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봉일천 전투

개요

개성-문선-봉일천 전투는 국군 1사단(백선엽 대령)이 북한군 1, 6사단과 맞서 개성, 문산, 봉일천에서 전투를 벌인 것을 말한다. 1사단은 전쟁이 터지자 마자 방어하기 어려운 개성을 즉각적으로 포기하고 임진강 이남 문산에 부대를 이동 임진강을 방패로 삼아 적의 진군을 막아냈다. 1사단은 북한군 6사단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전선을 고착화시켰고, 북한군이 서울 서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방어해냈다. 하지만 7사단이 붕괴되어 전선이 붕괴되어 어쩔 수 없이 철수하게되었다.

철수과정에서 한강교가 조기 폭파당해 한강교를 통한 철수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백선엽은 한강을 도하하라 명령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중화기를 운송할 수 없게 되었고, 대부분의 중화기들을 파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사단 건제를 대부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서울방면 사단 중에서는 제일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군의 기습

6월 25일 개성과 연백, 고량포 지역으로 북한군의 기습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기습포격으로 인해 국군의 경계부대는 저항하지 못하고 분산되었다. 이에 사단장 백선엽은 즉시 13연대에게 주진지를 점령하게 하였고, 예비인 수색의 11연대를 임진강변에 투입하여 임진강선에서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12연대 3대대(이무중 소령) 11중대(한보석 중위) 좌일선에 배치하고, 10중대(조기백 중위)는 중앙에, 9중대(김두열 대위)는 우일선에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하도록 하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 04:30 11중대 3소대장 박규송 소위가 적의 기관총 소리에 일어나 즉각 각 분대장에게 전방경계를 강화토록 지시하였다. 얼마 후 총성소리가 멎어지고 확성기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북한군의 선전방송이었다.

축약하자면 "개성과 의정부는 떨어졌고, 니들도 포위됬으니 손들고 투항해라"였다.

그러나 3소대장은 가볍게 씹고 적과 교전을 하였으나 숫자가 부족하여 큰 피해를 입고 07:30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다. 철수한 이후 11중대장은 3소대에게 다시 병력을 수습하여 대대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출동하라 명령했고, 그 명령에 연안으로 가던 중 3소대는 화기소대와 만나게 되었다. 화기소대는 비봉산의 적으로부터 엄청난 총탄세례를 맞아 철수하던 중이었다. 이에 3소대도 화기소대와 함께 중대 본부로 복귀하였다.

11중대는 병력을 수습한 다음 용정리로 철수하였다.

10중대는 전방의 207, 209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지만 북한군의 포격과 막대한 병력의 공세로 인해 그곳을 넘겨주어야 했다.

9중대의 경우 25일 03:00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로부터 대규모 차량을 확인하였고, 04:30 제2소대는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9중대는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공세에 철수하였다.

날이 밝을무렵 9중대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내용을 축약하자면 "이미 국군은 졌고 인민군이 이겼으니 항복하자"였다. 당연히 9중대장은 가볍게 씹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자 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9중대를 강화도로 철수하라 명령을 하달했다.

연안의 3대대 본부와 10중대는 이날 새벽 적침보고에 따라 비상령을 하달하고, 연안서와 협조 사이렌을 울려 영외 거주 장병, 외출 방병, 그리고 비번 근무중인 경찰까지 빠른 시간 내에 소집할 수 있게 되었다. 병력을 수습한 이후 10중대 1소대와 화기소대가 05:00 전방으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방에 도착하자 이미 2소대와 3소대는 와해된 상태였다.

3대대장은 민관의 철수를 위해 비봉산을 장악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북한군에 의해 이미 비봉산이 점령된 상태였다. 이에 10:00 대대는 철수하게 되었다. 대대는 13:00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여 이후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개성의 경우 12연대(전성호 대령)가 담당하고 있었다.

임진강 방어선 구축

봉일천 전투

철수 작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