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홍천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15번째 줄: 15번째 줄:
|교전국2 = 대한민국
|교전국2 = 대한민국
|지휘관1 = 김창덕 소장<br>조관 총좌<br>백정덕 대좌<br>김봉문 대좌<br> 왕휘 대좌<br>차균섭 대좌<br>전우 소장<br>지병학 총좌<br>최학훈 대좌<br>황동화 대좌<br>손응삼 대좌
|지휘관1 = 김창덕 소장<br>조관 총좌<br>백정덕 대좌<br>김봉문 대좌<br> 왕휘 대좌<br>차균섭 대좌<br>전우 소장<br>지병학 총좌<br>최학훈 대좌<br>황동화 대좌<br>손응삼 대좌
|지휘관2 = 김종오 대령<br>함병선 대령
|지휘관2 = 김종오 대령<br>함병선 대령<br>민병권 대령
|군대1 =
|군대1 =
제2군단
제2군단
26번째 줄: 26번째 줄:
제6사단
제6사단
* 제2연대
* 제2연대
* 제19연대
|병력1=  
|병력1=  
|병력2 =  
|병력2 =  

2015년 7월 26일 (일) 15:00 판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30일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김창덕 소장
조관 총좌
백정덕 대좌
김봉문 대좌
왕휘 대좌
차균섭 대좌
전우 소장
지병학 총좌
최학훈 대좌
황동화 대좌
손응삼 대좌
김종오 대령
함병선 대령
민병권 대령

개요

인제-홍천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국군 제6사단 제2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제12보병사단과 벌인 전투다.

북한군 제2군단의 주공사단인 제12사단은 2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투입해 홍천을 점령하고 여주 방면으로 진격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이었으며 제5사단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 제2연대는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 수안보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전투전 상황

북한군

제12사단은 홍천 공격을 위해 원산에서 출발, 6월 23일 인제 인근에 배치를 완료했다. 사단 예하 좌익 제32연대는 응봉산-부소현의 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고, 우익 제30연대가 계명산-하수내리 방어선을 돌파해 어론리로 우회해 퇴로 차단을 계획했다. 고속기동부대인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제12사단이 방어선을 돌파하면 이를 후속하고 다음 날 홍천에 투입되어 수원 방면으로 진격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제12사단엔 제5보병사단의 포병연대가 배속되어 화력이 증강되었다.

한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사단 우일선 부대로, 옹진의 은파산 전투를 치른 뒤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편입된 제8연대와 교대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다. 제1, 제3대대를 전방에 배치한 후 23일이 되어서야 제2대대가 합류해 정황이 없었으나 본래 제8연대에 속했던 부속 부대들이 제2연대로 들어와 연대장을 도와주었다.

갑작스런 부대 이동에 의한 혼란에도 진지 보수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제2연대와 제8연대의 교대를 알아차린 북한군은 대남방송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대병력의 이동이 관측되었다. 연대장은 병력의 움직임과 전차 소리가 들린다는 전방부대의 보고와 무장공비 침투[1] 등 전운이 감돌자 23일 육군본부의 병력 외출 명령을 가볍게 씹고 무시하고 외출금지 명령과 함께 계속 방어를 보강하였다.

전투

홍천 동북지구 전투

6월 25일

04:00 북한군의 포격이 30분동안 진행되었고, 포격이 끝나자 국군 제6사단의 우전방인 제2연대 지역으로 북한군 제12사단 2개 연대가 제2연대의 정면을 공격을 시작했다. 제12사단 제32연대가 제2연대 제1대대 제1중대로, 제30연대가 제1대대 제2중대로 향했다.

05:30 북한군 제32연대가 음양리와 막장골로 침공을 개시했다.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은 신풍리의 600고지와 상수내리 사이의 도로를 이용해 침입했다. 제32연대는 안개가 짙음을 이용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제1대대 제1중대 제2소대가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1차 공격을 실패한 북한군이 포격을 시작한 뒤 다시 도하하자 제2소대는 어론리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30연대가 국군 제2중대의 서쪽인 막장골을 돌파해 상수내리로 우회하자 제1대대는 차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06:00까지 현 위치를 고수한 제1대대는 06:20에 철수를 시작했다.

국군 제2연대장은 전방과 교신이 두절되자 신남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사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연대장은 철수 병력을 통제하고 제1대대를 558고지에, 제2대대를 좌측의 402고지에 배치하였다. 어느정도 낙오병이 복귀하자 10:00에 지휘소를 자은리로 이동시켰다.

제2연대장에게 북한군 침공 보고를 받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2연대장에게 현지를 사수하고 제3대대를 어론으로 진출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제16포병대대의 1개 중대에게 제2연대를 지원하라고 하였다.

11:50 제1대대는 1개 연대와 자주포를 상대로 싸웠으며 북한군은 자주포 2대가 파괴되자 후퇴하였다. 제1대대는 계속해 공격과 방어를 반복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12:30 철수, 자은리에 집결하였다. 이후 제1대대는 828-560고지와 402-454고지에 배치되었다.

6월 26일

04:00 전날 어론리까지 진출한 북한군 제12사단 제30연대와 제32연대는 홍천을 향해 이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함병선 대령의 반격계획에 따라 고지 탈취를 위해 진격중인 제2연대 제1, 제2대대와 맞붙게 되었다. 두 대대는 북한군의 선공을 받고 고전하였지만 분투하였는데 11:30 북한군이 양 대대의 사이를 뚫고 침공하자 연대장이 각 대대장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였다.

13:00 사단 참모장 고시복 중령이 연대장에게 홍천으로 철수하여 방어를 하라는 전화를 받자 연대장은 제1대대장의 항변을 물리고 철수를 지시하였다. 철수 과정에서 제1대대장과 작전주임이 요충지인 한계리의 점령을 건의하였고 14:00 철수를 시작하였다.[2] 그러나 연대의 철수를 감지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자주포 5대와 함께 공격을 시작하여 피해를 입었다.

연대장은 한계리에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하였으며 15:00 북한군이 골짜기를 돌아 나오자 매복해 격퇴하였다. 17:00 연대의 재편성이 완료되자 우일선 제1대대가 230-330고지를 점령하고 좌일선 제2대대가 371-293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강화하였다.

6월 27일

현리지구 전투

결과

각주

  1. 붙잡은 포로는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8월 15일에 완전 해방된다고 진술하였으며 국군의 배치상황이 포함 된 상황도를 가지고 있었다.
  2. 한계리는 차 한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아 방어에 용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