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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ISSN 1739-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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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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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제30연대가 국군 제2중대의 서쪽인 막장골을 돌파해 상수내리로 우회하자 제1대대는 차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06:00까지 현 위치를 고수한 제1대대는 06:20에 철수를 시작했다.
북한군 제30연대가 국군 제2중대의 서쪽인 막장골을 돌파해 상수내리로 우회하자 제1대대는 차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06:00까지 현 위치를 고수한 제1대대는 06:20에 철수를 시작했다.


국군 제2연대장은 전방과 교신이 두절되자 신남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사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연대장은 철수 병력을 통제하고 제1대대를 558고지에, 제2대대를 좌측의 402고지에 배치하였다. 어느정도 낙오병이 복귀하자 10:00에 지휘소를 자은리로 이동시켰다.
국군 제2연대장은 전방과 교신이 두절되자 신남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사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연대장은 철수 병력을 통제하고 제1대대를 558고지에, 제2대대를 좌측의 402고지에 배치하였다. 어느 정도 낙오병이 복귀하자 10:00에 지휘소를 자은리로 이동시켰다.


제2연대장에게 북한군 침공 보고를 받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2연대장에게 현지를 사수하고 제3대대를 어론으로 진출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제16포병대대의 1개 중대에게 제2연대를 지원하라고 하였다.
제2연대장에게 북한군 침공 보고를 받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2연대장에게 현지를 사수하고 제3대대를 어론으로 진출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제16포병대대의 1개 중대에게 제2연대를 지원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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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9일 ====
==== 6월 29일 ====
08:00 춘천 함락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중앙돌파를 시도함과 함께 국군 제2, 제19연대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일부 병력을 우회시켰다. 4시간의 전투로 북한군을 격퇴한 제2연대장은 북한군의 계획을 역이용하고 각 대대장에게 반격 지시를 내렸지만 전황이 위급하게 돌아간 것을 본 사단장이 홍천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작전명령에 따라 좌일선 제3대대가 먼저 철수, 이를 이어 우일선의 제1대대가, 마지막으로 제2대대가 철수하였다.
연대장을 연대의 주력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제1대대로 하여금 371고지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4:00에 371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을 기습해 탈환하였다.
==== 6월 30일 ====
연대 주력이 철수하자 제1대대는 371고지에서 후퇴, 05:00에 성산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계속 따라붙으며 공격을 하자 대대장이 직접 후미에서 지휘했으나 포탄에 관통상을 입었다. 제1대대는 이후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제3대대 제11중대는 대대의 후미에 남아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말고개에서 들리던 총성이 홍천에서도 들려오자 고립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중대는 소대별로 나뉘어 탈출을 시도하였고 모든 부대원이 후에 본대와 합류하였다.
18:00 북한군 제12사단 제30, 제32연대가 홍천을 점령하였다.


=== 현리지구 전투 ===
=== 현리지구 전투 ===
==== 6월 25일 ====
현리 동북쪽을 방어하던 국군 제2연대 제3대대는 04:00 연대장으로부터 전투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후 1시간 동안 아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공비침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05:30 북한군이 포의 지원을 받으며 제3대대 제9중대 정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북한군 제1경비여단 예하 제1, 제4대대의 공격을 받은 제9중대는 좌인접 중대인 제11중대와 함께 그들을 유인한 후 공격했지만 북한군의 병력은 계속 증가했다. 북한군의 공세가 강해지자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은 두 중대에 현지에서 이탈해 현리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예비대인 제10중대 또한 현리로 이동시켰다.
12:00 현리에 도착한 제10중대가 현리 서쪽 558고지에 진지를 점령하였으며, 13:20 제11중대가 520고지 좌측에 배치되었다. 제9중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제12중대장은 제11중대에게 연대 주력이 홍천으로 철수했음을 알렸고 제11중대장은 공격을 멈추고 철수 명령을 내렸는데 마침 대대장에게 중대가 돌출되었으니 521고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1중대는 521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격퇴하였다.


== 결과 ==
13:20 제10중대가 북한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자 15:00 철수를 시작해 엄수동으로 집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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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후방이 차단되어 연락이 단절된 제9중대는 14:00 철수를 시작해 아무런 피해 없이 우익의 제8사단 제10연대와 합류하였다.
 
23:00 제3대대는 연대와의 통신을 회복해 연대장에게 한계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6월 26일 ====
04:00 제3대대가 이동을 시작해 18:30 한계리에 도착한 대대는 연대의 좌일선으로 293-381고지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 6월 27일 ====
제3대대를 뒤따른 차량제대는 차량의 잦은 고장으로 08:00에 한계리에 도착하였지만 자주포에 보급품을 탑제한 선두차량이 파괴되자 장사원을 우회하여 횡계에서 대대와 합류하였다.
 
== 결과와 평가 ==
오래전부터 방어태세에 전념한 제7연대와 달리 제2연대는 전쟁 발발 3일전에 작전 지역에 배치되어 지형 숙지는 물론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단단한 방어선 구축 실패는 그렇다쳐도 지휘 체계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다. 제2연대장이 26일 06:00에 실시한 반격은 매우 무모한 작전이었으며 제1대대장의 잦은 교체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북한군에 불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강요해 북한의 홍천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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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50년 분쟁]]

2022년 6월 1일 (수) 15:17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인제-홍천 전투
군사 충돌 정보
중동부지역 작전
날짜 1950년 6월 25일 ~ 30일
위치 인제, 홍천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북한 대한민국
김창덕 소장
조관 총좌
김봉문 대좌
왕휘 대좌
차균섭 대좌
전우 소장
지병학 총좌
최학훈 대좌
황동화 대좌
손응삼 대좌
김종오 대령
함병선 대령
민병권 대령
김성 소령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인제-홍천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국군 제6사단 예하 제2,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제12보병사단과 벌인 전투다.

북한군 제2군단의 주공사단인 제12사단은 2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투입해 홍천을 점령하고 여주 방면으로 진격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이었으며 제5사단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 제2연대는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 수안보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전투전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북한군[편집 | 원본 편집]

제12사단은 홍천 공격을 위해 원산에서 출발, 6월 23일 인제 인근에 배치를 완료했다. 사단 예하 좌익 제32연대는 응봉산-부소현의 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고, 우익 제30연대가 계명산-하수내리 방어선을 돌파해 어론리로 우회해 퇴로 차단을 계획했다. 고속기동부대인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제12사단이 방어선을 돌파하면 이를 후속하고 다음 날 홍천에 투입되어 수원 방면으로 진격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제12사단엔 제5보병사단의 포병연대가 배속되어 화력이 증강되었다.

한국군[편집 | 원본 편집]

제6사단 제2연대는 사단 우일선 부대로, 옹진의 은파산 전투를 치른 뒤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편입된 제8연대와 교대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다. 제1, 제3대대를 전방에 배치한 후 23일이 되어서야 제2대대가 합류해 정황이 없었으나 본래 제8연대에 속했던 부속 부대들이 제2연대로 들어와 연대장을 도와주었다.

갑작스런 부대 이동에 의한 혼란에도 진지 보수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제2연대와 제8연대의 교대를 알아차린 북한군은 대남방송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대병력의 이동이 관측되었다. 연대장은 병력의 움직임과 전차 소리가 들린다는 전방부대의 보고와 무장공비 침투[1] 등 전운이 감돌자 23일 육군본부의 병력 외출 명령을 가볍게 씹고 무시하고 외출금지 명령과 함께 계속 방어를 보강하였다.

전투[편집 | 원본 편집]

홍천 동북지구 전투[편집 | 원본 편집]

6월 25일[편집 | 원본 편집]

04:00 북한군의 포격이 30분동안 진행되었고, 포격이 끝나자 국군 제6사단의 우전방인 제2연대 지역으로 북한군 제12사단 2개 연대가 제2연대의 정면을 공격을 시작했다. 제12사단 제32연대가 제2연대 제1대대 제1중대로, 제30연대가 제1대대 제2중대로 향했다.

05:30 북한군 제32연대가 음양리와 막장골로 침공을 개시했다.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은 신풍리의 600고지와 상수내리 사이의 도로를 이용해 침입했다. 제32연대는 안개가 짙음을 이용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제1대대 제1중대 제2소대가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1차 공격을 실패한 북한군이 포격을 시작한 뒤 다시 도하하자 제2소대는 어론리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30연대가 국군 제2중대의 서쪽인 막장골을 돌파해 상수내리로 우회하자 제1대대는 차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06:00까지 현 위치를 고수한 제1대대는 06:20에 철수를 시작했다.

국군 제2연대장은 전방과 교신이 두절되자 신남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사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연대장은 철수 병력을 통제하고 제1대대를 558고지에, 제2대대를 좌측의 402고지에 배치하였다. 어느 정도 낙오병이 복귀하자 10:00에 지휘소를 자은리로 이동시켰다.

제2연대장에게 북한군 침공 보고를 받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2연대장에게 현지를 사수하고 제3대대를 어론으로 진출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제16포병대대의 1개 중대에게 제2연대를 지원하라고 하였다.

11:50 제1대대는 1개 연대와 자주포를 상대로 싸웠으며 북한군은 자주포 2대가 파괴되자 후퇴하였다. 제1대대는 계속해 공격과 방어를 반복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12:30 철수, 자은리에 집결하였다. 이후 제1대대는 828-560고지와 402-454고지에 배치되었다.

6월 26일[편집 | 원본 편집]

04:00 전날 어론리까지 진출한 북한군 제12사단 제30연대와 제32연대는 홍천을 향해 이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함병선 대령의 반격계획에 따라 고지 탈취를 위해 진격중인 제2연대 제1, 제2대대와 맞붙게 되었다. 두 대대는 북한군의 선공을 받고 고전하였지만 분투하였는데 11:30 북한군이 양 대대의 사이를 뚫고 침공하자 연대장이 각 대대장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였다.

13:00 사단 참모장 고시복 중령이 연대장에게 홍천으로 철수하여 방어를 하라는 전화를 받자 연대장은 제1대대장의 항변을 물리고 철수를 지시하였다. 철수 과정에서 제1대대장과 작전주임이 요충지인 한계리의 점령을 건의하였고 14:00 철수를 시작하였다.[2] 그러나 연대의 철수를 감지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자주포 5대와 함께 공격을 시작하여 피해를 입었다.

연대장은 한계리에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하였으며 15:00 북한군이 골짜기를 돌아 나오자 매복해 격퇴하였다. 17:00 연대의 재편성이 완료되자 우일선 제1대대가 230-330고지를 점령하고 좌일선 제2대대가 371-293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강화하였다.

6월 27일[편집 | 원본 편집]

07:00 제2연대를 방문한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7연대의 활약에 춘천 지역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제19연대와 제16포병대대를 홍천으로 이동시켜 말고개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홍천을 빼앗겨 사단 자체가 포위될 상황에 놓일 것을 우려하였다.

북한군 제30, 제32연대가 진공하자 09:00 제16포병대대 예하 제3포대가 포격을 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2차에 걸친 공격이 실패한 북한군은 작전을 변경하고 포격만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9연대의 선발로 도착한 주임 박주근 소령은 성산리 동북쪽 2.5km 지점의 말고개가 방어에 유리하다는 보고를 제19연대장 민병권 중령에게 올렸고, 연대장은 자주포를 파괴할 목적으로 선발한 11명의 특공대와 제3대대를 말고개로 출발시켰다.

6월 28일[편집 | 원본 편집]

국군 제2연대 제1대대는 반격을 앞두고 03:00에 330고지를 출발, 397고지의 북한군을 격퇴하고 499고지를 탈환했다. 05:30 제1대대는 짙은 안개 속에 적의 중앙을 돌파하고 397고지를 점거, 복골을 포위하였으며 기습을 가해 혼란에 빠진 북한군을 궤멸시켰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이 포격과 함께 반격하자 역포위를 우려한 대대장이 철수를 명령, 방어진지인 말고개로 복귀했다.

북한군이 홍천 점령을 만회하기 위해 대규모로 공격을 시작했다. 09:20 안개가 걷히자 북한군의 움직임을 관측한 국군 제2연대장은 57mm 대전차포로 공격할 것을 명했으나 대전차포중대가 명령 전에 철수한 상태가 벌어졌다. 긴급한 상황에 대전차포중대가 돌아와 북한군보다 먼저 주요 지점을 선점했으며, 자주포가 다가오자 제2, 제19연대가 사격을 집중하였다. 자주포는 뒤따라오는 보병과 분리 되었으며 선두 자주포가 대전차포를 맞고 멈추자 미리 시체로 위장하고 있던 특공대가 수류탄으로 선두차량을 폭파시켰다. 진로가 막히자 후속 자주포의 기동이 불가능해졌으며 특공대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였다. 차량 탈출을 기도한 승무원들은 전원 사살되었고 총 10대의 자주포를 노획하거나 파괴하고 추가로 북한군 수십 명이 사살되었다.[3]

22:30 다시 시작된 북한군의 공격으로 국군이 후퇴를 시작했으나 다시 반격을 감행해 하루 3차례의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 24:00에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6월 29일[편집 | 원본 편집]

08:00 춘천 함락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중앙돌파를 시도함과 함께 국군 제2, 제19연대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일부 병력을 우회시켰다. 4시간의 전투로 북한군을 격퇴한 제2연대장은 북한군의 계획을 역이용하고 각 대대장에게 반격 지시를 내렸지만 전황이 위급하게 돌아간 것을 본 사단장이 홍천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작전명령에 따라 좌일선 제3대대가 먼저 철수, 이를 이어 우일선의 제1대대가, 마지막으로 제2대대가 철수하였다.

연대장을 연대의 주력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제1대대로 하여금 371고지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4:00에 371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을 기습해 탈환하였다.

6월 30일[편집 | 원본 편집]

연대 주력이 철수하자 제1대대는 371고지에서 후퇴, 05:00에 성산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계속 따라붙으며 공격을 하자 대대장이 직접 후미에서 지휘했으나 포탄에 관통상을 입었다. 제1대대는 이후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제3대대 제11중대는 대대의 후미에 남아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말고개에서 들리던 총성이 홍천에서도 들려오자 고립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중대는 소대별로 나뉘어 탈출을 시도하였고 모든 부대원이 후에 본대와 합류하였다.

18:00 북한군 제12사단 제30, 제32연대가 홍천을 점령하였다.

현리지구 전투[편집 | 원본 편집]

6월 25일[편집 | 원본 편집]

현리 동북쪽을 방어하던 국군 제2연대 제3대대는 04:00 연대장으로부터 전투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후 1시간 동안 아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공비침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05:30 북한군이 포의 지원을 받으며 제3대대 제9중대 정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북한군 제1경비여단 예하 제1, 제4대대의 공격을 받은 제9중대는 좌인접 중대인 제11중대와 함께 그들을 유인한 후 공격했지만 북한군의 병력은 계속 증가했다. 북한군의 공세가 강해지자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은 두 중대에 현지에서 이탈해 현리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예비대인 제10중대 또한 현리로 이동시켰다.

12:00 현리에 도착한 제10중대가 현리 서쪽 558고지에 진지를 점령하였으며, 13:20 제11중대가 520고지 좌측에 배치되었다. 제9중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제12중대장은 제11중대에게 연대 주력이 홍천으로 철수했음을 알렸고 제11중대장은 공격을 멈추고 철수 명령을 내렸는데 마침 대대장에게 중대가 돌출되었으니 521고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1중대는 521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격퇴하였다.

13:20 제10중대가 북한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자 15:00 철수를 시작해 엄수동으로 집결했다.

한편 후방이 차단되어 연락이 단절된 제9중대는 14:00 철수를 시작해 아무런 피해 없이 우익의 제8사단 제10연대와 합류하였다.

23:00 제3대대는 연대와의 통신을 회복해 연대장에게 한계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26일[편집 | 원본 편집]

04:00 제3대대가 이동을 시작해 18:30 한계리에 도착한 대대는 연대의 좌일선으로 293-381고지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6월 27일[편집 | 원본 편집]

제3대대를 뒤따른 차량제대는 차량의 잦은 고장으로 08:00에 한계리에 도착하였지만 자주포에 보급품을 탑제한 선두차량이 파괴되자 장사원을 우회하여 횡계에서 대대와 합류하였다.

결과와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오래전부터 방어태세에 전념한 제7연대와 달리 제2연대는 전쟁 발발 3일전에 작전 지역에 배치되어 지형 숙지는 물론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단단한 방어선 구축 실패는 그렇다쳐도 지휘 체계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다. 제2연대장이 26일 06:00에 실시한 반격은 매우 무모한 작전이었으며 제1대대장의 잦은 교체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북한군에 불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강요해 북한의 홍천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는데 성공했다.

각주

  1. 붙잡은 포로는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8월 15일에 완전 해방된다고 진술하였으며 국군의 배치상황이 포함 된 상황도를 가지고 있었다.
  2. 한계리는 차 한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아 방어에 용이했다.
  3. 모든 특공대원이 피해 없이 돌아왔다.