, Raugia, Rachusa라고 불렀다가 마지막엔 Ragusa라고 불리게 된다. 도시의 정식 이름이 라구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변하게 된 것은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지역의 주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뀌였을 때로 추측된다.

영토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는 현재 달마티아[1] 남쪽의 조그만 영역에 그쳤으며 그 경계는 1426년에 완전히 형성된다. 주요 영토는 네움에서 프레블라카 반도에 이르었고, 이 외에도 펠레샷스 반도, 라스토보 섬, 믈렛 섬, 콜로솁 섬, 로푸드 섬, 시판 섬 등을 영토로 소유하고 있었다.

15세기에는 콜트술라, 브라치, 흐바르 8년간 영토로 두고 있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지역의 소귀족들이 저항 때문에 영토를 포기해야만 했다.

16세기 때에 행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영토는 라구사 시와 몇몇 카운티들(코나블레, 주파 두브로브니크, 슬라노, 스톤, 라스토보 섬, 믈렛 섬, 시판-콜로솁-로푸드 섬),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치안판사가 다스리는 선장령(領)(Captaincy)(차브바트, 오레빅, 야니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라스토보 섬과 믈렛 섬은 준자치지역으로 자기만의 정부를 두고 있었다.

역사

기원

라구사라는 도시는 대략 614년 경 슬라브 족과 아바르 족들에 의해 에피다우룸[2]이라는 로마인 도시가 파괴된 후 건설되었다. 이 침략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일부가 북쪽으로 25Km 정도를 올라가 해안 근처의 섬에 정착하였고, 그 도시는 곧 라우사가 되었다. 에피다우룸은 40여년 뒤에 슬라브 족의 2차 침공으로 완전히 파괴된다.

에피다우룸에서 온 난민들은 작은 섬[3]에서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도시를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두브로브니크라고 좁은 해협 건너편 해안에 도시를 지었다. 초창기에 이 두 정착지의 주민들은 서로를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정착지는 점차 더 가까워 졌으며, 12세기에는 두 도시들이 합쳐지게 된다. 이 두 정착지 사이에 있는 해협은 매워져서 오늘날 스트라둔이라고 불리며 도시의 중심지 역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라는 이름은 이 합쳐진 도시의 크로아티아어 이름이 된다.

한편 새로운 고고학 유물에 기조로 하여 만들어진 또다른 이론도 존재한다. 발굴된 성벽과 소예배당의 건설년도가 5세기로 밝혀짐과 동시에 과거에 있던 이론을 부셔버린 것이다. 그 예배당의 크기로 보아서 그 시기에도 충분히 큰 정착지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 새로운 이론은 에피다우룸의 파괴를 그리스 시기로 추측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항구의 유적 개발에서 대규모의 그리스식 건축물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Antun Ničetić은 그의 책 Povijest dubrovačke luke(두브로브니크 항구사)에서 라구사가 그리스인 항해자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주징하였다. 당시 그리스 선원들은 낮이 되면 83km~93km 가량을 항해하고, 밤이 되면 물을 보충하고 쉬기 위해 선박들을 해안가에 정박해 주었는데, 두 그리스인 정착지인 코르쿨라와 부드비에는 대략 176km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즉 중간에 기착지가 필요하였는데, 라구사는 이 두 도시 중간에 있으므로 이상적인 기착지라는 것이다.

초기

866년에는 사라센 해적들이 와서 15개월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비잔티움 제국이 약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라구사 공화국을 적이자 자기네들 영토로 편입되어야 할 곳으로 보아 948년 도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라구사의 시민들은 이 승리를 도시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블라시우스에게 바쳤다.

이 시기의 라구사는 아직 섬이었으며 주민들은 달마티아계 언어[4]를 사용하는 로마화된 일리리아인들로 구성되었다.

1050년 크로아티아의 왕 스테판 1세는 라구사의 국경을 북쪽으로 16km 확장시켜주었고, 덕분에 공화국은 옴블라 강의 수원을 획보하여 막대한 량의 민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스테판 1세는 그루츠 만을 영토로 주었는데, 이는 오늘닐 두브로브니크 시의 상업항 역활을 하고 있다.

12세기에 두브로브니크는 아랍 권의 유명한 지리학자 무하마드 알 이드리시의 저서에 크로아티아의 최남단 도시로써 언급되었다.

1191년, 라구사의 상인들은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 내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186년에는 세르비아, 1189년에는 보스니아 내에서 그러한 권리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반 쿨린의 문서는 보스니아 내에서 라구사 시민들이 갖는 권리를 정의한 문서로 라구사 시가 두로브니크로 언급된 최초의 공문서이다.

베네치아 통치기

1205년이 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 3차 십자군을 이끌고 엄연한 카톨릭을 믿는 지역이었던 달마티아 지방을 공격하였고, 라구사는 베네치아의 속국이 되어 밀랍, 가죽, 은 등을 바치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이 도시를 아드리아해 남부의 해군 중심지로 활용하였다. 자다르[5]와 달리 라구사는 동방 무역에서 베네치아와 큰 갈등을 겪지 않았고, 그 결과 독립국으로는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라구사에게 요구하는 공물의 량은 점차적으로 증가하였고, 이에 시민들의 분노 또한 증가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영토 또한 늘어나게 되는데 13세기 중반에는 라스트보 섬을 영토로 편입하였고, 1333년에는 세르비아로부터 펠리샷스 반도를, 1345년에는 믈렛 섬을 구매하였다. 1348년 1월에는 흑사병이 도시를 강타하였다.

베니스로부터의 독립과 공화국의 설립

1358년 자다르 조약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게 되었고, 라구사는 헝가리라요슈 1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1358년 7월 27일 헝가리의 비셰가르드에서 대주교 이반 사라카와 라요슈 1세 사이의 타협 결과로 라구사는 헝가리의 영토로 취급되나 헝가리의 왕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헝가리의 해군력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그 이해관계 또한 크게 겹치지 않았기 때문에 라구사는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1399년 라구사는 라구사 시와 펠레샷스 반도 사이의 프리모레라는 지역과 슬라노를 얻었다. 이후 이 지역을 두고 1403년 크로아티아랑 전쟁이 일어나게 되나, 크로아티아 군이 후퇴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1419년에서 1426년까지 주파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통치하였다.

15세기 초반에는 교회 개혁자이자 작가였던 라구사의 이반이 활동하였다.

오스만 제국 통치기

1458년 라구사 공화국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고, 또한 복종의 의미로 매년 11월 1일 이스탄불로 대사를 보내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1481년이 되자 라구사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공물 역시 12500두카트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니 라구사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독립국이었다. 라구사는 오스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정도에서 외국과 관계를 맺거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또한 공화국의 배는 공화국의 국기를 달고 항해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됨으로써 상인들은 제국 내부에까지 무역을 확장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을 대신해 아드리아해 교역을 담당했으며, 상인들은 제국 내에서 세금을 덜 받는 등의 권리를 얻었으며, 이 외에도 주요 도시에 치외법권이 보장되는 거류지를 설치할 수 있었다.

라구사 공화국의 배는 비 오스만 제국 선박이라먼 들어갈 수 없는 흑해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관세 또한 다른 외국 상인보다 적게 냈으며, 베네치아 상인들과 외교적 분쟁이 있었을 때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 또한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도 라구사를 매우 중요한 항구 중 하나로 여겼다. 피렌체를 출발해서 부르사[6]로 가는 화물 대부분이 라구사를 거쳐서 갔기 때문이었다. 피렌체에서 출발한 화물은 페사로, 파노, 안코나같이 아드리아해 서안의 항구에서 선박에 실린 뒤 라구사에 도착했으며, 거기서부터는 육상 루트를 따라 사라예보[7], 스코페[8]를 거친 뒤 에디르네[9]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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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스페인, 제노바와 함께 15세기 동지중해 무역에서 베네치아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가르가노의 풍부한 목재 덕분에 선박을 베네치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규모의 조선이 가능하였다.

쇠퇴기

포루투갈의 신항로 무역으로 인해 더 이상 향신료는 더 이상 지중해를 통해 들어오지 않았다. 게디가 신대륙의 발견은 지중해 무역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오게 되고, 이는 라구사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이 두 상인 공화국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다.

1497년 샤를 8세는 라구사의 상인들에게 프랑스 내에서 무역할 권리를 부여하였고, 1502년 루이 7세는 이 권리를 확인해주었다. 1600~1610년에는 서로의 도시에 대사를 파견하였으며, 몇몇 귀족들은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기도 하였다.

라구사의 운명은 오스만 제국과 크게 연결되어 있었다. 라구사랑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이집트-켈리컷-구자라트로 이어지는 동맹에 기술적인 면에서 지원해 주었으나 이들은 1509년 디우에서 포루투칼에게 크게 깨지고 만다.

1667년 4월 6일에는 라구사에서 지진이 일어나 5000명이 넘는 시민이 죽었고, 사망자 중에는 도시의 행정장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도시에 있던 공공 건물 중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스폰차 궁전과 행정장관의 궁전의 앞부분 뿐이었고, 이전의 고딕 양식의 건물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점차적으로 도시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복구되어갔다.

1677년에는 마린 카보가와 니콜라 부키츠 두 사람이 이스탄불에 도착해 라구사에 닥친 위협을 해결하고자 했다. 오스만 제국이 라구사 공화국을 합병하려 한 것이다. 마린은 외교관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얐으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던 카라 무스타파는 되려 그를 몇 년간 가두어 두었디. 1683년 카라 무스타파는 빈을 공격하던 중 죽었고, 이내 마린은 풀려나게 된다.

1684년 공화국은 1358년 비세가르드에서 맺었던 조약을 부활시킴에 따라 매년 500두캇을 바치는 것으로 헝가리, 즉 당시 헝가리의 왕을 겸임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속국이 되었다. 동시에 라구사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기도 하였으므로, 한 나라가 상호 간에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나라의 속국이(...) 된 것이다. 이후로 라구사는 달마티아 전역의 항구에 기항할 수 있게 되었다.

1683년에는 라구사인 프란체스코 지오반니 곤돌라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육군은 빈 외곽의 카흘렌베르크에서 오스만 튀르크 군을 무찔렀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10], 슬로바니아[11], 달마티아, 포돌리아를 승전국 합스부르크, 베네치아, 폴란드에게 할양해 주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기독교 유럽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라구사 국경에 인접한 내륙지방을 야금야금 집어먹더니 결국 국경을 완전히 포위하여 라구사 내륙 무역 루트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스만 제국은 해당 지역을 수복하였다. 카를로비츠 조약의 결과로 라구사의 가장 북쪽과 남쪽의 도시인 네움과 수토르니아[12]가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되는데, 덕분에 베네치아는 라구사를 더 이상 육로를 통해 공격할 수 없게 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1–48)과 7년 전쟁(1756–63)때에 라구사는 엄정중립을 유지하였다.

1783년[13] 라구사 원로원은 파리의 대사로부터 온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였는데, 미국은 라구사의 선박이 자기네 항구에 무료로 입항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처음 1년간은 라구사가 가장 번창한 시기였다. 공화국은 중립을 유지하였고, 덕분에 지중해 무역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륙대봉쇄는 라구사로써 돈을 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대륙대봉쇄로 인해 영국의 무역선은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에 항구를 통해 수출할 수 없게 되자 지중해의 살로니카[14]와 라구사를 통해서 수출한 것이다. 그러나 라구사 공화국은 극한으로 몰린 유럽의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비로운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는 다른 공화국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고,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운 나폴레옹 또한 이 작은 공화국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달마티아는 프랑스에게 할양되었고, 이는 라구사 공화국을 새로운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었다. 현재의 몬테네그로의 해안 지방에 코톨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는 당시 베네치아인이 소유하고 있던 도시였다. 이 곳을 점령하려고 한 프랑스는 아우스터리츠에서 군대 일부를 이 곳으로 전진시켰다.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던 러시아는 전열함 11척과 6000명의 군사를 보냈고, 몬테네그로 공작 역시 1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진해 왔다. 한편 프랑스군 원수 가브리엘 장 조세프 몰리토가 이끄는 프랑스군 5000명은 달마티아의 요새들을 큰 싸움없이 평화롭게 점령해갔다. 러시아는 이 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라구사가 달마티아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코톨로 가기 위해선 라구사를 들려야만 했고, 국경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라구사에서는 중립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긴 회의가 열렸다.

진퇴양난이었다. 원로원은 될 되로 되라는 식의 해결책 조차도 내놓지 못했다. 대다수는 러시아 군의 지원을 요청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아우스트러츠에서의 참패로 보아선 (최소한 라구사에겐) 러시아 군은 영 미덥지 못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당시 군사력과 야망 모두가 정점에 있던 나폴레옹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이었다. 결국 프랑스군을 불어들였으나, 이젠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이 라구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성전은 마치 훈족과 아바르족의 재림을 보는 듯 하였다. 몬테네그로 군의 장군과 장교들은 라구사의 배반에 분노하고 있었다. 몬테네그로군과 러시아군은 적 도시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유한 빌라들을 보았고, 라구사 공성전은 이러한 빌라들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라구사에 진입한 프랑스의 몰리토 장군은 오직 수백명의 군사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의 책략을 통해 수적 열세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라구사에 편지를 보내 계속해서 버틸 것을 명령하였고, 동시에 수가 많은 것처럼 꾸며서 진격하였다. 이에 속은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은 자기네 본거지로 후퇴하였다.

멸망

1800년이 되자 라구사 공화국은 8개 이상의 도시와 항구에 영사관을 짓는 등 꽤나 조직화된 영사 네트워크를 지니게 된다. 1806년에는 프랑스 제 1제국에게 항복하였고, 이에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이 공격하여 1달간의 공성전을 치루게 된다.[15]그 뒤 프랑스군이 등장해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을 쫓아냈다. 같은 해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이 라구사에 진입하였다. 1808년 마르몽 원수는 라구사 공화국을 폐지하였고,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16]에 편입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라구사 공작으로 선언했다. 1810년에는 리구사를 포함한 달마티아 전역이 프랑스 제국의 일리리아 주로 편입되었다. 1814년 파리 전투에서 마르몽 원수는 니폴레옹을 배신하였고,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졸지에 그의 작위 중 하나였던 라구사 공작에서 따온 ragusaderaguser는 프랑스어로 각각 배반을 선언하다, 사기꾼을 의미하게 된다.졸지에 반란자가 되버린 라구사인들 지못미

라구사 귀족들 또한 그들의 이념이나 정치적 견해에 차이를 두고 서로 대립하였다. 1811년 칙령 44장에서 과거 상속법에 있었던 신탁 유증제도를 폐지하였는데,

정부

귀족 간의 관계

인구

언어

문학

인종

화폐

도보시오

각주

  1. 아드리아해의 동쪽 연안
  2. 오늘날의 카브바트
  3. 반도라는 의견도 있다.
  4. 로망스어 중 하나
  5. 달마티아의 도시, 제 3차 십자군 이후 베네치아의 영토가 되었다.
  6.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 중 하나
  7. 세르비아의 수도
  8. 마케도니아의 수도
  9. 이스탄불 북쪽에 위치한 터키의 도시
  10. 현 헝가리 북부 지역
  11. 크로아티아 북동쪽 내륙지방
  12. 이후 이 두 도시들은 크로아티아의 땅이 아닌, 각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몬테네그로의 영토가 된다.
  13. 같은 해 미국이 독립하였다.
  14. 그리스의 항구도시
  15. 약 3000개가 넘는 대포알이 도시에 떨어졌다고...
  16. 이탈리아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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