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 베르더 브레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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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16세 학생서클에 의해 FV 베르더 1899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는데 베르더라는 이름은 클럽이 훈련과 경기를 치르던 슈타트베르더라는 지역에서 따왔다.<ref>베르더는 하중도(河中島)나 침수지역을 의미하며 슈타트베르더는 베저강에 위치한 하중도처럼 생긴 반도다. 현재 사용하는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도 베저강 연안인 페터스베르더에 있다.</ref> SV가 아니라 FV인 건 오직 축구만 취급하는 클럽이었기 때문인데 남성만 가입이 허용됐고, 그 자격도 까다로웠다. 그러다가 [[1차대전]]이 끝난 뒤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취급하며 지금과 같은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바뀌었다.<ref>유럽에는 이렇게 축구를 중심으로 여러 스포츠팀을 운영하는 클럽들이 많다. 단지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게 축구인 만큼 우리가 축구팀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ref>
[[1899년]]에 16세 학생서클에 의해 FV 베르더 1899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는데 베르더라는 이름은 클럽이 훈련과 경기를 치르던 슈타트베르더라는 지역에서 따왔다.<ref>베르더는 하중도(河中島)나 침수지역을 의미하며 슈타트베르더는 베저강에 위치한 하중도처럼 생긴 반도다. 현재 사용하는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도 베저강 연안인 페터스베르더에 있다.</ref> SV가 아니라 FV인 건 오직 축구만 취급하는 클럽이었기 때문인데 남성만 가입이 허용됐고, 그 자격도 까다로웠다. 그러다가 [[1차대전]]이 끝난 뒤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취급하며 지금과 같은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바뀌었다.<ref>유럽에는 이렇게 축구를 중심으로 여러 스포츠팀을 운영하는 클럽들이 많다. 단지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게 축구인 만큼 우리가 축구팀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ref>


[[나치]]가 집권하면서 가우리가 체제가 등장했고, 베르더 브레멘은 몇 차례 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축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반대로 오욕의 시대이기도 한데 당연하게도 나치와의 관계 때문이다. 다른 주요 클럽이 겪었던 것처럼 베르더 브레멘은 좋은 성적 때문에 나치의 관심을 끌어 정치적 선전대상이나 군사교육에 동원되었고, 홈구장인 브레머 캄프반(現 베저슈타디온)은 나치의 행사 장소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일찌감치 퇴출되었고 클럽은 나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가우리가 체제가 등장했고, 베르더 브레멘은 몇 차례 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축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반대로 오욕의 시대이기도 한데 당연하게도 나치와의 관계 때문이다. 베르더 브레멘은 나치의 정치적 선전과 군사교육에 동원되었고, 홈구장인 브레머 캄프반<ref>現 베저슈타디온</ref>은 나치의 행사장으로 쓰였다. 1934년에 유대인들이 쫓겨났고 클럽은 나치의 대표적인 꼭두각시로 자리잡았다.<ref>2008년에 이 시기에 쫓겨났던 유대인 축구선수들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ref> 보다 끔찍한 것은 이러한 타락이 나치의 폭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단의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점이다. 특히 1934년부터 1936년까지 회장이었던 빌리 슈퇴버는 열렬한 나치의 신봉자여서 구단 관계자들을 전부 나치에 입당시켰고 구단을 나치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다. 이 시기의 많은 클럽들이 유사한 일을 겪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의 씻을 수 없는 수치다.<ref>그러나 구단에서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어물쩡 넘어가고 있다.</ref>


=== 오버리가 시대(1946-1963) ===
=== 오버리가 시대(1946-1963) ===
다른 팀들처럼 [[2차대전]]이 끝나고 클럽이 잠시 해체되었다가 1946년에 이름을 되찾고 부활했다.<ref>재창단 과정에서 Grün-Weiß(초록-하양)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구단의 상징색으로 응원가에도 쓰이는 별명이다.</ref> 이후 오버리가 북부지구에 속하게 됐고 점차 성장하여 독일 내에서 손꼽힐 정도의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끝내 우승은 하지 못하고 제대로 [[콩라인]]을 탔는데 북독더비 라이벌인 [[함부르거 SV|함부르크]]가 16시즌 중 15시즌을 우승해버렸기 때문. <s>[[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햄버거를 죽입시다 햄버거는 나의 원수]]</s> 덕분에 오버리가 마지막 5시즌 동안 내리 준우승을 했다. 그래도 1960/61시즌에 [[DFB-포칼]]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는 8강에 진출했다.<ref>우승팀 [[AT 마드리드]]에게 졌다.</ref> 이 시기에 얻은 별명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강팀에게 강하고 약팀에게 약하다는 의미에서 붙은 '북부의 스핑크스'고, 다른 하나는 선수들이 미국 담배회사의 공장에서 일해서 생긴 '텍사스-엘프(텍사스 일레븐)'이다.<ref>당시의 독일클럽들은 세미프로에 가까웠다. 급료상한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부업을 뛰었고, 아예 별명까지 얻은 선수들도 있다.</ref>
다른 팀들처럼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나고 클럽이 잠시 해체되었다가 1946년에 이름을 되찾고 부활했다.<ref>재창단 과정에서 Grün-Weiß(초록-하양)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구단의 상징색으로 응원가에도 쓰이는 별명이다.</ref> 이후 오버리가 북부지구에 속하게 됐고 점차 성장하여 독일 내에서 손꼽힐 정도의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끝내 우승은 하지 못하고 제대로 [[콩라인]]을 탔는데 북독더비 라이벌인 [[함부르거 SV|함부르크]]가 16시즌 중 15시즌을 우승해버렸기 때문. <s>[[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햄버거를 죽입시다 햄버거는 나의 원수]]</s> 덕분에 오버리가 마지막 5시즌 동안 내리 준우승을 했다. 그래도 1960/61시즌에 [[DFB-포칼]]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는 8강에 진출했다.<ref>우승팀 [[AT 마드리드]]에게 졌다.</ref> 이 시기에 얻은 별명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강팀에게 강하고 약팀에게 약하다는 의미에서 붙은 '북부의 스핑크스'고, 다른 하나는 선수들이 미국 담배회사의 공장에서 일해서 생긴 '텍사스-엘프(텍사스 일레븐)'이다.<ref>당시의 독일클럽들은 세미프로에 가까웠다. 급료상한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부업을 뛰었고, 아예 별명까지 얻은 선수들도 있다.</ref>


=== 분데스리가의 개막과 첫 우승(1964-1971) ===
=== 분데스리가의 개막과 첫 우승(1964-1971) ===

2015년 7월 14일 (화) 22:39 판

틀:축구구단 정보

개요

SV 베르더 브레멘은 독일 브레멘에 연고를 둔 축구단이다. 원칙상으로는 독일의 다른 구단처럼 베르더 브레멘이라는 긴 이름으로 불러야 하지만 귀찮아서 짧은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언론에서 자주 쓰는 별명으로 베르더, 브레머(Bremer)가 있으며 브레멘으로도 많이 표기하니 그냥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 귀찮으니까 브레멘으로 통일하자 이니셜은 SportVerein Werder의 줄임말인 SVW(에스파우베)를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피쉬쾨페(Fischköpfe)라고도 불리는데 이건 생선머리라는 의미로 남부에서 북부의 해안도시 사람들을 조롱하는 멸칭이 축구팀에게도 붙은 것. 그니까 까고 싶을 때 쓰면 된다

역사

창단 이후 2차대전까지(1899-1945)

1899년에 16세 학생서클에 의해 FV 베르더 1899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는데 베르더라는 이름은 클럽이 훈련과 경기를 치르던 슈타트베르더라는 지역에서 따왔다.[1] SV가 아니라 FV인 건 오직 축구만 취급하는 클럽이었기 때문인데 남성만 가입이 허용됐고, 그 자격도 까다로웠다. 그러다가 1차대전이 끝난 뒤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취급하며 지금과 같은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바뀌었다.[2]

나치가 집권하면서 가우리가 체제가 등장했고, 베르더 브레멘은 몇 차례 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축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반대로 오욕의 시대이기도 한데 당연하게도 나치와의 관계 때문이다. 베르더 브레멘은 나치의 정치적 선전과 군사교육에 동원되었고, 홈구장인 브레머 캄프반[3]은 나치의 행사장으로 쓰였다. 1934년에 유대인들이 쫓겨났고 클럽은 나치의 대표적인 꼭두각시로 자리잡았다.[4] 보다 끔찍한 것은 이러한 타락이 나치의 폭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단의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점이다. 특히 1934년부터 1936년까지 회장이었던 빌리 슈퇴버는 열렬한 나치의 신봉자여서 구단 관계자들을 전부 나치에 입당시켰고 구단을 나치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다. 이 시기의 많은 클럽들이 유사한 일을 겪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의 씻을 수 없는 수치다.[5]

오버리가 시대(1946-1963)

다른 팀들처럼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나고 클럽이 잠시 해체되었다가 1946년에 이름을 되찾고 부활했다.[6] 이후 오버리가 북부지구에 속하게 됐고 점차 성장하여 독일 내에서 손꼽힐 정도의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끝내 우승은 하지 못하고 제대로 콩라인을 탔는데 북독더비 라이벌인 함부르크가 16시즌 중 15시즌을 우승해버렸기 때문. 햄버거를 죽입시다 햄버거는 나의 원수 덕분에 오버리가 마지막 5시즌 동안 내리 준우승을 했다. 그래도 1960/61시즌에 DFB-포칼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는 8강에 진출했다.[7] 이 시기에 얻은 별명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강팀에게 강하고 약팀에게 약하다는 의미에서 붙은 '북부의 스핑크스'고, 다른 하나는 선수들이 미국 담배회사의 공장에서 일해서 생긴 '텍사스-엘프(텍사스 일레븐)'이다.[8]

분데스리가의 개막과 첫 우승(1964-1971)

우승은 못했다지만 북부지구의 강팀이었기에 여유있게 분데스리가 창립회원이 될 수 있었고, 2번째 시즌에 우승팀이 되는 대형사고를 친다. 북부의 강호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북부에서의 얘기고 이 시기에는 서부와 남부의 클럽들이 강세를 보였기 때문에 북독의 맹주 함부르크도 아니고 브레멘이 우승을 차지한 건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독일 챔피언이 된 건 클럽 역사상 최초였고, 마침 이때가 브레멘시 1000주년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주전 하나 없던 브레멘이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탄탄한 수비력이었고, 특히 클럽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호어스터-디터 회트게스가 바로 이때부터 브레멘에서 뛰었다.

다음시즌 리그 4위를 기록했고 유러피언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다.[9] 그러나 그 뒤로 팀은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리그 16위로 추락했다가 준우승팀이 되었다가 다시 9위로 떨어졌고 더이상 중위권에서 올라오지 못하면서 우승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팀을 이끌어온 주축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무너진 백만장자(1971-1981)

연달아 중위권에 머무르자 수뇌진은 돈을 퍼부어 스타플레이어를 수집하는 방법으로 상위권 재도약을 노렸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이적료 제한이 폐지된 덕분에 마음놓고 돈을 썼고, 백만장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클럽의 재정이 넉넉한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썼기 때문에 금방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얼마 가지 못해 전략을 포기해야 했다. 더 문제는 이렇게 끌어들인 선수들도 계획적으로 영입한 게 아니라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데려온 거라서 제대로 써먹지 못했고, 감독이 줄줄이 잘려나가는 가운데 성적이 좋아지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했다. 지지부진한 성적에 재정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팀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1979/80시즌에 강등당하고 만다. 이름높은 감독이던 쿠노 클뢰처의 지휘 아래 2부리그에서 순항하며 1년만에 손쉽게 복귀하는 듯 했으나 클뢰처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결국 감독이 바뀌게 된다.

레하겔의 시대(1981-1995)

새 감독은 이미 몇 년 전에 잠시 지휘봉을 잡았다가 물러난 오토 레하겔이었다. 1978년에 분데스리가 기록인 0:12의 패배를 당하며 Torhagel(골폭풍)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이후에도 인상적인 지휘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10][11] 그러나 이런 과거를 뒤로 하고 레하겔은 찬란한 황금기를 열었다. 클뢰처의 뒤를 이어 2부리그에서 우승했고, 부정적이던 세간의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1부리그에 복귀하자마자 팀을 5위에 올려놨다. 준우승을 차지했던 1967/68시즌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독일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시즌 브레멘은 15년만에 2위를 기록했고 특히 골득실 때문에 밀려난 아까운 준우승이었다. 이후 브레멘은 매시즌마다 우승을 다투는 독일의 강호로 자리잡았으며 이때부터 바이에른 뮌헨의 강력한 라이벌로 자리잡았다. 1984/85시즌과 1985/86시즌 연속으로 바이언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쳤으며, 특히 시즌 내내 1위를 하다가 마지막 경기에서 뒤집힌 1985/86시즌은 뼈아픈 경험이었다.[12][13]

그렇다고 언제까지 준우승만 하란 법은 없었다. 샬케레버쿠젠은 잊자 1987/88시즌에 그토록 고대하던 마이스터를 차지했으며, 23년만에 거둔 2번째 우승이었다.[14] 비록 이 우승 이후 리그 성적이 들쑥날쑥해지지만 그래도 꾸준히 우승경쟁에 참여했고 1988/89시즌부터 3연속 포칼 결승진출이라는 기록도 세웠다.[15] 유럽 클럽대항전에서도 어느 정도 성적을 거두기 시작해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나폴리를 도합 8:3으로 이기기도 했으며, 1991/92시즌에는 컵위너스컵에서 클럽의 유일한 유럽대회 트로피를 차지했다.[16] 최종적으로 레하겔의 지휘 아래 브레멘은 2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준우승, 2번의 포칼 우승과 2번의 준우승, 그리고 1번의 유럽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준우승이 더 많잖아? 클럽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루디 푈러, 브루노 페차이, 카를-하인츠 리들레, 안드레아스 헤어초크, 루네 브라체트 같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스타플레이어를 비롯하여 디터 아일츠, 노어베르트 마이어, 미르코 보타바, 프랑크 노이바르트, 토마스 볼터, 마르코 보데, 윈턴 루퍼, 올리버 렉, 요니 오텐, 그리고 토마스 샤프까지 수많은 클럽의 레전드들이 브레멘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포스트 레하겔(1995-1999)

샤프-알로프스 체제(1999-2012)

브레멘, 약팀이 되다

[17] 2008년, 브레멘은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을 개축하기로 했다. 태양광 조명, 관중석 규모 5만으로 확장 등을 목표로 했고, 비용은 최대 5,000만 유로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내 철강 가격의 폭등으로(...) 비용이 거의 20%나 상승해버려, 결국 좌석 수를 42,500석으로 타협보아야 했다. 결국 공사비는 공사비대로 내고, 기대 수익은 별로 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 시점부터 브레멘의 영입이 계속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알루디아라나, 리오 마부바처럼 팀이 필요로 하던 선수는 영입에 실패하고, 무려 마리오 만주키치에딘 제코 또한 영입 계획을 무산시켰으며, 에이스 메수트 외질이 나가고 들어온 것은 불화로 팀을 떠나버린 웨슬리와 아르나우토비치 뿐이었다.

물론 다른 팀들도 다 겪는(?), 보드진의 비리로 인한 보드진 교체나, 유망주 영입 실패, 중요한 순간 치명적인 부상 등 갖은 악재까지 겹쳤다. 거기에 고질적인 문제로 자기 팀 유망주가 다른 팀 가서 포텐이 팡팡 터지기까지...

덕분에 08-09시즌만 해도 포칼[18]과 유로파를 동시에 석권하던 강팀이 10-11시즌엔 분데스리가 13위까지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스토리다.

성적

총 4차례의 분데스리가 우승 중 마지막은 2003-04 시즌, 준우승은 05-06, 07-08시즌이다. DFB 포칼 우승은 총 6차례를 기록했는데, 2008-09 시즌이 가장 최근이다. 참고로 이 08-09 시즌에는 UEFA 유로파 리그/UEFA 컵도 우승하면서 더블(?)도 달성했다.

하지만 이후 외질 등 주축 선수들이 빠져나가고 재정난을 겪는 등 문제로 성적이 급강하했다. 09-10 시즌 분데스리가 3위를 기록한 팀이 10-11시즌을 13위로 마무리하더니(...) 11-12시즌 9위, 12-13시즌과 13-14시즌 12위, 14-15시즌 10위를 기록하며 기세가 영 좋지 않다.

출신 선수

2000년대 이후로 활약한 선수들 중 유명한 선수를 꼽자면 미로슬라프 클로제, 메수트 외질페어 메르테자커, 토르스텐 프링스가 있다. 참고로 외질과 메르테자커는 2015년 시점에서 아스날 FC의 동료로 활약 중이다(...). 왜 거기에 가 있니... 그 외에 바이에른 뮌헨에서 뮌헨의 밤문화(...)를 만끽하고 계신 클라우디오 피사로, 한국의 이동국도 브레멘에서 뛴 적이 있다.

스쿼드

15-16시즌

틀:축구단 선수 명단/시작 |- | 1 | 라파엘 볼프 | Raphael Wolf | 골키퍼 | 독일 | 1988년 6월 6일 | style="text-align:left;" | |- | 2 | 산티아고 가르시아 | Santiago García | 수비수 | 아르헨티나 | 1988년 7월 8일 | style="text-align:left;" | |- | 3 | 루카 칼디롤라 | Luca Caldirola | 수비수 | 이탈리아 | 1991년 5월 1일 | style="text-align:left;" | |- | 4 | 알레한드로 갈베스 | Álex Gálvez | 수비수 | 스페인 | 1989년 6월 6일 | style="text-align:left;" | |- | 5 | 아사니 루키먀 | Assani Lukimya | 수비수 | 콩고민주공화국 | 1986년 1월 25일 | style="text-align:left;" | |- | 6 | 체드릭 마키아디 | Cédric Makiadi | 미드필더 | 콩고민주공화국 | 1984년 2월 23일 | style="text-align:left;" | |- | 7 | 야닉 베스터가르드 | Jannik Vestergaard | 수비수 | 덴마크 | 1992년 8월 3일 | style="text-align:left;" | |- | 8 | 클레멘스 프리츠 (주장) | Clemens Fritz | 수비수 | 독일 | 1980년 12월 7일 | style="text-align:left;" | |- | 9 | 프랑코 디 산토 | Franco Di Santo | 공격수 | 아르헨티나 | 1989년 4월 7일 | style="text-align:left;" | |- | 10 | 레벤트 아이치첵 | Levent Ayçiçek | 미드필더 | 독일 | 1994년 2월 12일 | style="text-align:left;" | |- | 11 [19] | 레빈 외즈투날리 | Levin Öztunalı | 미드필더 | 독일 | 1996년 3월 15일 | style="text-align:left;" | |- | 14 | 이제트 하이로비치 | Izet Hajrović | 공격수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1991년 8월 4일 | style="text-align:left;" | |- | 16 | 즐라트코 유누조비치 | Zlatko Junuzović | 미드필더 | 오스트리아 | 1987년 9월 26일 | style="text-align:left;" | |- | 17 | 외즈칸 일디림 | Özkan Yıldırım | 미드필더 | 독일 | 1993년 4월 10일 | style="text-align:left;" | |- | 18 | 펠릭스 크로스 | Felix Kroos | 미드필더 | 독일 | 1991년 3월 12일 | style="text-align:left;" | |- | 19 | 루카 밀란 잔더 | Luca-Milan Zander | 수비수 | 독일 | 1995년 8월 9일 | style="text-align:left;" | |- | 20 | 울리세스 가르시아 | Ulisses Garcia | 수비수 | 스위스 | 1996년 1월 11일 | style="text-align:left;" | |- | 21 | 안토니 우자 | Anthony Ujah | 공격수 | 나이지리아 | 1990년 10월 14일 | style="text-align:left;" | |- | 22 | 핀 바르텔스 | Fin Bartels | 미드필더 | 독일 | 1987년 2월 7일 | style="text-align:left;" | |- | 23 | 테오도르 게브레 셀라시 | Theodor Gebre Selassie | 수비수 | 체코 | 1986년 12월 24일 | style="text-align:left;" | |- | 26 | 율리안 폰 하케 | Julian Von Haacke | 미드필더 | 독일 | 1994년 2월 14일 | style="text-align:left;" | |- | 28 | 멜빈 로렌첸 | Melvyn Lorenzen | 공격수 | 독일 | 1994년 11월 26일 | style="text-align:left;" | |- | 30 | 미하엘 체터러 | Michael Zetterer | 골키퍼 | 독일 | 1995년 7월 12일 | style="text-align:left;" | |- | 35 | 막시밀리안 에게슈타인 | Maximilian Eggestein | 미드필더 | 독일 | 1996년 12월 8일 | style="text-align:left;" | |- | 37 | 야넥 슈테른베르그 | Janek Sternberg | 수비수 | 독일 | 1992년 10월 19일 | style="text-align:left;" | |- | 38 | 마르논-토마스 부쉬 | Marnon-Thomas Busch | 수비수 | 독일 | 1994년 12월 8일 | style="text-align:left;" | |- | 40 | 라이프 후시치 | Raif Husić | 골키퍼 | 독일 | 1996년 2월 5일 | style="text-align:left;" | |- | 42 | 펠릭스 비트발트 | Felix Wiedwald | 골키퍼 | 독일 | 1990년 3월 15일 | style="text-align:left;" | |- | 44 | 필리프 바르크프레데 | Philipp Bargfrede | 미드필더 | 독일 | 1989년 3월 3일 | style="text-align:left;" | |- | - | 루도비치 오브라니악 | Ludovic Obraniak | 미드필더 | 폴란드 | 1984년 11월 10일 | style="text-align:left;" | 틀:틀 끝

각주

  1. 베르더는 하중도(河中島)나 침수지역을 의미하며 슈타트베르더는 베저강에 위치한 하중도처럼 생긴 반도다. 현재 사용하는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도 베저강 연안인 페터스베르더에 있다.
  2. 유럽에는 이렇게 축구를 중심으로 여러 스포츠팀을 운영하는 클럽들이 많다. 단지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게 축구인 만큼 우리가 축구팀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3. 現 베저슈타디온
  4. 2008년에 이 시기에 쫓겨났던 유대인 축구선수들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5. 그러나 구단에서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어물쩡 넘어가고 있다.
  6. 재창단 과정에서 Grün-Weiß(초록-하양)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구단의 상징색으로 응원가에도 쓰이는 별명이다.
  7. 우승팀 AT 마드리드에게 졌다.
  8. 당시의 독일클럽들은 세미프로에 가까웠다. 급료상한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부업을 뛰었고, 아예 별명까지 얻은 선수들도 있다.
  9. 한편 이때 브레멘을 떨어트린 팀은 준우승팀 파르티잔이었다.
  10. 독일어로 Tor는 골, Hagel은 우박, 빗발을 의미한다. 즉 레하겔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
  11.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이끌고 DFB-포칼에서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몇 달 뒤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경질당했다.
  12. 2경기를 남겨두고 두 팀이 맞붙었는데 브레멘이 승리한다면 우승이었다. 후반 89분에 브레멘이 페널티킥을 얻었고, 성공률이 90%가 넘는 미하엘 쿠트초프가 키커라 다들 브레멘의 우승을 점쳤다. 그러나 골대를 맞춰 무승부로 끝났는데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브레멘이 패하여 승점 동률이 되었고, 골득실 차이로 바이언이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13. 34라운드 중 32라운드 동안 브레멘이 1위였고, 바이언은 마지막 경기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최종라운드가 첫 1위였던 우승팀은 지금까지도 이때의 바이언이 유일하다.
  14. 공교롭게도 레하겔과 악연이 있던 우도 라텍이 바이언의 감독에서 물러난 시즌이다.
  15. 1978-80년의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 이은 2번째 기록이다.
  16. 한편 1993/94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인 AC 밀란은 2실점으로 역대 최소실점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는데 이 2골 모두 브레멘이 넣었다.
  17. 이 부분은 분데스매니아게시글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18. 독일의 FA컵
  19.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