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라비아에 위치한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국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간의 결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가 모두 참여해서 3제(三帝) 회전이라고도 한다.

오스트리아 전쟁을 종식시키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와해시킨 전투이며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동안 나폴레옹이 보여준 최고수준의 전술적 재능이 빛난 전투였다. 나폴레옹 본인이나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으며 그의 적들에게 대체 어떻게 해야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냐는 절망과 좌절을 남겨준 전투.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805년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원래 전략적 목표는 영국 상륙 후 런던을 점령하여 대프랑스 동맹의 맹주 역할을 하던 영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나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군에 쫓겨 카디프 만에 고립되면서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시작도 못해보고 대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기민하게도 즉시 새로운 전략적 목표를 수립했다. 즉, 대프랑스 동맹의 맹주는 영국이지만 실제 대륙에서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하는 건 오스트리아이니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동맹에서 이탈시키면 지상전에 제한이 큰 영국으로선 대프랑스 동맹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전격적인 오스트리아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은 단독으로 프랑스를 이기기 어렵다 판단하고, 동방의 강대국 러시아와 손잡고 프랑스와 그 동맹국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전격적인 기동으로 울름 전역에서 대참패, 오스트리아군 주력 4만이 궤멸되고 포로로 잡혀버렸다.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잔여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결국 나폴레옹은 무혈로 수도 빈을 함락시켰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잔여 병력과 함께 도망가서, 친정한 알렉산드로 1세의 러시아군과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 주력과 오스트리아군 잔여 전력을 박살내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걸을 깨달았고, 러시아군 역시 나폴레옹만 박살내면 프랑스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 판단했다.

전투 직전[편집 | 원본 편집]

사실 장거리 원정을 온 프랑스 입장에서는 단시간 내에 야전으로 대규모 결전을 벌여 승리하지 않으면 보급의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전투시점이 11~12월로 초겨울이었다. 그런데 홈그라운드라는 오스트리아도 자국군 주력이 궤멸당해서 전력 핵심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원정군인 러시아가 맡고 있었고, 아무리 오스트리아가 이들의 보급을 지원한다한들 한계에 있었다. 더군다나 수도 빈이 함락당해서 오스트리아는 자국령 내에서도 제대로 된 보급지원이 어려웠다.

이런 이유와, 그동안 나폴레옹에게 연전연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란츠 1세와 일부 오스트리아측 장군들은 요새에 들어가 농성하는 지연전을 제안했으나, 문제는 오스트리아군 병력 비중이 낮아서 발언권이 없었다는 것. 더군다나 러시아군에 대한 보급지원도 순탄치 않았고, 러시아측은 단기결전을 원했고 결국 러시아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부딪쳐서 나폴레옹의 전술적 천재성을 오스트리아의 허풍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고, 황제 알렉산드로 1세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측 지휘관들도 의견통일이 안 되어서 일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심리에 따라 결전론을 제창하여 러시아측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러시아가 결전을 희망한 것에는 이 외에도 프랑스군의 전력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부가 이끄는 3군단이 아직 전장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은 하늘이 주신 기회처럼 보였고, 다부의 3군단이 전장에 합류하기 전에 프랑스군을 신속히 격파해야 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다만 3군단의 합류는 전술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애당초 병력이 5천여 명에 지나지 않아, 다부의 군세가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한다는 계획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한편, 프랑스군도 전투 직전까지 휘하 장군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에게 전술적 불리함을 주장하며 철군할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 술트조아생 뮈라, 장 란 세 원수가 철수를 제안하기로 하고 대표로 장 란이 나폴레옹과 면담하여 철수를 제안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부했다. 나폴레옹으로선 울름 전역의 대승이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빛이 바래고 있고 프로이센이 참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대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다른 원수와 함께 철수를 제안하기로 한 술트는, 장 란의 뒤통수를 치며 나폴레옹의 결전 방침을 적극 지지하는 태도 변화를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장 란의 분노를 사 결투신청을 받아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다.

이때 프랑스 군의 전력 및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병력 5,500명 / 중포 24문
- 병력 13,000명 / 중포 24문
- 4,300명(이중 기병 830) / 중포 12문
- 23,600명 / 중포 35문
- 12,700명 / 중포 20문
- 5,700명
- 7,400명 / 중포 36문

이에 맞서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의사결정권은 사실상 러시아군, 특히 알렉산드로 1세에게 넘어가 있었다.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골레니시체프 쿠투조프는 일부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과 함께 결전 회피를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로 1세에게 반박당하고 자신의 막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결전의도를 숨기고자 사신을 보내 휴전을 제안하는 속임수를 쓰고 있었다.

한편, 연합군 지휘관들은 주전장 아우스터리츠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지인 프라첸 고지를 프랑스군이 선점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은 아니 그 나폴레옹이 저런 결정적 실수를?,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이걸 보라, 나폴레옹 명성 그거 다 허풍이다 이러면서 프랑스군이 범한 결정적 실수를 놓치지 않고 12월 1일 프라첸 고지를 선점했다.

그 시점에서 연합군 그 어느 누구도 프라첸 고지 선점이 패배를 결정짓는 일이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 전날인 12월 1일 오후 6시의 전장 배치도. 연합군 주력이 중앙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전투 전날인 12월 1일 오후 6시의 전장 배치도. 연합군 주력이 중앙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다.

전투 경과[편집 | 원본 편집]

12월 2일 오전 8시를 기해 운명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상대적으로 허술하다고 판단된 프랑스군 우익을 향해 집중공격을 퍼붓기로 했다. 프랑스군 우익이 포진하고 있던 텔니츠와 조콜니츠는 전투 초기 최대의 격전지였는데, 연합군은 병력을 일거에 집중시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 데다, 이들의 의도는 전투 시작 이전에 이미 나폴레옹이 읽어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콜니츠에 전투력으로는 근위대 다음가는 정예인 26경보병연대 및 코르시카/이탈리아 저격대를 투입하여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텔니츠에는 허겁지겁 달려온 다부의 3군단이 전투 초기에 합세하는데 성공하여 전투 내내 마을을 두고 뺏고 뺏기는 격전이 벌어졌다.

짧은 시간동안의 격전 끝에 프랑스군은 조콜니츠를 확실히 방어해내는데 성공했고, 목표로 했던 우익 돌파가 실패로 돌아가자 연합군은 예정된 대로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했다. 오전 8시 45분, 연합군의 주력이 계속 우익을 향해 맨땅에 헤딩하고 있어서 연합군의 중앙은 상당히 얇아진 상태였다.

그 순간, 나폴레옹은 술트를 불러 프라첸 고지를 가리키며 몇 분이면 기어올라가겠냐고 물었고 술트는 20분이면 충분하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만족한 나폴레옹은 술트에게 프라첸 고지 공격을 지시했다.

바로 이것이, 나폴레옹이 일부러 프라첸 고지를 연합군이 먹게끔 방치한 이유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프라첸 고지라는 전술적 거점을 확보하고도, 자신이 일부러 약하게 보인 우익에 병력을 집중시켜 프라첸 고지 방어가 약해질 것을 사전에 간파하고 있었고, 단숨에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여 전장 전체의 감제와 함께 연합군 진영의 중앙을 단 한 번에 돌파하는 전략을 구상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를 일컬어 단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은 끝났다(One sharp blow and the war is over)라고 자평했고, 이 평가는 매우 정확했다.

프라첸 고지를 지키고 있던 것은 러시아 군이었는데 이들은 안개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술트의 4군단 병력을 보고 경악해 마지않았다. 위의 프랑스군 전력표에서 보듯, 술트의 4군단은 프랑스군 군단급 부대 중 가장 병력과 화포가 많은 강력한 제대였다. 원래 프랑스군 우익 공격에 투입되기로 했다 작전미스로 투입이 지연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부대까지 달려와서 결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으나 술트의 맹공을 당해내지 못했고, 프라첸 고지는 프랑스군의 손에 떨어졌고 마침내 연합군 진영이 프랑스군에 의해 분단되었다.

Battle of Austerlitz - Situation at 0900, 2 December 1805.png

12월 2일 오전 9시의 전장배치도. 연합군 좌익의 공세는 저지되었고 전선 중앙의 프라첸 고지로 술트의 군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

나폴레옹은 전투의 마무리를 위해 제국근위대를 프라첸 고지로 전진시키고 아직 전선이 유지되고 있던 프랑스군 좌익(연합군 우익)에도 예비대였던 베르나도트의 1군단을 투입하여 공세를 개시했다. 러시아의 콘스탄틴 대공 역시 (러시아)제국근위대를 투입하여 베르나도트의 1군단에 맞서는 반격을 개시했으나 나폴레옹의 기민한 대응으로 프랑스군 중기병대가 일제히 투입되면서 무산되었다. 대규모 기병전과, 이를 뒷받침하는 프랑스군 포병대의 지원 속에 러시아 근위대는 패퇴하고 처절한 퇴각을 시작했다. 그보다 더 위쪽에선 뮈라와 란의 군대가 바그라티온이 이끄는 러시아 군을 격파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연합군은 전선이 분단당하고, 프랑스군 좌익에 투입한 핵심 러시아 제국근위대가 궤멸되어 패주하고 있었으며 우익에 투입한 주력도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로 지쳐 있었고 크게 소모된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프라첸 고지에 있던 술트의 4군단 일부, 그리고 다부의 3군단 병력 일부를 각각 차출하여 연합군 좌익에 대한 돌격을 감행했고, 패닉에 빠진 연합군 전 병력은 사실상 지휘계통이 무너져서 전 전선에 걸쳐서 처절한 도주를 시작했다. 제대로 된 퇴각도 아니고 도주였다. 그나마 부대를 수습해서 정상적인 퇴각을 지휘하려던 쿠트조프도 교전에 휩쓸려 부상을 입었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패닉에 빠져버렸다.

그 와중에 프랑스군 우익 공세에 투입되었다 마지막 돌격을 당한 연합군 좌익은 퇴로가 막혀 남쪽의 얼어붙은 사츠칸 호수를 통해 도망쳤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바라보다가 포병대에게 적병이 아닌 호수표면을 향해 포격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얼어붙은 얼음이 포격으로 깨지면서 도망치던 연합군 다수가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Battle of Austerlitz - Situation at 1400, 2 December 1805.png

12월 2일 오후 2시, 전투종결시점의 전장배치도. 전열을 유지한 연합군 부대는 전무하며 프랑스군의 거센 추격이 이어지고 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군은 총투입병력 72,000명 중 1,305명이 전사하고 6,940명이 부상을 당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총투입병력 85,000명 중 최소 15,000명 이상이 전사 내지 부상을 입었고 약 12,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보유하고 있던 120여 문의 중포를 모조리 노획당했다. 당장 가장 중요한 전리품으로 취급받는 군기만 해도 프랑스군은 1기를 잃었지만 대신 50기에 달하는 연합군 군기를 노획했다.

이런 수치상 결과 외에도 연합군은 잔존 병력을 거의 수습하지 못하여, 남은 병력으로 다시 한 번 싸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설령 병력을 수습했다 하더라도 중포를 모조리 빼앗기고 기병대가 궤멸당해서 사실상 보병만으로 싸워야 하는데 그랬다간 백전백패….

이는 연합군 지도부의 전쟁수행의지를 날려먹기에 충분했다. 프란츠 1세는 수도 빈과 주력부대까지 날려먹은 상태에서 러시아 군까지 패퇴하자 멘붕에 빠져버렸고, 나폴레옹을 과소평가하던 러시아군은 처음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대육군(그랑드아르메)을 상대하며 쓴맛을 보고 이후의 대 프랑스 군사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결국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화약을 맺어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모든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베네치아를 프랑스의 괴뢰국 이탈리아에 할양하며 4,000만 프랑을 배상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 돈으로 아우스터리츠 참전자들에게 인당 200프랑을 포상으로 뿌리고 유족과 부상자들에게도 연금과 위로금을 지급했다.

이로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촉발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유럽의 전통적 강대국으로 프랑스와 자웅을 겨루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러시아는 잔뜩 움츠러들었으며, 참전을 고려하던 프로이센은 즉시 군사를 거두고 침묵했다. 그리고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한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빛이 바래면서 내각이 교체되었다.

의의[편집 | 원본 편집]

후대 전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치른 수많은 전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전투로 아우스터리츠를 가장 많이 고른다. 그만큼 전술적으로 완벽하기 그지없는 전투인데, 전장지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며 적이 패배의 길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게 유도하는데 성공하고, 보병, 포병, 기병 3개의 군종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최고의 효율성을 보여주고, 휘하 원수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적재적소로 투입시키고, 완벽한 타이밍의 공격으로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완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만약 1815년의 나폴레옹이 이때와 똑같았다면 워털루 전투즘은 껌도 아닐 거라는 소리도 있다.(…)

진짜 흠잡을 곳이 없는 전투인데, 때문에 일부 전사가들은 오히려 여기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된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아우스터리츠에서 너무 완벽하게 이겨서, 나폴레옹이 ㅋㅋㅋ 나 절라 짱세네? 이제 그 누가 와도 나를 못이김 하는 생각에 빠져들어서 이후의 대외정책에서 외교보다는 군사적 해결책에만 매달리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명확한 확증은 없지만 이후 나폴레옹의 행보를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미디어[편집 | 원본 편집]

1960년작 영화 아우스터리츠가 바로 이 전투를 그리고 있다. 정확히는 영화의 전반부는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뒤이은 정치적 환경을, 후반부가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보여주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다루는 유일한 영화로 남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을 다루는 영화 중 워털루가 신나게 쪽박을 차면서 이후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화화는 거의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에피소드로 다뤄지는데, 이 소설을 영화화한 1967년소련 영화에서도 수만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가 동원되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했다. 다만, 이쪽은 전쟁영화가 아니라 그냥 소설을 영화화한 케이스.

일본하세가와 테츠야가 연재한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선 1권의 핵심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나폴레옹 토탈워에서는 역사적 전투 중 하나로 이 전투를 플레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