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역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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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서부지역 작전
군사 충돌 정보
북한의 기습남침
날짜 1950년 6월 25일 ~ 28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북한 대한민국
김웅 중장
김재욱 소장
유신 소장
최광 소장
방호산 소장
최현 소장
최율석 대좌
백선엽 대령
백인엽 대령
병력:
29,000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서부지역 작전은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전투다.

옹진방면의 국군 제17연대 정면으로 북한군 제3경비여단과 제6사단 제1연대가 공격했고, 제17연대는 열세의 병력과 불리한 지형에서 싸웠으나 결국 방어지대가 양분되었다. 제17연대는 철수명령에 따라 부포항과 사곶항을 통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개성, 고랑포 방면의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제1군단 제1, 제6사단과 제203전차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우며 진공함과 동시 국군의 후방을 차단하기 시작하자 국군 제1사단은 부대를 재정비하여 한강을 도하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부대들은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과 싸웠으며, 북한의 주력이 도착하자 김포로 물러나 방어작전을 펼쳤다.

국군은 전 전선에서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으나 UN군이 조기 참전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성공했다.

전투전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북한군[편집 | 원본 편집]

북한 제1군단은 서울 점령을 위해 제3보병사단과 제4보병사단을 제105전차여단의 지원 하에 서울 북쪽을 공격하게 하고, 제6보병사단을 금천-개성으로, 제1보병사단을 제203전차연대와 함께 구화리-고랑포-문산으로 투입해 공격하도록 했다. 동시에 제6보병사단 제1연대와 38경비 제3경비여단은 옹진반도의 공격을 준비했다. 모든 부대의 배치는 훈련을 가장해 6월 10일부터 23일 사이에 완료되었다.

제3경비여단은 공격개시 당일 예하 7개 대대를 이용해 옹진-연안반도의 6개 목표를 각개 돌파하며, 동시에 제6보병사단 예하 제1연대가 강령으로 진출해 국군 제17연대를 양분할 계획을 세웠다. 옹진반도의 점령은 26일 완료될 예정이었다.

제6보병사단은 첫날 전면의 국군을 격파해 개성을 장악하고 다음날 김포-영등포로 나아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목표를 세웠다.

제1보병사단은 고랑포-장단-문산을 돌파, 제203전차연대와 협조해 문산에서 서울 서측방면으로 진출, 국군의 퇴로 차단이 임무였다.

제203전차연대는 군단장의 직접 통제하에 운용되는 부대로, 제6사단이 개성을 장악하면 1번 도로를 따라 문산으로 이동하고, 문산에서 제1사단과 합류해 서울을 장악하는 속공전을 띄었다. 연대의 1개 대대는 동두천의 제4보병사단에 배치되었다.

한국군[편집 | 원본 편집]

옹진반도를 담당한 제17연대의 경계는 45km로 통상 사단의 10km에 비해 4.5배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연대는 지형적 특성으로 종심 방어를 할 수 없는 관계로 담당 위치에 벙커를 구축하게 하였고, 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군기를 강화하고 민간인으로부터 징발한 각종 시설을 환원시켜 주민의 신뢰도를 높혔다.[1] 또한 내전 세력다툼을 일삼은 준군사조직 단체들를 단일체제로 통합해 향토방위대라 명명, 군에서 단기교육을 받게 하였다.

옹진반도는 육지와 차단되어 해로에 의존하였으며 그에 따라 육군본부의 방어계획도 북한의 전면 공격시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해상으로 철수하는 것이었다. 연대장은 주민들에게 철수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용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철수시킬 계획을 세웠다.

연대장은 북한의 움직임에 경계를 강화하고 병력의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육군본부는 되려 장병들에게 외출을 시키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연대장은 육군본부의 명령을 씹고 계속 경계태세를 유지하였지만 마침 방문한 UN 한국위원단에서 긴장감 조성으로 전투를 유발하지 말라는 명령에 할 말을 잃었슴다 불가피하게 비상조치를 해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서울의 중요한 관문을 지키고 있었으며 4월 20일 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작전지역의 특징과 가용병력, 적정 등을 고려한 결과 94km에 이르는 면적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 정규전에 대비한 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북한군의 주공이 문산-봉일천-서울로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 사단장은 3선 개념에 의한 종심 방어지대를 편성하였다. 유사시 청단, 백천, 개성을 포함한 지역을 포기한다는 계획이었으며 채병덕 총참모장의 재가를 받았다.

제1사단은 사단장의 계획에 따라 5월부터 6월까지 진지공사를 실시하였지만 장벽자재 부족으로 철조망과 지뢰 매설은 하지 못한 대신 임진강 철교 폭파 계획은 문제 없이 준비시켰다. 하지만 사단장이 보병학교 고급지휘관과정에 입교명령을 받아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에게 대행하게 하고 사단을 떠났는데, 23일에 실시된 영외조치로 사단 병력의 1/3이 외출을 하였고 사단장 대리를 포함한 많은 고급 지휘관들이 육군회관 낙성식에 초대되어 자리를 비웠다.

주요전투[편집 | 원본 편집]

결과와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그 덕에 주민들이 진지공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심지어 북한군의 방해와 사격으로 수 명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끝까지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